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행복한 왕자」 혹은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같이 읽기
영 모르겠단 말이죠.
행복한 왕자는 뭐가 그렇게 행복해서
아니면 뭐가 그렇게 불행해서
자신을 있는 대로 다 떼어서 ― 문자 그대로 떼어서 ―
나누어 주어야 했을까요?
결국 ‘행복한 왕자’ 상(像) 아래서 그를 우러러 보며
행복을 상상하던 이들은 그를 밉상이요, 못난 상으로 보아서
철거하게 되지요.
상징의 타락.
그러나 본질은 반대.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서 도리안 그레이가 나이 들수록
그럼에도 하나도 나이 들지 않는 동안에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이 늙어가도록 하였습니다.
언제나 아름다운 얼굴은
점점 더 끔찍하게 추해지는 얼굴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리안 그레이가 죽었을 때
그의 초상은 도로 처음 모습대로 아름다워졌고
그를 섬기던 하인은 도리안 그레이의 시신을 보며
자기는 모르는 사람이라고 도리질 치고
초상화를 가리켜 내 주인은 저 사람이라고 뿌듯해하며 말합니다.
모두의 사랑을 받고 동경이 향하던 사람이
가까이서 자신을 모시던 사람으로부터조차 부정당합니다.
그는 결국 없는 사람이 되고
아무도 그를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그가 받은 사랑은 가짜입니다.
있는 것처럼 보인 그것은 전부 없던 것이지요.
행복한 왕자는 도시에서 비참한 처지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나씩 제 몸을, 빛나는 것들을 떼어 줌으로써
어느날 흉측하게 파이고 벗겨진 모습이 되었지만
그를 심부름하던 제비는
끝내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발치에서 죽습니다.
이 어른동화의 끝은
오늘날 상술로 떠드는 것처럼 어른 얘기랍시고 선정적이거나 잔인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무릇 어른이라면 누가 봐도 보이는 빤한 현실보다도
현실에 흔들리지 않고
어떤 악의도 침범하지 못하는
본질을 꿰뚫어 보아야겠죠.
동화라는 형식은 문해력이 떨어지더라도
그 본질에 가 닿도록 안내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왕자」의 마무리는 이렇습니다.
“이 도시에서 가장 귀한 것 두 가지를 가져오너라.” 하느님이 한 천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천사는 납 심장과 죽은 새를 갖다 바쳤다. “제대로 골랐구나.” 하느님이 말했다.
평생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그것만이 가치 있다고 외친 유미주의자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이 꿰뚫어 본 것을, 처참한 실패 속 불멸하는 영광을 들려 줍니다.
우리는 이 소리를 관세음보살처럼 ‘볼’ 수 있을까요?
그대는 할 수 있습니까, 혹은
해보시렵니까?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