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대지

자기 사명을 시작하세요, 제 때에, 제자리에서.

by 이제월



예수께서는 요한이 잡혔다는 말을 듣고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

◦그러나 나자렛을 떠나 즈불룬과 납달리 지역에 있는 호숫가 가파르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그리하여 이사야 예언자를 시켜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 마태오복음 4장 12-14절(200주년신약성서)


그런데 이 번역은 ‘약한’ 번역입니다.

맞는 말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저기 담긴 강한 ‘목적성’을 놓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해당 본문의 코이네(초세기 사용된 대중 희랍어로 신약성서를 기록한 문자) 원문은 아래와 같습니다.


4:12

Ἀκούσας δὲ ὅτι Ἰωάννης παρεδόθη, ἀνεχώρησεν εἰς τὴν Γαλιλαίαν·


4:13

καὶ καταλιπὼν τὴν Ναζαρὰ, ἐλθὼν κατῴκησεν εἰς Καφαρναοὺμ τὴν παραθαλασσίαν,

ἐν ὁρίοις Ζαβουλὼν καὶ Νεφθαλίμ·


4:14

ἵνα πληρωθῇ τὸ ῥηθὲν διὰ Ἠσαΐου τοῦ προφήτου λέγοντος·


12절에 쓰인 παρεδόθη는 ‘배신당하다, 넘겨지다, 체포되다’는 말이어서 단순히 체포당하는 것을 가리키지 않고, 무언가 부당한 폭력에 넘겨진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ἀνεχώρησεν는 전략적 철수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넘겨진> 것을 보고는 <물러났다>. 예수는 나중에 자신이 당할 배신, 넘겨짐의 예시를 보고서 다음 단계로 자신의 행보를 이행한 것입니다.


13절에서 καταλιπὼν은 의도적으로 버리고 떠난 것을 가리킵니다. 고향을 버리고, 정체성으로부터 떨어지는 것입니다. 마치 망명하듯이 말입니다. 말하자면 한 번 전진했던 예수는 상황을 판단하고 출신 지방 갈릴래아로 물러나지만, 그중에서 자기의 최초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않습니다. 출세(出世), 세상에 발딛기 전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세운 뜻을 향해 나아가되 현명하게 나서고 물러서기를 할 뿐이지, 결코 옛날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κατῴκησεν은 일시적 체류가 아니라 <삶의 중심을 옮김>을 뜻합니다. 그리고 가파르나움의 위치는 παραθαλασσίαν, <바다 옆>입니다. 바다는 물론 갈릴래아 호수를 말합니다. 이는 교통, 상업, 이방 문화가 교차하는 중심지라는 뜻입니다. 물러나되 매우 전략적으로 중심지를 옮긴 것입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14절에서 ἵνα πληρωθῇ는 ‘그렇게 되기 위함이었다’는 말입니다. 가파르나움으로 옮겨간 것이 단순 결과가 아니라 <신학적 목적>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무엇을? τὸ ῥηθὲν. <이미 말해진 그 말씀>을. 즉, 이사야 예언자의 다음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그 장소로 이동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태오 특유의 성취 공식(formula citation)을 따릅니다.

직역한 문장을 다시 보겠습니다.


그러자 (δὲ), 예수께서는 요한이 넘겨졌다는 것을 들으시고(Ἀκούσας … παρεδόθη),

갈릴래아로 물러가셨다(ἀνεχώρησεν εἰς τὴν Γαλιλαίαν).


그리고 나자렛을 떠나(καὶ καταλιπὼν τὴν Ναζαρὰ),

와서(ἐλθὼν) 바닷가에 있는 가파르나움에 거처를 정하셨는데(κατῴκησεν),

그곳은 스불론과 납탈리의 경계 지역에 있었다(ἐν ὁρίοις Ζαβουλὼν καὶ Νεφθαλίμ).


이는 예언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해진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함이었다(ἵνα πληρωθῇ…).


직역을 통해 세 가지 중요한 사항이 드러납니다.

첫째, 예수의 이동은 도피가 아니라 ‘사명의 재배치’였다는 점입니다.

요한의 체포로 예수의 공적 사역이 시작되며,

중심에서 변방으로 이동합니다.

둘째, 이 장소 이동의 의미인데, 갈릴래아, 특히 스불론·납탈리는

정치적·종교적 주변부이자,

이사야 예언의 공간이기에

유다 중심 신앙 질서에 대한 전복적 선택이 됩니다.

세 번째로 바라볼 지점은 마태오복음사가가 이 장면을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예언 성취의 구조 속에 배치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즈불룬 땅과 납달리 땅 호수로 가는 길 요르단강 건너편 이방인들의 갈릴래아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이 솟아올랐도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는 선포하시기 시작하여 "여러분은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하고 말씀하셨다.

— 마태오복음 4장 15-17절(200주년신약성서)


이 단락의 후반부는 따로 풀이할 이야기가 넘치지만, 저는 보통 넘기는 전반부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요한이 넘겨진 일, 체포당하는 일처럼 외부의 압력에 의해 내가 물러난 것인가? 나는 상황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돌부리 하나에 불과한가? 아니면 내가 상황을 만들고 주도하며, 목적을 지향해 행동하는가?

마태오가 그려내는 예수의 행보는 단순히 수동적인 객체도 아니고, 나서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의지적 주체도 아닙니다. 말씀을 성취하는 것, 약속을 지키고 이루는 것, 진행 중이던 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채워 완성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것은 순종이지만 사건의 부산물이 아니고, 뜻하고 의지하지만 오직 제 뜻대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 이성과 의지의 차원에서 보자면 이것이 중도(中道)이고, 중용(中庸)일 것입니다.

그는 겁 먹지 않았고, 비겁하지 않습니다. 상황에 밀려나는 것도 아니고, 상황을 이용하는 것도 아닙니다. 때를 읽고, 있을 곳에 서서 제 할 일을 합니다.


그게 꼭 인류를 구원하라 같은 게 아니어도 좋습니다.

자기 사명을 발견하고,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여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건 마냥 주변에 맞추어서도 얻을 수 없고, 마냥 제 고집을 부려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내가 이걸 할 때로구나, 하고 느끼는 감각.

그것이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지점일 것입니다. 인간은 역사의 일부이고, 언제나 더 큰 선의 일부로서 부분의 선을 행합니다.


개체의 감각과 경험을 넘어서서 자기 자신을 정체(正體, identification)하십시오.

올바로 한다면 그것은 신화(神化, Deification)에 다름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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