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 공유 (4)

정우가 부른 <양> 노래 읽기

by 이제월

양(The Lamb)

sung by 정우(JungWoo)


1

내가 잘못했어요

여기 두고 가지 말아요

제가 더 노력할 테니까

살아만 주어 살아만 주어요

아 아 우우우 음음 아 아 우우우 음음


2

마음의 강 흐르네

그대로 내 안에 들어오세요

마른기침 멎는 날 그대로 곁에 앉아

이 죄를 쓰다듬어 주세요


3 [refrain]

나 당신의 어린양이 되어

슬픔의 배를 가르고

어리석은 사랑을 꺼내 보이겠어요


4

다 잘못했어요

여기 두고 가지 말아요

더 노력할게요

여길 두고 가지 말아요

아 아 우우우 아 아 우우우 우우우


5

어두운 밤에 넘어져 그대 눈을 감고 울어

마른기침이 젖어 이제 볕에 앉아 쉬어

내 마음의 강 흘러 모든 죄를 잊고 누워 아아아

살아만 주어 이젠


3′ [refrain]

나 당신의 어린양이 되어

슬픔의 배를 가르고

어리석은 사랑을 꺼내 보이겠어요


3″ [refrain]

나 당신의 어린양이 되어

슬픔의 배를 가르고

어리석은 사랑을 꺼내 보이겠어요


6

(긴 간주)

아 아 우우우



보컬 정우 작곡 정우 편곡 정우, 황현우, 박진호 작사 정우






양(The Lamb) 노래읽기[解明]


보컬 정우 작곡 정우 편곡 정우, 황현우, 박진호 작사 정우/2021.12.25. 발매


정우는 2017년부터 홍대 부근 공연으로 주목받고, 여러 가수의 단독 공연객원 가수로 참여했다.

2016년 12월부터 씨티알사운드에 소속,

2019년 9월 5일 첫 정규 앨범 《여섯번째 토요일》을 발매했다.

이 곡은 2021년 12월 25일 곡 <종말>과 함께 싱글로 발표됐다.




[1]

내가 잘못했어요

여기 두고 가지 말아요

제가 더 노력할 테니까

살아만 주어 살아만 주어요

아 아 우우우 음음 아 아 우우우 음음


☞노래는 무엇인가. 노래는 선포이다. 고백은 무엇인가. 고백은 선포이다. 선포한다는 점에서 노래와 고백은 같다. 듣는 이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지만, 있기를 바란다. 또한 없기를 똑같이 바란다. 그래서 두 개의 선포는 두 개의 기도이다.

☞이 노래는 잘못을 고백한다. 무엇을 잘못했는가 아직 말하지 않은 채, 잘못을 고백하는 이유는 무죄한 상대에게 있다. 그런데 상대는 무죄한가? 노래하는 이의 주장과 다르게, 노래하는 이가 변호하는 이는 무죄하지 않다. “내가 잘못했”다는 선언과 달리 노래하는 이는 자기가 무엇[what]을 하지-않거나 잘못-하였음을 말하는 대신 “더 노력할 테니까”라고 말함으로써 덜 노력하였음을, 그 정도, 어떠함[how]을 서술한다. 그가 잘못한 것은 미처 닿지 못한 데 있고, 하지 않거나, 하지 말 것을 하여서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닿음은 ‘마주 닿음’이어서 상대방의 존재, 상대방의 행위가 함께 문제된다.

☞노래는 이어져 노래하는 이의 다음 기도는 ‘고백’에 이은 ‘청원’이다. 기도의 내용은 “살아만 주어요”다. 기도는 노래하는 이를 채우는 대신 노래하는 이의 상대방을 채운다. 아니, 존립케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으므로 웅얼거린다. 탄식하는 아, 간원하는 우, 어떻게도 말할 수 없음의 음,이다.


[2]

마음의 강 흐르네

그대로 내 안에 들어오세요

마른기침 멎는 날 그대로 곁에 앉아

이 죄를 쓰다듬어 주세요


☞노래는 이 긴급한 기도가 한숨 돌린 다음, 말하자면 구급차에 실린 뒤, 잠시 이 모든 일의 시원(始源)을 추적한다. “마음의 강이 흐른다.” 그러니까 존재한다, 존재를 영위한다, 존재하므로 활동한다. 살아 있다. 이 흐름은 흐름 속으로 상대를 초대한다. “그대로 내 안에 들어오세요.” “그대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자격 증명이나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다. 이 교환 불가능한 교환은 사랑의 요청이며, 가장 뚜렷한 사랑의 증거다.

