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시와 현실

말의 탄성과 시어(詩語)가 하는 일에 대하여

by 이제월





성찬경 (成贊慶, 1930년 3월 21일~2013년 2월 26일) 시인은 일평생 ‘밀핵시론’(密核詩論)을 펼치며 언어의 탄성(彈性)을 탐구하였습니다.

시인의 시는 언어의 탄성을 시험하고 화려하고 공연(公演)하여

높은 정신의 깊은 운동을 보여 주었는데

소재와 언어의 탐구, 주제에 대한 이해와 모색이 마침내는 일자시(一字詩)에 이르렀습니다.

일자시란 무엇인가, 그 한 자가 곧 시인 말들을 찾아

아무것도 보태거나 꾸미지 않고 그냥 내놓는 것입니다.

이 순간 시인은 공예가나 발명가가 아니라

순수한 발견자요, 진리의 계시자(啓示者)가 됩니다.


빛, 해, 달, 꿈 같은 말들이 여기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시인은 자기 야심이 아니라 인류가 거처할 언어의 집을, 인류의 자식이 아니라

어쩌면 인류정신의 어머니로서 발견을 기다리는 그 언어를 찾아 주었습니다.


우리가 발견할 미지의 영역을 정신세계에서 무한하게 열어 주었다는 점에서

성찬경 시인이 일생 걸어간 노정이

누군가의 욕심이나 주관적 기대, 상상이 아니라

괴테가 말한 현실을 창조하는 사고 즉, 형상적 사고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은 사실인데 창조적 사실입니다.

사물보다 분명하지만 사물과 다릅니다.

사물은 거기에 있는 대상, 단지 그렇게 있는 즉자 존재(卽者 存在, l’en-soi, being-in-itself)가 아니고

거기에 대응하는 주체로서의 스스로와 거리두고 바라보는, 그리하여 반성할 수 있는

대자 존재(對自 存在, le pour-soi, being-for-itself)와도 또 다릅니다.

이 시적 형상, 시적 현실은 새로운 세계를 구성하는데

인간정신 같은 대자 존재는 아니고 그렇다고 사물화한 즉자 존재도 아닙니다.

이 시적 현실은 우리와 <관계-맺는> 존재입니다.

우리와 관계 맺으며 우리를 <변화-시키는> 존재입니다.

이쪽 아니면 저쪽이 아니라

‘이분법을 파괴하는’ 존재, 월경(越境, Transgression)하는 존재입니다.


시는 살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자시로 우뚝 선 시어들은 만물의 기초로서 원소들(elements)처럼

근원을 이루어

시의 세계와 경험의 세계를 단단하게 이어 준다고 확언하겠습니다.


요며칠 눈이 꽤 날렸습니다.

그런데 눈보라라기에 애매한 그런 지점에서 내리는 걸 보았습니다.

그렇게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을 가리켜, 함박눈, 진눈깨비, ……이런 말들처럼 가리키는 이름이 있는데

‘눈설레’라는 예쁜 말입니다.

보는 마음도 설레지만, 눈이 저 먼저 설레고 있는 걸까요?

이름 붙인 이의 생각을 들여다볼 수야 없지만

갑자기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정말 이런 말이 있어서 반가웠습니다.


시는, 시인은

세계를 발견하고, 발견을 통해 재창조합니다.

사실 현대 물리학은

그 어떤 사물이건

관찰자가 <바라보기> 때문에

<이것-이다>라고 확실하게 진술하고 있습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이에 대한 비유입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관찰할 뿐 아니라

빛에 의해 세계 전체가 보여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발견하여

발견하는 시선에 의하여

창조되고 현현(顯現)한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

시와 더불어

창조하는 시인이 되십시오.

그윽하게

발견하는 것으로

응시(凝視)만으로 충분합니다.

아니, 넘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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