예람이에게 | 대지

…영이십니다…보지 못했습니다(요한복음 4장 24절, 1장 18절로부터)

by 이제월



하느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니 그분을 예배하는 이는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

πνεῦμα ὁ θεός,

καὶ τοὺς προσκυνοῦντας αὐτὸν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δεῖ προσκυνεῖν.

— 요한복음 4장 24절.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 품안에 계신 외아드님,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 주셨다.

Θεὸν οὐδεὶς ἑώρακεν πώποτε·

ὁ μονογενὴς θεὸς

ὁ ὢν εἰς τὸν κόλπον τοῦ πατρός,

ἐκεῖνος ἐξηγήσατο.

— 요한복음 1장 18절.



πνεῦμα ὁ θεός.

하느님은 영이시다.

요한복음 4장 24절의 말씀.


Θεὸν οὐδεὶς ἑώρακεν πώποτε.

하느님을 아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같은 복음서 1장 18절의 찬가 마지막절 부분.



바꾸어 써 보겠습니다.


평화를 아무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Εἰρήνην οὐδεὶς ἑώρακεν πώποτε.


평화는 영이다.

Εἰρήνη πνεῦμα ἐστίν.


그러니 평화를 섬기는 이들은

영과 진리 안에서

섬겨야 한다.

καὶ τοὺς δουλεύοντας τῇ εἰρήνῃ

ἐν πνεύματι καὶ ἀληθείᾳ

δεῖ δουλεύειν.



평화가 영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느님이 영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법칙으로 증명하고 확인하는

이 세계의 질서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그것을 감싸고[내재, 內在] 그것을 넘어서서[초월, 超越]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법칙으로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런 식으로는 목격할 수 없습니다.

몇 가지 규칙을 지키면 마음에 평화를 얻거나, 가정에 평화를 유지하거나, 세계 평화를 이룩하거나 하지 —

않습니다.


평화는 우리가 알거나 모르거나

애쓰거나 돌보지 않거나 상관없이

지켜지는 자연법칙, 물리현상을 지배하는 중력이나 자기장, 강력과 약력, 관성, 질량보존, ……이런 ‘법칙’이 아닙니다.


평화는 ‘가치’이고 ‘원칙’일 따름입니다.

그것은 목적이 되는 가치이며

목적을 이루는 데 간직하고 지켜야 하는 방편이요 도구입니다.

말하자면 삶의 양식, 생활양식(生活樣式, Life Program)입니다.


이 부분을 혼동하여

어디 정해진 목적지에 가듯이 평화를 추구하거나

어느 만들어진 물건처럼 평화를 간직하려는 이들은

평화를 영이 아니라 물성을 지닌 것처럼 취급하였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얻지 못하고, 머무르지 못합니다.

함께할 수가 없습니다.

평화와 벗할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평화의 존재가 아닙니다.

평화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유령처럼 존재하지 않는 허깨비도 아니고

아무렇게나 지어내면 되는 창작소설도 아니지만

우리가 살려내지 않으면 죽고 마는 갓난아기처럼

우리가 돌보고 속썩이며 키우고 아끼고

그러면서도 믿고 곁을 지키거나 따르기도 하는 그런 자라나는 자식처럼

그리고 어느새 친구요, 어버이처럼

평화를 만나야 합니다.

그렇게 보는 평화는

그림 그리거나 무어라 — 이를테면, 산성이다 알칼리성이다 하고 — 규정할 수 없습니다.

평화는 엄격했다가 부드러웠다가

자상했다가 냉랭합니다.

평화는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유롭습니다.


우리는 평화로우면서 평화에 이바지하고

평화를 추구함으로써, 평화를 위해 일하면서 평화로워집니다.

다른 어떤 조건도 현상도 상관없이

평화는 누리거나, 누리지 못합니다.


다만 평화는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마주치면 압니다.

같이 숨쉬면 구분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평화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영과, <진리—안에서> 보아야만 보입니다.

결국 문제는 진리입니다.


거짓 평화, 가짜 평화에 속지 말고

그저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그러면서도 바깥이, 외물이, 세계가 아무리 시끄럽더라도

내면의 평화를 깨트리지 마십시오.

결연히 거부하십시오.


그대를 평화롭지 못하게 하는 어떤 것도 허락하거나 동의하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이가 죽더라도 평화롭고

아끼던 것들이 부숴져도 평화롭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이 가짜였어서 수고가 물거품이 되어도 평화로우십시오.

평화는 저것들과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평화를 원하십니까?

그런데도 평화를 위해 일할 건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화가 궁금하고, 얻고 싶은가요?


그 어떤 이의 마음을 얻는 것과 같습니다.

진리 안에 머물며

영적으로 평화를 섬겨야 합니다.

우러르는 마음, 경(敬)의 정신 없이는 평화나

그밖에 여러 덕(德)들을 누릴 수 없습니다.

만나려면 그대 자신도, 육체를 누린 채로 이미 영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영적으로 산다는 것이 무언지 모르는 건 당연합니다.

태어나서부터 계속 보고 겪은 것들이 물질의 세계이니까요.

그 법칙은 익숙하고, 불변하고,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특정한 방식으로 경험하고 영속하는 세계일 뿐입니다.

그러나 또 그것뿐 우리가 달리 무얼 안단 말입니까?

경험한다 해도 온전히 경험하고 온전히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세계 안에서 온전히 성숙하여 영적 기관을 발달시키는 숙제를 풀고 있는 셈입니다.

영을 경험하도록 육체를 한껏 써야 합니다.

한껏 써서 거기에 매이지 말아야 하며

영이 육을 좇지 않고, 육이 영을 따르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간단합니다. 영적으로 산다는 게 무언지 모르니까

육적으로 사는 것을 부정하지 않되

육적인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말고 아랑곳없이 뜻한 대로 나아가십시오.

오직 이게 틀렸구나, 진리가 아니라고 느낄 때에만 방향을 바꾸십시오.

이게 맞는데,라고 생각하는 한 어떤 불이익과 무응답에 직면하고, 한가운데 있더라도

똑바로 가로질러 가십시오.

그러면 영과 진리가 함께 성숙합니다.

하나는 눈이요, 하나는 눈이 보는 빛입니다.

빛을 ‘볼’ 때 내 눈을 떴음을 아는 것이고

목소리를 ‘들을’ 때 내 귀가 뜨였음을 아는 것이고

향기를 ‘맡을’ 때 내게 코가 막히지 않고 뚫렸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야

그러고도 한참을 더 가서야

우리의 입이 진리를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얼굴’을 가질 것입니다.

비로소 내가 나이고, 안심(安心)을 얻을 것입니다.


멀고, 고단하지만

살아가는 몸입니다.

몸을 타고 사는 일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나아가지 않고 주춤대거나 비뚤게 나아가기 때문에 못 다 갈 뿐,

태어났다는 것이

이미 충분한 자격이요, 능력의 부여입니다.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할 뿐이고,

올바른 일을 단지 올바르기 때문에 올바르게 하면 그만입니다.

계속 그렇게 하면 됩니다.


힘쓰지 않아도 사랑에 빠지고

달라지듯이


그냥 저절로 됩니다.

나는 내 할일을 하면 그만입니다.


평화는 영입니다.

평화를 빕니다.

Peace be with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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