☞노래는 노래하는 이의 상대방을 설핏[briefly] 비춘다. 그는 “마른 기침”을 한다. 마른 기침은 “그대로” “내 안에” “들어오”라는 청원을 거부 또는 유예하는 이유일 것이다. 원인이 아니라 이유. 왜냐하면 상대는 말하지 않고, 노래하는 이가 추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래하는 이는 그 이유가 사라지면 초대가 성립할 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응답은 자동이 아니기 때문에 “멎는 날 그대로 곁에 앉아” 줄/주라고 청하고 있는 상대는 초대에 응하여, 초대를 성립시킨 뒤, 초대를 완성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있다. 이것도 물론 상대는 침묵하고, 그럼으로써 노래하는 이가 대신 노래해야 하는 것, 가장 아름답게 지어 바쳐 상대를 만족시키고, 상대가 알았던 것이건 상대 자신도 몰랐던 것이건 비로소 수긍하여 너그럽게 수용할 것이어야 한다.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몫조차 노래하는 이에게 맡겨져 있다. 그래서 노래하는 이는 초대에 응하면 상대가 처음 하는 일이, 자신에게 향한다고 믿는다.

☞ “이 죄를 쓰다듬어 주세요.” 이 처연한 청원은 귀엽게 말하여진다. 상대의 심기(心氣)를 건드리지 않도록 고도로 정제되고 선별된 표현이다. “이 죄”는 무엇인가, 초대 자체이다. 그대가 내게로 온다면, 감히 그대를 부른 나를 용서하리라고 희망하며, 용서하시라고 부탁한다. 응답 자체로 부족하고 굳이 이 죄를 “쓰다듬어” 달라고 청할 만큼, 노래하는 이의 간청은 오래도록 부정되었고, 그리하여 잘못된 것으로 치부되었으며, 용서를 청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초대를 부정할 때, 초대하는 행위 또는 초대자 자신이 부정한 것이므로, 노래하는 이는 이 초대가 성립되는 것이 잘못이 아니도록, 그 잘못에 상대가 참여하여 함께 오염되지 않도록 “이 죄”의 정체는 “마른 기침 멎는 날”이 아직 오지 않았는데도 재우쳐 청하는 데 있다고 가정한다. 그렇게 규정할 때, 비록 초대는 ‘지금’ 부당하지만 ‘영원히’ 부당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 초대하는 나는 ‘일시’(짧을 수도 길 수도) 죄를 짓지만, 초대받는 상대는 결코 죄짓지 않는다. 그리고 깊은 희망과 배려는 다른 깊은 꿈을 꾸게 한다. 깊은 것은 높다. 꿈의 세계가 그렇고, 우주적으로 그렇다. 천체에 위와 아래는 없다.



[3/refrain]

나 당신의 어린양이 되어

슬픔의 배를 가르고

어리석은 사랑을 꺼내 보이겠어요


☞노래하는 이는 “어린양” 더 정확하게는 “당신의 어린양”을 꿈꾼다. 자신이 어린양이 아니었다면 이제 “되어” 갈 거라고, 될 차비를 마쳤다고 선포한다. 어린양은 무엇인가. 죽을 자이다. 대신 죽을 자. 대신 죄를 짊어질 자. 무죄하였기에, 비었기에 그 빈 데 죄를 채울 그릇이다. 그러므로 그 배는 “슬픔의 배”이다. 그것을 “가르고”서야 그 존재이유, 존재의미가 서기 때문이다. 존재와 작용이 뒤집혀 작용하면 비로소 ‘그것으로’ 존재케 된다. 그것이 독립하는 유일한 길, 개체성(haeceitas), 이것임(thisness)을 띠는 길은 그렇게 자기를 파괴하는 것뿐이다.

☞노래하는 이는 이 배 가름이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한다. “사랑을 꺼내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랑을 “어리석”다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랑을 얻기 위해 사랑하고 사랑을 누리는 자신을 소멸시키는 행위이기 때문에, 사랑을 중지하는 방식으로써만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이율배반적인, 지속하기 위해 유일하게 허락된 행위가 중지이기 때문에, 중단된 사랑만이 영속하기 때문에, 아니, 출발/시작되기 때문에 이 사랑은 “어리석은 사랑”이다. 그러니까 당신을 사랑한다는 행위로서의 고백은 내가 죽은 뒤에 이루어진다.

