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달빛독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과 『행복한 왕자』로부터

by 이제월




오스카 와일드에게는 일반적으로 유미주의자(唯美主義者, Aesthete, 탐미주의자)라는 딱지가 붙습니다. 이 라벨은 거짓이 아닙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주 자신이 추구하는 것과 이를 위해 괘념치 않는 것들이 무엇인지 직접 말하였습니다. 그의 작품들 또한 충실하게 그의 관심과 추구를 반영하였습니다. 그의 유미주의를 대표하는 작품으로는 아무래도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가장 빈번하게 호출됩니다.

작중 주인공 도리안 그레이는 맨처음 남녀 모두 우러르는 아름다운 미모의 청년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눈부신 인물로 등장합니다. 그를 쏙 닮은 초상화가 그려지기 전까지는요. 도리안이 처음으로 범죄한 날, 그는 자신의 초상화가 조금 변한 것을 느낍니다. 이후 그 변화는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었고, 그는 초상화를 아무도 보지 못하게 골방에 감춥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짓거나 할 때 그 추악함이 그에게는 전혀 드러나지 않고 초상화 속 자신에게 전가되고 있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뿐만 아니라 도리안은 전혀 늙지 않고 젊음을 유지합니다. 도리안은 아름다움 자체로서, 신비롭고 경이로운 인물로서 사랑받습니다. 그리고 그는 브레이크 없는 열차처럼 마음대로 질주합니다. 무슨 짓을 하건, 제아무리 시간이 흐르건 도리안 그레이는 완벽한 모습을 유지합니다. 도리안 그레이가 아니라 도리안 화이트라는 듯이. 그레이의 한쪽이 화이트닝(whitening, 표백, 漂白)되는 그만큼 그레이의 다른 한쪽(그림 속 그레이)는 흑화(黑化, blakening)합니다. 그럴수록 그레이의 내면은 더 어지럽고 급격히 무너집니다. 그의 자기 혐오는 타인의 찬양에 비례해 더 가파르게 크고 깊어집니다. 종국에 도리안 그레이는 홀로 늙고 추해져간 감추어둔 초상화를 찢어버립니다. 초상화를 죽인 겁니다. 어떻게 됐을까요?

다음날(제 기억이 불명합니다만, 아마도) 사람들은 골방에 쓰러진 노인의 주검을 발견합니다. 그 노인이 도리안 그레이의 옷을 입고 있지만 저택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늘 같이 지내던 하인들도 물론 그가 자기 주인이 아니라고 부인합니다. 그리고 찢겨진 초상화를 보며 누가 이렇게 끔직한 짓을 할 수 있는지, 이토록 아름다운 걸 감히 파괴할 수 있는지 놀라며 의아하고 노여워합니다. 동시에 훼손되고도 아름다운 그것에 매혹되어 고양된 채 말합니다. 내 주인은 바로 저 사람이라고. 그림 속 인물을 가리키며 뿌듯해합니다. 그의 자랑스러워함. 수직으로 선 인물(하인) 아래 주인은 수평으로 누워 있습니다. 모든 중력에 항복한 채로, 종의 오류, 거짓에 대항해 참을 말하지 못하며.

작품을 읽는 동안 독자는 도리안 그레이에 이입하고 응원하는 한편 주인공이 자신에게 품는 혐오에도 이입하고, 거리 두기를 반복하며 당혹감을 느낍니다. 우리는 결말을 지지하지도 반대하지도 못합니다. 작품 바깥에서 얻은 에너지로 찬반을 결정할지 모르나 작품 내부에서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게 팽팽한 긴장이 지켜집니다. 이 지점에서 오스카 와일드의 필력은 경이로운 동적 균형감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어쩌면 정반대편에는 『행복한 왕자』가 있습니다. 작품 순서로는 『행복한 왕자』가 초기작으로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보다 이 년 더 빠릅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을 단순히 “초기/후기”, “동화/소설”, 혹은 “윤리/미학”으로 나누어 배치하는 순간, 우리는 오히려 와일드가 끝까지 놓지 않았던 어떤 더 근본적인 구조를 놓치게 됩니다. 두 작품은 서로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구조—정(正)/부(負), 혹은 positive/negative의 변환—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구현한 쌍둥이 텍스트에 가깝습니다.


