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리, 이 친구 다시 알기
사고법, 생각의 기술이란 건 어떻게 치장하든
좋게 말하는 것도 나쁘게 말하는 것도 아니라 그냥 그것은, ‘조건화-하기’라고 말했지요.
그리고 ‘논리’라는 걸 이해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논리란 무엇인가?
이 질문을 해야겠습니다.
논리를 그냥 말 잘하는 것이라거나 말장난으로 치부해선 곤란합니다.
그건 사실이 아닐 뿐더러 다른 모든 사실에 혼동을 붓기 때문입니다.
물론 논리가 말을 잘하게 해 줄지 모릅니다. 언제나 그렇다고는 못하겠고, ‘말을 잘한다’는 게
‘말이 통한다’는 뜻이라고 한다면 더욱 더 전해지기는커녕 거부를 촉진할 수 있다고도 경고할만 합니다만.
그럼 논리는 무엇인가?
<흐르는 결>입니다.
무언가가 맞게 흐르면 논리에 맞는 거고, 안 맞게 흐르면 논리가 이상한 겁니다.
글처럼 한 자리에 펼치면 그건 ‘짜임새’로 보이기도 하지만 구조 자체가 논리는 아닙니다.
논리는 사건이, 의미가 어떻게 전개되는가,
이것과 저것은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 이어짐, 흐름에 관련합니다.
그 흐름의 결이 사실과 서로 맞으면 논리가 맞는 거고,
사실과 부딪치면 논리가 틀린 겁니다.
그런데 펼쳐지는 사실은 억지와 거짓이 범벅이 되어 판별하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그때 비록 현실에 펼쳐지진 못했지만
본래의 자연스러운 결을 따라가면
어떤 행위나 사건이 어디가 논리적이고 어디서 비논리적인지 식별할 수 있습니다.
말이든, 사물이든, 감정이든 똑같습니다.
그래서 논리는 뭔가 그럴싸한 말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때로 논리는 단순한 문법을 넘어섭니다.
문법이 인위적이라면
논리는 자연 아니, 자연을 넘어서서 자연을 구성하고 작동하는 그 천연한 문법이라 하겠습니다.
본래 그랬어야 하는 모습이 논리입니다.
그러니 논리를 살피는 건 말꼬리를 잡기 위함도 아니고
싸워서 이기려는 것도 아닙니다.
한 사람의 정신이, 한 사람의 영혼이
자신의 정직성으로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반드시 살피고, 기꺼이 져서 굴복하기 위함입니다.
기꺼이 굴복해
무엇에 순종할지, 무엇을 기뻐할지
그리하여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지
판단하고, 결정하고, 투신하기 위한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의 움직임을 보십시오.
그 물줄기가 어디로 흐르려고 하는 건지
부당한 간섭이 없다면, 아무도 억지 부리지 않고
두려움이 없다면
일이 어떻게 되어갈 것인지 보십시오.
특정한 결론이나 결말을 기대하지 않고
어떠한 보상도 바라지 않는
작고 가난한(Poverello!) 정신은
마치 미래를 보는 것처럼
마치 미리 답을 들은 것처럼
이 논리를 간파(看破)합니다.
올해는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이 탄생하고 8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교황은 이에 2026년을 ‘희년’ 즉, 기쁨의 해로 선포하였습니다.
그리고 포베렐로라고 불린 아씨시의 빈자(貧者)의 유해가 800년만에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아는 한 프란치스코는 가장 논리적인 사람입니다.
잠시 세웠다 사라질 거짓 질서 대신에
진짜 질서를 간파하고, 거기에 ‘순종’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순천(順天) 사상이 있습니다.
순천자흥(順天者興) 역천자망(逆天者亡)
맹자(孟子) 이루상편(離婁上篇)에 실린 맹자의 말입니다.
하늘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하늘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는 말인데,
하늘을 따른다는 것, 순종한다는 것은
하늘과 그 흐르는 결이 같다는 것입니다.
순종은 자유의 박탈이 아니라
존엄의 상실, 격하가 아니라
하늘과 같아지는 무한한 격상입니다.
내 몸이 비뚤어진 걸 바로잡고
나쁜 습관을 고쳐 내부 장기에서부터 자세, 운동능력 모두에 걸쳐
‘건강한 몸’이 되듯이
하늘의 질서, 하늘의 움직임이 일으키는 흐름, 그 결과 같아져
내가 하는 것이 곧 하늘이 하는 것이 되는,
내 하는 바가 하늘이 하는 바와 부딪치지 않고 함께 춤추듯 어울려 같이 흐르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그대가
작고 가난한 사람이기를 바랍니다.
살리고, 살고, 흥하기를 바랍니다.
순종하여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억지를 부리지 않고
선선히 느끼고, 선선히 행하기를 바랍니다.
쓴맛이 단맛으로 바뀌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하지만 본래가 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그저 견디기만 하면 됩니다.
나를 비우고 가만 두는 그만큼 더 빠르게, 더 많이
하늘이 들어차고 내가 곧 하늘(人乃天)이 됩니다.
살아서 숨쉬는 논리를.
하늘길을 내어 하늘숨을 쉬세요.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