☞이것은 후렴이다. 반복구이다. refrain은 동사로는 ‘삼가다’ ‘억제하다’는 뜻을 갖는다. burden을 택하더라도 그것은 무거운 짐, 부담, 고생, 죄를 뜻한다. 그러나 어린양에게 죄를 짊어지는 것은 참 어울리는 일이다. 콜 니드라이(Kol Nidrai). 유월절(踰月節, Pascha: 건너감. 유태교 명절)의 희생양은 저는 죽고, 저를 죽여 그 피를 문설주에 발라 죽음의 천신이 ‘건너가게’ 한다. 죽음은 생명이 죽음을 건너 다시 살게, 참으로 살게 해 준다. 누가 보아도 어리석은 사랑이고, 그럼으로써 이것은 탈속하는 것, 초월하는 것이 된다. 세상 밖의 것인데, 세상이 담지 못하는데도 이 세상에 있으니/일어나니, 그것은 신성한 것이고, 초월자, 신의 것이다. 노래하는 이의 죄 고백은, 한없이 낮추고 깊어짐으로써 자신의 신성함을, 이 사랑이 정당함을 반박할 수 없게 드러내 ‘드높이는’ 자기 찬가이다.


[4]

다 잘못했어요

여기 두고 가지 말아요

더 노력할게요

여길 두고 가지 말아요

아 아 우우우 아 아 우우우 우우우


☞노래는, 기도는, 노래하는 이는 그래서 더욱 당당하고 소리 높여 “다” “잘못했”다고, 자신의 탈속함, 어리석음을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으로서, 모든 것에 지배적인 것으로서, 원리요 법칙, 공리(公理)로서 주장한다(主張, statement. 즉, 그렇게 위치시키기).

☞노래하는 이는 자연스럽게 Deliever Us(영화 <이집트 왕자>에서 히브리 민중이 부른 노래 제목을 고의로 가져다 쓴다), 나를 “여기 두고 가지 말” 것을 청한다. 죄를 고백하고, 이 죄를 쓰다듬어 달라던 사람으로서는 앙큼한 소리다. 그러나 상대를 지고지순하게 바라보는 ‘어린양’의 마음은, 상대를 절대선으로, 무구(無垢, innocent)한 존재로 바라봄으로써, 다시 말해 상대에 대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상대를 높임으로써, 이 깊이에 의해 신비롭게 지렛대를 타고 가장 높이 올라간 것이다.

☞오만함이 아니라 한없이 낮춤으로써 높아졌다는 것은 계속 드러난다. 상대를 높이는 노래하는 이의 마음은 어떠한가. 자기를 “여기 두고 가지 말”라고 청하는 것은 다시 이렇게 청하여진다. “여길 두고 가지 말아요.” 이 때문에 이 풀이에서 Deliever(데려가 달라, 건네 달라, 건너감을 이루어 달라=“여기 두고 가지 말아요”) 동사의 목적어가 ‘me’(나를)가 아니라 ‘Us’(우리 전부)라고 보고, 위 노래를 불러들인 것이다. ‘여기’는 장소이지만, 장소로 지칭할 수 있는, 이 세계의 전부, 모든 이요, 모든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전능하게 만든다. 상대는 내 세계를 몽땅 구원할 수도 있고, 몽땅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 침몰키여 영영 잠가 버릴 수도, 인양할 수도 있다.

☞노래는 그러므로 탄식하는 아, 간원하는 우, 침묵할 수 없으나 침묵밖에 할 수 없는 음으로 이어진다. 이리 하는 것이 마땅하다.


[5]

어두운 밤에 넘어져 그대 눈을 감고 울어

마른기침이 젖어 이제 볕에 앉아 쉬어

내 마음의 강 흘러 모든 죄를 잊고 누워 아아아

살아만 주어 이젠


☞노래는 진실을 비춘다. 지금은 “어두운 밤”이다. 지금만 아니라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일, 있어 온 날은 온통 “어두운 밤”이다. 그러나 어두운 밤에 넘어진 건 노래하는 이가 아니라 한결같이 찬양받고, 노래 기도가 향한 “그대”다. 또한 그대는 전능하기는커녕 강하지도 않다. 그대는 눈을 뜨고 직시하지도 않고, 상황을 바라보고 타개하지도 않고 대신에 “눈을 감고 울”었다. 그러나 노래하는 이는 “눈을 감고 울어”라고 함으로써 그 상황에 영원성을 부여한다. 영원한 것은 반대형이 없기 때문에 절대선이 된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 그것뿐인 것이 된다. 시비를 가리려면 짝이 있어야 하는데, 짝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옳은 것이요, 선한 것이며, 심지어 아름답고 찬양받을 것이 된다. 노래하는 이는 그렇게 단순히 원인으로뿐 아니라 영원한 사건으로서 현재형으로 노래한다. 그리고 단순한 원인으로서는, 그러나 노래를 주고 받는 둘 사이의 일로서는 복잡하고 동시적인, 그러므로 ‘모든 것의’ 원인, 모든 것의 이론은 이러하다.