행복한 왕자(The Happy Prince and Other Tales, 1888)


『행복한 왕자』에서 왕자는 생전에 모든 것을 가졌던 존재입니다. 그는 높은 곳에 있었고, 아름다움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무엇보다 고통을 보지 않아도 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정(正)’입니다. 그러나 죽은 뒤,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비로소 도시의 고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왕자는 자신의 정(正)을 유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소모하고, 내려보냅니다. 눈의 사파이어를 떼어주고, 몸의 금박을 벗겨내며, 끝내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됩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왕자가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포지티브(positive)를 네거티브(negative)로 전환시키는 과정 자체가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그는 빛나는 존재로 남지 않고, 빛을 나누어 주며 스스로 어둠 쪽으로 이동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즉 모든 아름다움을 잃고 버려진 순간에, 그는 오히려 “선택된 것”으로 남습니다.


이 구조를 다시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으로 가져와 보면, 놀라운 대칭이 드러납니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The Picture of Dorian Gray, 1890)


도리안 그레이 역시 처음에는 완벽한 정(正)의 상태에 있습니다. 아름다움, 젊음, 타인의 찬미. 그러나 그는 왕자와는 정반대의 선택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정(正)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을 소모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negative를 자신 밖으로 분리해냅니다. 그 결과가 바로 초상화입니다.


왕자는

→ 정을 나누어 부로 내려가는 존재이고,


도리안은

→ 부를 분리하여 정을 유지하려는 존재입니다.


이 둘의 차이는 윤리적 선택이라기보다, 극성(polarity)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입니다.


『행복한 왕자』에서는 정이 부로 흐르며 하나의 순환을 이루지만,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는 정과 부가 분리되어 서로를 증식시킵니다. 도리안이 젊고 아름다울수록, 초상화는 더 늙고 추해집니다. 정이 유지될수록 부는 더 급격히 축적됩니다. 이 구조는 균형이 아니라 비대칭적 증폭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붕괴입니다. 도리안이 초상화를 찢는 순간, 분리되어 있던 정과 부는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그는 한순간에 늙고 추한 시체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보면, 두 작품은 서로를 해설합니다.


『행복한 왕자』는 말합니다.

→ 정은 소모될 때 의미를 갖는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은 말합니다.

→ 정은 보존될 때 파괴를 낳는다.


이 두 문장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의 명제를 양쪽에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와일드의 작품 세계 전체를 다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의 희곡들에서 인물들은 사회적 ‘정’—도덕, 체면, 규범—을 유지하면서, 그 내부에서 끊임없이 그것을 전복하는 ‘부’를 작동시킵니다. 말하자면, 정과 부가 완전히 분리되지도, 완전히 통합되지도 않은 채 긴장 상태로 유지되는 장이 바로 그의 희극입니다. 그 균형이 유지될 때 우리는 웃고, 그것이 깨질 때 비극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말년에 이르면, 이 구조는 다시 한 번 전환됩니다.


장시(長詩) 레딩 감옥의 노래(The Ballad of Reading Gaol, 1898)


이 시에서 와일드는 사회가 ‘부(負)’라고 규정한 존재들—죄수, 범죄자, 처형당하는 인간—속에서 오히려 가장 보편적인 인간성을 발견합니다. 여기서는 더 이상 정을 유지하거나, 부를 분리하거나, 둘 사이의 긴장을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부 자체가 새로운 정으로 재정의됩니다.


이렇게 보면, 『행복한 왕자』는 단순한 도덕 동화가 아니라, 와일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원형입니다. 그 원형은 이후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분열되고, 희곡들에서 긴장 상태로 유지되며, 말년의 작품에서 다시 전도됩니다.


따라서 이 두 작품을 함께 읽는다는 것은,

하나는 선하고 다른 하나는 타락했다는 식의 도식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정과 부가 어떻게 분리되고, 이동하고, 다시 결합되는가를 따라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어쩌면 다음과 같은 문장에 도달하게 됩니다.


와일드에게서 아름다움은 유지되어야 할 상태가 아니라,

흘러야 하는 에너지이며,

그 흐름을 거부할 때 인간은 스스로를 파괴한다.


라고.


무엇이 아름답나요,

무엇이 행복한가요?


어쩌면 쥐지 않고 흘려보내는 것이 순천(順天)하는 일이요, 맞는 행동이 아닐런지요?



비틀즈(Beatles)의 노래 <렛 잇 비(Let it be)>가 듣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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