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부의 힘
생각하면 하나 남김없이 암울하기만 합니다. 갑판 위에서 춤을 춘다고 풍랑이 가라앉지도, 배의 침몰을 늦추지도 않으니까요. 아무리 날이 갤 거라고 말하여도 폭풍이 멎기까지는커녕 이 밤을 넘길 수도 없다는 걸, 이 배는 부서지고 있다는 걸 알 때는 말이지요.
무슨 억하심정을 가져서가 아니라도 수렵 채집을 끝내고 ‘축적’의 시대에 들어선 우리들은, 우리 이 ‘똑같은 것들’ 곧 호미니homini, 휴먼human들은 매일 매일 격차를 경험하고, 순순히 받아들이기엔 무언가 할 수 있다는 걸 알아버린, 앎의 저주에 갇혀, 이 세상이 에덴인 걸 잊고, 에덴은 여기 아닌 다른 어딘가라고, 여기 있더라도 바로 여기는 아니고 어디 한구석에 숨어 있을 거라고 믿고 살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내용은 거기 간다, 이러저러하면 갈 수 있다, 못 간다에 달린 게 아니라 아무튼 여기는 아니다,라는 거부와 부조화에 잊지 않은가 싶습니다. 우리들은 똑같이 생겨서는 참 똑같은 것들을 생각합니다. 우리가 달라지는 길은 어쩌면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생각을 그만두기. 멈춘 지점이 어디냐에 따라서 저마다 이야기를 맺는 지점이 다르고, 그때부턴 머물러서 쳇바퀴를 돌리는 겁니다. 개성이며 동질감도 그렇게 산 자리가 아니라 죽은 자리, 죽음이 벌어질 한계 궤도를 뜻하고 마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글을 씁니다. 글을 쓰면 알게 됩니다. 그것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을. 아무튼 나는 이렇게도 글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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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하는 가치는 없다. 의미 있는 모든 것은 외부에서 온다. 초월한 신만이 내재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오직 상호부정으로써만 병렬해 존재하고 작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가장 작은 단위의 사건도 정당한 입장은 전후좌우를 살펴 정해져야 한다. 일단 자연발생하는 입장에는 우선 경험한 과거 및 과거로부터 형성한 인식이, 다음으로 이를 데칼코마니해 그대로 또는 비틀어 본딴 개연성으로서의 미래 이 두 가지가 인접해서 맥락을 형성한다. 그러나 우리는 정당한 의견을 갖기 위해 경험의 한계를 벗어난다. 무한히 불가능할지라도 정신은 그 무한을 공유해 지평 삼고 무한에 수렴하며 객관화를 계속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에게 보편이란, 개념 정의 말고 실사용하는 보편이란, 내용이 아니라 형식 ‘바깥과 연결된다’ ‘확장수렴한다’(오직 확장함으로써 자기 수렴, 자기 정체화가 가능하단 뜻으로)는 연결에 의해서 정의되고 식별 가능하다.
우리는 가치를-말하는 자들이다. 말하는 자들 사이에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 희망을, 미래를, 가치를 건설하는 행위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떠드는 것보다 존엄한 일은 없다. 오직 분명하게 우리를 살리는 행동만이 침묵하기를 정당하게 수용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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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누구냐?
이렇게 쓴 글을 보노라면 혼자 묻곤 합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쓴 글의 독자가 됩니다. 하지만 글쓴이를 아는 탓에 작가의 독자가 되지는 못합니다. 그럼 왜 이렇게 쓰고, 이렇게 쓴 것을 전하는 걸까요?
초대입니다.
모든 글쓰기는 초대입니다. 맨먼저 글쓴이가 초대받고, 글쓴이 내면에 잠자는 온갖 군상이 초대받습니다. 그들 중에는 삼십년 동안 침묵한 책상도 있고, 이제 새삼 입을 열어 천연덕스럽게 말을 꺼내기도 합니다. 나를 우울에 빠뜨린 배신자들, 배은망덕한 이들이 나와서는 언제나 그랬다는 듯이 친절하게 위무하고 짐짓 현명한 조언을 건넵니다. 이런 혼란을 딛고 이 연극에 깔린 이야기를 읽어 내면 글이 태어납니다. 열심히 쓰고 지우고 고치고, 무시하고 미워하고 다시 사랑하는 사이에 어쨌거나 내가 썼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글이 나옵니다.