☞그대는 울었다. 그대가 울어서 거기에 젖은 건지, 그대가 그토록 운 것은 흐르는 강인 내게 빠져 젖은 탓인지 노래는 밝히지 않는다. 노래하는 이는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른 기침이 젖어” “이제 볕에 앉아 쉬어”야 하는 건 분명하고, 그리 하라고 청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그 기원과 원죄(原罪)는 묻지 않는다. 노래하는 이는 기도할 뿐, 선포할 뿐, 증명하거나 설명하는 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노래다. 노래는 해명할 수 있지만, 해명될 뿐 스스로 설명하고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노래는 노래-이고, 노래-함이다. 노래-함 속에서 같이-노래-함으로써, 노래가 품은 노래-임은 노래-하는-이 안에서 실현되고, 알려진다. 그것은 계시(啓示, revealation)이다. 지성소에 드리운 장막, 가린 것은 무엇이든, 그것이 아무리 중요하고 거룩해도 찢어진다. 찢겨지기 마련이다.

☞노래가 이어진다. “내 마음의 강 흘러” “모든 죄를 잊고 누워 아아아.” 노래하는 이는 ‘마음’이고 ‘강’이다. 여기서의 “의”는 거추장스런 ‘소유’로 향유하는 것들과 자기 사이를 갈라놓고 사이를 띄우지 않는다. 그렇게 했다면 노래하는 이는 “어린양”이 될 수 없고, 젖음과 울음 어디에도 탓이 없으며, 죄를 담을 수 없고, “당신의 어린양”은 더욱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래하는 이는 강이 흐르는 것은, 솟구치거나 일어서 춤추지 않고 흐르는 것은 “죄를 잊고 누워” 있는 것이라고 ‘바라본다.’ ‘바라봄’은 모르는 채로 시작하여서 알아차림에 이르는 특별한 응시(凝視)다. 바라봄은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대상을 바꾸고, 바라보는 이 자신, 주체마저 바꾼다. “내 마음의 강 흘러 모든 죄를 잊고 누워” 탄식(아아아)한 뒤 기도의 끝은 명료하다. “살아만 주어 이젠.”

☞노래가 처음과 달리 “이젠”이라고 단서를 붙이는 것은 이 간절한 기도의 끝이 다다라서인 동시에 기도가 이루어졌다는, 선험적 선포다. 어차피 배를 갈라 이루어질 사랑의 계시[드러냄, 천계天啓]는 경험적일 수 없다. 가지 않은 경로인 채로 앞서 알아진다. 자신의 죄를 알아본 바라봄이 이미 거두어진, 수락된 간원도 알아차린다. 기도는 실현되었다, 선험적으로. 경험적으로가 아니라. 그래서 “이젠.”


[3′/refrain]

나 당신의 어린양이 되어

슬픔의 배를 가르고

어리석은 사랑을 꺼내 보이겠어요


☞노래하는 자신의 죄스러움을, 무엇 때문인가 마른 기침이 젖은 그대를 울게 한 죄를 들쓴 자신을 온전히 알아보았고, 그러므로 할 일을 온전히 알기에 군말 없이 노래한다. 나 당신의 어린양이 되어 슬픔의 배를 가르고 어리석은 사랑을 꺼내 보이겠어요. 다짐한다. 선포한다. 실행한다.


[3″/refrain]

나 당신의 어린양이 되어

슬픔의 배를 가르고

어리석은 사랑을 꺼내 보이겠어요


☞선포하고 실행한다.



[6]

(긴 간주)

아 아 우우우


☞어린양의 배가 갈라졌다. 소리가 죽고, 세상이 구해졌으니 세상의 갖은 소리가(목소리를 뺀 연주, 간주) 성금요일부터 파스카 새벽까지 주검과 빈 무덤 사이처럼 연주된다. 이 지저귐, 침묵을 강조하고 돋보이는 간주 후에 탄식하고 간청한다. 그러나 침묵은 없다. 머뭇거림, 길을 찾지 못하고 잃어버린 말은 없다. 말씀은, 말씀으로 부활했다.

☞이 노래는 다음 노래할 이를 찾는다. 노래하는 이는 노래하고 바라보고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건너가고, 그렇지 않으면 건너지 못한다. 만날 그대로다.

그래도 노래는 “그대로 내 안에 들어오세요” 하고 초대한다. “마음의 강이 흐르”니까. “내 마음도 흘러” 듣고, 보고, 안다. 알지 못하는 그대는 믿고서 젖거나, 영영 쉬지 못하거나 할 수 있다. Do or not. To be or not to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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