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적화 오류
무언가를 정말 열심히 해서 잘하게 되면
최적화 오류가 일어납니다.
제가 만들어 쓰는 말입니다.
최적화 오류란 무언가에 최적화되면
다른 무언가에도 그 방법을 적용할 뿐 아니라
다른 것에 맞는 이해와 수용 대신
맞지 않게 곧 틀리게 느낀다는 것입니다.
단순히 쓰는 방식아 맞지 않는 건
효과를 살펴 방법을 바꿀 수 있습니다.
새로 배우거나 바꿔 쓰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느끼는’ 것부터가 어떤 것에 특화해 적응해 버리면
문제는 더 어려워집니다.
왜냐하면 자기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에
고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자신은 잘하고 있는데 상대가 잘못한다고, 대상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서입니다.
반성적 성찰이 철학의 기본이 되는 건 이 때문입니다.
내가 틀릴 가능성, 내가 잘못하고 있을 가능성, 내가 잘못됐을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고
이것을 잘 살펴 진위를 판별하는 능력을 기르지 않고는
무엇에 대한 어떤 생각이건
그것이 맞을 개연성이 없습니다.
각자가 자기가 맞다고, 제 잘난 맛에 취해 살뿐, 실제로는 다 어긋나는 겁니다.
하나에 너무 열심히 맞추어서
다른 데선 다 어긋나는 것.
저는 이것을 최적화 오류라고 부릅니다.
개를 훈련하듯 사람을 대하거나
수감자를 대하듯 자녀를 대하거나
적을 대하듯 친구를 대하는 것.
나는 친절한데 이 사람이 신경질적이고 공격적이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아니라면?
즉, 그는 나보다 너무나도 섬세하고 여린 사람이어서
내가 친절하다고 생각하는 작은 터치가
위협이고 고통이었다면?
그래서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경계를 존중받고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저항한 거라면?
그렇다면 내가 느끼고 생각한 사실은 전부 거짓이고
상대를 고통에 빠트린 게 나인 겁니다.
줄기세포 연구 초창기 난제 중 하나는 어느 부분이 팔이 되고 어느 부분이 다리가 되는가였다고 합니다. 수년째 진척이 없던 연구는 연구실을 방문한 비전문가에 의해 돌파됐다고 하더군요. 그는 존경하는 연구실을 방문하였다가 우연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이렇게 말했다죠. “팔과 다리(arm/leg/hand……)를 구분하는 게 왜 중요한지 모르겠어요. 우리 말에는 팔이나 다리라는 말이 없어요. 사지(四肢, limb) 모두를 ‘타우’(tau)라고 부르거든요.” 연구자들은 자신들의 고정관념을 버리고 다시 관찰했는데, 그 결과 팔다리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발생학적으로 ‘관계’에 의해 분화한다는 것을 밝혀냈다지요.
사실 이 이야기를 듣고 찾아봤지만 실제 사건 여부를 확인할 순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 이야기의 중요 사항들은 모두 사실입니다. 언어상대성에 대한 사항은 라부칼레베(Lavukaleve)라는 언어에서 실제로 보고되는 특징입니다. 라부칼레베(Lavukaleve)는 솔로몬 제도(Russell Islands)에서 사용되는 파푸아계(“Papuan”으로 분류) 언어인데, 인체의 ‘팔/다리’(더 넓게는 팔·손·다리 범주)를 하나의 단어로 포괄하는 사례로 학술 문헌에서 자주 인용되며, 그 단어가 tau로 제시됩니다. “영어의 limb에 해당하는 단어 tau가 (맥락에 따라) arm/leg/hand까지 포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발생학과 재생생물학에서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생기는 게 아니라, 전후/근원-말단 축, 그리고 앞다리/뒷다리 정체성 등이 유전자 네트워크로 분화한다”는 점이 정설로 자리잡았습니다. 예컨대 Tbx5(앞다리/forelimb) vs Tbx4(뒷다리/hindlimb) 같은 축이 대표적입니다.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이해, 우리 자신에 대한 이해는 좀 더 유연할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 군대식으로, 모든 걸 가족관계의 확장처럼, 너무 헌신만 하거나, 너무 마음만 읽어 주거나……, 모두 한 극단(極端)입니다. 극단을 피해 중용에 서기까지 우선 부드러우십시오.
최적화는 ‘편의’를 키웁니다만, 그것은 특정한 대상과 경험에 지배당하고 거기에만 적응케 합니다. 그럼 나머지는 엉망이 됩니다. 그런 최적화 말고 세계 자체에 대해 최적화하십시오. 이 세계는 풍부하고 변화무쌍하며 순환합니다. 그 균형감을 배우십시오. ‘전체’에 적응하라는 것입니다.
전체가 아닌 부분에 최적화하는 순간 나머지 모든 부분과, 전체와 불협화음을 내게 됩니다. 잘못 느끼고, 잘못 생각하여 고통받으며 고통을 주게 됩니다. 그 고통은 해소하거나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체의 일부로서 자연히 받는 고통들은 서로 이해하고 소화할 수 있습니다.
강한 것은 부드럽다는 걸 기억하십시오. 부드럽지 않다면 딱딱하고 고집스러울 뿐이지 강한 것이 아닙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