그 글은 자기를 낳은 나를 무시하기도 하고, 도발하기도 합니다. 나는 할 말이 없습니다. 글의 말처럼 나는 외부의 존재, 텅 빈 데 들어찬 무수히 많은 것들의 교집합이고 변형, 길지도 않고 순간순간 번쩍 터지고 사라지는 번개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 나는 공기다. 그래도 글은 나를 비웃습니다. 네가 사라져도 너라고 주장하는 공기는 남는다니깐.
그래서 나는 곰곰이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생각하다가 침묵한 책상의 입을 빌어 삼십년만에 대답했습니다. 사실 해결했다기보다 결정한 겁니다.
나는 너다. 너희다.
그리고 이렇게 말함으로써, 말하여진 순간 그 말은 변형됩니다. 자유선을 다 그어 만나면 어쨌든 하나의 폐곡선이 되는 것처럼 닫혀집니다. 그 순간, 완성되는 순간 그것은 완성되기 전과는 아예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우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무리 뻗어도 닫힌 채이던 것을, 점인 척 선인 척해도 면이고, 심지어 입체이던 것을 비로소 무형無形의 선으로, 점으로 바꾼 것이라고. 즉, 닫혀 있던 걸 열었다고.
나는 ‘우리’다.
우리는 변합니다. 그래서 나는 나를 고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천년을 쉬지 않고 비가 온다 할지라도, 결코 끝나지 않을 비, 노바이 스붐베nobais sbumve라 하더라도 이 우울을 안고도 나는 명랑하다고, 나는 내 생에는 일어난 적 없는 행운조차 나의 것으로 여기고, 생에 한 번 찾아온 친절조차 우연 아닌 필연이며, 기억나지 않지만 내 계획이요 차곡차곡 이루어지고 있는 거라고, 이후에 덮이었고 덮여갈 검은 망각과 무시에도 불구하고 빛나는 것이고, 빛나는 것을,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내가 안다는 건 그것의 실재를 증명하는 거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몸은 무겁지만 조금 움직입니다.
나는 당신을 초대합니다.
우리 가운데 하나로 초대하며, 나를 당신의 우리 가운데 하나로 초대해 주기를 청합니다. 초대의 초대입니다. 당신이 나를 초대해도 좋다고, 초대를 초대합니다.
그리고 말 난 김에, 당신은 저 말을 아시나요? “노바이 스붐베” 2002년 어느 날 아침 나는 저 말을 듣고 깼습니다. 신체 바깥에서 온 말은 아니지만 또렷이 들었고, 알아들었습니다. 실은 말을 듣고도 한참 잠든 채 꿈 속의 집에서 그 바깥을 응시했습니다. 어딘가 ‘결코 끝나지 않을 비’를 뜻하는 말이 꼭 저렇게 발음하며 있을 것 같습니다. 투박하고 울리는 느낌이고, 울림 속에 온세상을 집어 넣는 말이었습니다. 백년 동안의 고독 따위는 눈깜박할 새도 안 된다고 백년 동안의 고독을 말한 사람도 그쯤은 아는 거라고 하면서요.
나도 당신도 바깥에서 왔습니다. 본래 내 것인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있다면, 내 행위로 인한 내 탓들만이 나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불운과 불행에 저항해 말해 보십시오. 고맙다.
달리 할 말도, 딱히 그만둘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다른 외부와 더 이어질 것입니다. 상상의 바깥으로 나아갈 겁니다. 눈을 감고, 감은 암흑 속에서 날아가며 보고, 보는 것이 보이고 보이는 것을 보는 놀이를 즐겨 보십시오. 세계는 열려 있습니다. 같이 가실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