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희 이모를 바란다면. ― 조우리 작, 『이어달리기』로부터
― 조우리 작, 『이어달리기』로부터
조우리 작가의 작품 『이어달리기』(한겨레출판, 2022년) 속에는 일곱 명의 조카, 일곱 개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아, 에필로그까지 치면 여덟 번째 이야기까지. 차곡차곡.
소설을 읽고 나면, 또 읽으면서부터 이미, 당신은 이렇게 바랄지 모르겠다.
‘성희 이모가 있으면 좋겠다.’
만일 이 바람이 ‘나한테’라는 목적을 두면
아마 이룰 수 없는 꿈일 테다.
그렇게 벌고, 그렇게 쓰고, 그렇게 말해 주는 이. 있겠나? 어디에 얼마나 있을까?
만일 당신이 이 바람이 향하는 목적어를 바꾼다면,
‘우리한테’ ‘이 세상에’로 바꾸면
이룰 수 있는 꿈이 된다.
내가 정말 바라면,
내가 하면 되니까.
할 수 있으니까.
나는 ‘성희 이모’가 되어 우리에게, 이 세상에
성희 이모를 존재케 한다.
인간은
원자적으로는 창조하지 못한다.
그렇지만 관계적으로는 창조한다.
관계성을 창조한다.
관계함으로써 존재한다.
도박, 권력, 섹스, …
그런 중독은 가짜로라도
파괴하면서라도
저를 소모해서라도
관계 맺고 싶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다 끝이 보인다.
이어달리기가 안 된다.
그러나 이어달리기가 되는 관계.
나한테가 아니라 세상에,
이 세상에
선사하는 일은
기막힌 평형을 이룬다.
밸런스. balance.
양날의 칼. 두 개의 창(랜스/랜서)이
양쪽으로 붙은 것.
양팔 저울. 그러므로
균형은 깨질 때에도
찾아 이룰 때에도
상처를
준다.
상처를 남긴다.
다만, 찾았다면
그렇게 붙잡은 균형은 오래,
달과 지구처럼 오랜
짝이 된다.
짝은 서로를 돈다.
이모가 다쳐야 한다.
안 그래도 조카는 여기서
저기서 다치니까.
아직 다치는 게
어리둥절하고
무섭거나 억울할 테니까.
이모는 많이 다쳤다.
다칠 줄도, 다치지 않게 할 줄도
다친 흔적을 안고 살 줄도 안다.
살려 한다.
그러니까 두 날의 중심을
잇고, ‘있게-하는’ 일은
이모의 일이다.
이모-조카의 성립은
조카들을 느슨하게 잇고
조카가 다른 조카를 만나 이모가 될 때
단단하게 잇는다.
이어달리기가 된다.
주어는 ‘나’로 삼고
목적어는 ‘우리’, 가장 큰 우리인 ‘세상’으로 삼으라.
당신이 꾸는 모든 꿈이 이루어진다.
못 다 이룬 꿈은
바톤 터치 된다.
바톤을 받고, 반드시
다음 주자로 나서 ‘터치!' 할 사람을 찾기 바란다. 꼭.
내가 아니라 이 세상을 위해서 축복한다.
당신에게 희망을, 건(넨)다.
바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