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칼을 줄게

평등은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 식별의 문제다 — 존재와 작용 구별하기

by 이제월



참 요상하다. 평등은 좋은 것인데

그게 정말 좋은 것인지 헷갈리는 아니, 주저하는 순간이 있다.

일단 다같이 망하자 — 확실하게 평등한데 대개는 싫어할 것이다.

차이, 개별성을 인정할 것 없다 — 받는 쪽에선 몰라도 내어주는 쪽에서 선선한 마음을 갖기 어렵다.

예를 들어 보자.

똘이는 성품이 평등해서 일단 저 스스로에게 똑같이 한다. 밥도 식탁에서 먹고 똥도 식탁에서 눈다. 입이나 미투리나 똑같이 소화에 기여하는데, 어찌 귀천이 있느냔 것이다. 장갑을 발에도 끼고 양말을 손에도 신는다. 생김새도 얼추 닮았으니 고하는 없다, 작은 불편이 차별의 이유는 될 수 없단다.

똘이의 선택은 옳은가? 판이 너무 커지니까 그게 좋을까? 똘이는 그걸 좋아하던데? 하지 말고 ‘그것이 좋은가’ 묻자.

식탁 사용에서 이 비위생은 입이고 미투리고만 아니라 똘이의 전신에 질병과 기능 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 식탁뿐 아니라 아마도 집 전부가 문제될 것이고 집 밖의 이웃이나 똘이의 집 밖 생활도 염려된다. 더러운 차별심 때문이 아니라 먹고 싸고 하는 일의 성질과 질서에 대한 무지가 본래 각기 좋은 일들, 서로 이바지하는 일을 적대적이고 파멸적으로 바꾸지 않았는가.

손발의 경우, 그 활동과 부대하는 상황과 발생하는 필요에 무지한 게 아닐까 싶다. 일어서고 앉지도 못하는 아이라면 늘 누워 지내서 손발의 차이가 적다. 특정한 동안에는 이것저것 쥐는 탓에 발보다 손이 더 문제다. 대개 아이가 손을 물고 빠는 걸 막느라 손을 주머니처럼 감싸지 발은 그냥 둔다. 그러나 걸어다니면 발이 애로가 많아진다. 그리고 좀 더 자라면 발가락과 손가락의 생김도 다르고.

길이 차이에 대하여 다르게 대응하는 게 차별이 아니라 주장하는 건 백구십 센티미터 키의 친구와 백오십 센티미터 친구에게 각기 키에 맞추어 비단 세 필 비단 두 필 나누어 주잔 것이 아니다.

평등은 모든 것에 대한 게 아니다.

생명과 존엄에 대한 평등을 기여와 역할에 대한 인정 그리고 보상과 섞는 건 곤란하다는 말이다.

존재에 대한 것과 활동/작용에 대한 것은 구별하자는 거다. 어느 것이 존재를 향하고 어느 것이 작용에 대한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곧 인간 존재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신분제가 생기기도 하고 없애게 되기도 한다. 권리가 달라지고, 복지의 범위도 달라진다. 이 부분을 확립하지 못한다면 가깝고 먼 사이만이 기준으로 남는다. 이 지역구 주민의 생계와 다른 구역 주민의 생계는 무게가 달라진다.


평등심은 최상의 영혼과 최악의 영혼이 공유한다. 정확히 말해 후자는 평등심이 아니라 평등심 가면을 쓰고 그걸 제 얼굴인 줄 아는 무지성, 게으름이기는 하다. 괴롭고 고단해도 할 건 해야 한다. 생각할 것들, 살필 것들. 그래서 존재의 유지에 대한 건 평등할진대, 일에 대해서는 달라야 한다. 쉽게 말해 누구한테나 맡길 수 있는 거면 일의 성격이 옅고 못 맡기면 일의 성격이 짙다. 아픈 몸의 치료를 의사한테 맡기고, 배관공사나 배전공사를 배전기사, 배관공에게 맡겨야겠다면 그건 일이다.


실제로는 복잡한 설계가 필요하지만 원칙은 동일하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이게 어려운 건 어려워서가 아니라 누가, 무엇이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 게 부당한 거다, 차이와 차이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심지어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정의 보상뿐 아니라 부의 보상 즉, 징벌을 주기도 한다. 한 명이 짓고 한 명이 부수면 둘에게 같은 보상을 준다는 건 말이 안 되고 보상의 차이가 아니라 마이너스 보상 즉, 처벌과 배상 책임을 주어야지 않는가.


시민의 권리는 시민성에 따른 주권의 분배이고, 공동체의 몫을 나누는 것이다. 뭔 일을 했다고 주는 게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범죄성에 대한 보상일 수 없다. 오로지 존재에 상관하는 건 평등해야 하고 차별이 있을 수 없으나 행위에 상관하는 건 음과 양을 아울러 다르게 보상한다. 철수는 감옥에 가두어 형을 살게 할 것인데 이는 그의 범죄행위에 따른 권리의 제한인 동시에 그의 존재에 따른 식사, 취침, 인간적 대우 등 존재에 따른 사항에선 동일한 보장을 담보해야 한다. 못 그런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 낱낱의 형편을 가능한 소상히 예고하는 게 바람직하고, 그래서 자기 행위의 결과가 예측 가능한 게 좋다. 못 그럴 수야 있대도 안 그래서는 안 되고.


차이는 주장되는 게 아니라 효능에 따라 판단해야 한다. 주장은 주체적이지만 효능은 객체적이다. 내가 친절하다고 생각하면 친절한 게 아니고 남이 그렇게 느끼고 좋고 편안해야 친절한 거다. 내 기준이 아니라 공준을 따르며 작게는 상대에 달린다. 불일치하고 불협할 때 단위를 점점 더 키워 더 일반적인 집단의 눈으로 볼 때 어떠한지 따지게 된다. 당연히 내 주장이 아니라 타자의 시선에 맞아야 맞는 거다.

이 어긋남을 맞추는 걸 교육이나 배움이라고 부르고, 현대 사회는 인류사의 경험을 통해 비용을 들여 충분한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비용을 아껴 발생한 사건을 사후 처리하는 것보다 범죄 예방에 더 효과적이고 최종적으로 사회가 치러야 하는 총비용도 더 적다는 걸 알게 된다.


낱낱의 해도 됨/안 됨 목록을 나열하는 건 하는 쪽에서 쉬운데 받는 쪽에서 버겁다. 우선순위조차 잡지 못한다. 받아들여도 금세 까먹고 자주 깜박 잊는다.

해야 할 건 무엇이 존재이고 무엇이 작용인지 식별하는 것이다. 식별도 못하는 고학력자와 각급 결정권자, 지도자나 인플루언서가 많다는 건 우리가 처한 중대한 위기다. 여러 대를 풀어야 하는 게 아니라 하나를 풀어야 한다. 그게 목이다. 목줄을 조이고서 나머지 문제가 안 터지기를 바라는 건 이룰 수 없는 꿈이고 결과는 잔인하다. 목을 찾아 여기서 문제를 풀 것. 존재와 작용을 식별해 질서를 세울 것. 공자의 가르침을 논어에서 긷는다면 이 첫 번째 할 일, 필요한 일은 \<정명\>이다.

말은 바로 쓰자. 안 그러면 평등심으로 차별하고, 차이가 곡해된다.

사실 식별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죽고 사는 문제거니와 정보와 자극이 넘치는 현대의 인류는 단순히 멘탈이 약한 게 아니라 최소 식별 결핍의 시대를 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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