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

죄와 죄인을 구별하기 ― 업의 소멸에 대하여

by 이제월


죄와 죄인을 구별하기.

구별하면 죄인은 결국 죄와 분리되어 선인이 됩니다.

이미 지은 죄가 그를 계속 죄인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지금 짓고 있는 죄만이 그 사람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구별되나 그가 그의 죄를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죄 중에 있다’고 합니다.


뉘우치지 않는 건 가장 심각한 류의 죄입니다.

이는 죄와 분리되어 새로 평가하고 새로 경험할 새 사람을 과거에 가둡니다.

죄인이 자기 죄로 인해 괴롭힘당하는 건 죄지은 그가 누구건 지금 그 안에 새 사람이 나고, 새 사람이 가두어지기 때문입니다.

낙인은 사회가 찍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 찍기도 합니다.

사회가 낙인 찍을 때 사회가 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같이 뉘우치고 고쳐야 합니다.

과거에? 아니. 지금.


죄와 분리돼 사람만 남습니다.

그러나 죗값은 그가 치룹니다. 깨끗해진 그가 왜 책임을 질까요?

부당하고-억울한 일이 아닐까요?


부당-억울은 한 쌍입니다. 쌍이 깨지면 한쪽과 함께 나머지 한쪽도 깨트려집니다. 부당한 일이 없었다면 억울함은 사실이 아니게 됩니다. 착각입니다.

다시 돌이켜서 ‘왜?’


눈이 옵니다. 집 앞의 눈은 누가 치워야 할까요?

눈길에 미끄러져 부러진 다리는 누구의 잘못인가요?

눈에게 책임을 물을 건가요?

희생자가 가해자인 걸까요?

눈은 내가 내린 게 아니고 눈이 재앙도 아니지만, 내 집 앞의 눈을 내가 아니면 누가 치울까요?

남이겠죠.

그런데 남이 치우는 게 맞다면 그대도 이제부터 어느 집이든 불규칙하게 닥치는 대로 눈을 쓸고 치워야 합니다. 축하합니다. 평생 못 끝낼 업을 얻었군요. 퇴사 걱정은 없겠습니다.

지옥인가?

책임은 이 세계가 나누어 집니다. 거기 내 몫도 있습니다. 그런 법입니다. 그뿐입니다.

생각을 돌려 <Why me?>라고 항변하길 그치고, <Why not me?>라고 반성(反省, reflection) 즉, 바깥이 아니라 내면을 향해, 자기 안쪽으로 조명을 돌려 샅샅이 비추어 볼 것입니다.


생각을 돌리기.

사고의 회개(悔改)요 회심(回心)이 행동의 회개로 전화(轉化, transition)할 것입니다.


죄인은 없고

선인들은 죗값을 치룹니다.

카르마(कर्म ), 업(業)을 지웁니다. 완전 삭제.


그대가 선하다면 우리의 죗값을 함께 치루고

그대가 죄인이라면 그대의 죗값을 치루십시오.


아마 전자가 후자보다 더 기쁘고 즐거울 것입니다.

그 멍에가 덜 아프고 덜 힘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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