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겨라. 탈무드랑 놀기
탈무드랑 놀기
나쁜 ‘친구’는 본래 물들인다. 나는 탈무드를 아나키스트의 행동지침으로 변질시키고자 한다.
(1) 탈무드는 부모와 교사의 의견이 다를 때 아이가 부모를 따르면 된다고 가르친다. 실제 유태인들은 으레 그러나 보다. 선생은 바꿀 수 있지만, 부모는 바꾸는 게 아니기 때문이란다.
(2) 실은 동서고금에 선생이란 대개 부모와 뜻이 맞는 사람, 그래서 부모가 자기 자녀를 믿고 맡기는 사람이곤 하였다. 더 나이 들어서는 아이가 스스로 자기 스승을 찾기도 하지만, 그런 구도행 이전에, 배움보다 ‘가르침’ 자체가 앞서고 배우는 것조차 배워야 하는 그때에는 이렇듯 스승과 부모는 신뢰하는 ‘우정’의 관계에 있곤 하다.
(3) 현대의 교사들은 자주 부모와 완강하게 의견을 대립하는 것 같다. 그리고 대체로 교사들의 뜻이 관철되거나 기준으로 용인되는 것으로 보인다. 부모가 아예 교사를 무시하는 일도 늘어나고 있지만, 여전히 통용되는 설정의 기본값은 교사 우위다. 자녀들도 ‘무식한 부모 대 유식한 선생’의 인식 틀을 많이 가지고 있다.
(4) 추측컨대 근대적 <학교 교육>이라는 틀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거에 교육은 배우고 깨우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근대에는 개인에게서보다 사회 집단의 목적에 맞게 인적 자원을 양성하기 위해 <표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5) 즉 교사는 과거에 지식(낭만적으로는 진리)의 대변자였고, 그의 지식에 대한 신뢰의 원천은 부모 또는 학생 본인이었지만, 오늘날 교사는 대개 <학교>를 통로로 삼는 국가 사회의 대변자이기 때문에, 이 집단은 부모와 학생이라는 개인의 요구를 초과하여 그들의 요구를 억압한다. 교사의 ‘자격’ 또한 그런 식으로 ‘공증’한다. 그래서 교사는 부모의 의사를 무시하고, 철회를 요구하며, 국가사회라는 거대 집단의 대변자로서 때때로 징계한다. penalty를 준다. 그리고 이 페널티는 사회가 주는 것이기도 하다. 교사 집단/학교의 페널티를 용인하는 방식으로 또는 별도로 사회적 자격을 부여 혹은 무시함으로써.
(6) 교사-부모 사이의 대립을 완화 또는 무화하는 방법은 결국 일탈이다. 교사가 스스로 지식의 대변자로서 진리(또는 깨달음)와 학생(학습자) 사이에 직접적 중개에 나서고, 이를 하기 위해 학교(를 경유하여 국가 사회)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학교의 명령을 무시하는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7) 만약 우리가 정말로 아이를 위한 교육을 하고 싶고, 다음 세대의 생존과 (할 수 있다면) 번영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성공을 의도하여’ 가동하는 거라면, 우리는 반드시 학교를 경유하여 국가에 저항해야 한다. 어떤 민주주의 이상이나 특정한 국가관 때문이 아니라 아무리 좋은 정부라도 그것의 명령을 수행해서는 학습자-양육자-교육자 사이의 인격적 관계가 훼손되기 때문에, 국가라는 네 번째 다리는 오직 조용히 해당 사회의 굴곡에 맞추어 결여와 과잉의 균형을 맞추어 주는 보조자로서 늘 스스로 변형되어야 할 뿐이다. 국가를 빼도 저 세 개의 다리는, 심지어 세 개의 다리이기 때문에 어느 시대 어느 조건에서나 정상 작동한다.
(8) 두 개의 구호가 가능하다. “국가여, 지원하되 간섭하지 마라”, “만방의 교사들이여, 단결하라(‘전체주의’로서의 국가에 저항하라)”.
이때, 국가가 띠는 전체주의의 짙은 정도가 0이든 10이든 상관할 거 없다. 우리는 그것을 0에 수렴시키는, 절대 영도에 접근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러니까 국가라는 건 최대한 냉정한, 천지를 닮아야 한다. 천지는 불인(不仁)하여 어디에나 빛을 쪼이고 비를 내린다 이 말씀.
두 개의 구호를 한 개로 줄이자고, 마음 한구석이 외친다. 그럼 그래야지.
“개겨라”
이것이 다음 시대를 열어 주는 유일한 구호다.
2013년 6월 13일 쓰고
2022년 5월 3일 조금 고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