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를 수 있는 특권에 대하여: 강화길 작품 「음복」을 읽는 시선
며태 전 2020년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에서 대상작 「음복」을 읽었습니다.
가족 윤리는 세상의 출발을 알립니다.
나 혼자만이거나
나와 너 둘이 맞서는 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펼쳐진 게 셋 이상의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느 누구도 혼자서 강자일 수 없으므로
설득의 논리가 가동됩니다.
질서를 만드는 이 논리는 일회적이면 약하고 가급적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변하지 않을 수야 없지만
변하지 않으려는 관성을 띠어야 신뢰받고
다자 간 신뢰, 균형을 잡을 수 있습니다.
이 균형이 깨지면 그 세상은 무너지고요.
그 첫 규칙, 내재화한 질서가 물리력까지 행사하는 그 첫 윤리는
가족에서 태어나고
확장된 가족으로서의 사회를 만들고
두꺼워지고 복잡하게 얽히면서 여러 층의, 여러 단계의
임의로 두 개를 떼어서 비교하면 모순될 만큼까지 복잡성을 증대하며 확장합니다.
윤리는 어느 순간 최초의 효용에서 벗어나
누군가에게는 천국을, 누군가에게는 지옥을 선사하기까지 합니다.
만일 윤리의 모순이 아무에게도 감지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이 체계의 불균형이 아직 외부 세계에 대해 이 세상을 유지하는 데서 발생하는 유익보다 작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이 방식이, 이 흐름이, 이 균형이
‘생존에 유리하다’는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 불편을 느낀대도
그것이 단지 ‘무엇’인 경우, 우리는 ‘사는 게 힘들다’ 정도로 그칩니다.
예컨대 중력이 너무 힘들다든가, 먹어도 결국 다시 배가 고프다든가, 물 위에는 떠 있지 못하고 가라앉더라든가, 하늘을 날지는 못한다거나 같은 것들.
이 불편은 민감성의 차이뿐 누구나 공통되게 겪는 일들, 누리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 불편이 차이를 낼 때가 있습니다.
이는 민감성과 별도로 ‘눈치’를 보게 합니다.
왜냐하면 이 불편이 무엇에 의한 것이 아니라 ‘누구’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에 의한 불편은, 그 누구에 의해 새롭게 변경되고 갱신될 수 있기 때문에
한 번 적응해서 그치지 않고 매번 새로 계산하고, 계산하지 않는 동안에도 긴장하고 ‘대기’ 상태로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눈치 보기, 대기하고 대응해야 하는 긴장과 고단함은
언제나 그렇지 않은 사람과 그런 사람을 가릅니다.
즉, 감지하는 쪽이 불평등의 아래에 놓인 사람이고
감지하지 않는 쪽이 불평등의 위에 선 사람입니다.
위에 선 자들에게 뭐라고 말해봤자 안 하면 되지, 그게 뭐가 힘들다고, 그게 그렇게 아깝고 억울하느냔 정도의 대답밖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강화길 작가는 ‘제사’라는 가족 제의를 통해
가족이 깨트려져서는 안 된다는 대표적 제의, 가족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만드는 제의인
제사 풍경을 그리며 이 세계에 불평등이 있다는 걸 보여 줍니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런 불평등은
당하는 쪽의 울분 또는 ‘견딜 수 있기 위한’ 내면화와 이것이 겉드러나는 ‘동조’(同調)로 감추어지거나 더욱 강화되기 마련이고
가하는 쪽은 구체적 행동조차 필요치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 아무것도 모르는 자의 가짜 ‘순결’을 주장할 수 있고
순결하지 않다는 걸 알아차리더라도 첫째, 스스로의 편리와 불편이 갈리기 때문에
둘째, 다른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부정하고 있는 이들의 존재로 말미암아 적당히 그 속에 숨는 게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현상을 유지한 채, ‘완전한 답을 찾으면’ 그때 바꾸자는 ‘지연’을 선택하게 유도됩니다.
그리고 지연, 현상 유지는 평화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것이고
구조의 정지, 억압의 해제, 폭력의 중지를 요구하는 모든 즉각적 요구,
원점에서 다시 생각하자는 요구는
중립점으로 인식되는 되신 급진적이고,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사유가 부족한 감정적 방식으로 비추어집니다.
이로 인해 이 점잖은 이들은 기득권을 유지합니다.
저도 남성입니다만, 이 사회에서 가장 큰 기득권은
남성입니다.
남성은 ‘자기’를 생각하고,
여성은
‘타자’를 생각합니다.
남성은 그래도 되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이제 와서 안 그러려니까 힘듭니다.
힘든 걸 해낸 사람, 괴로움을 감내키로 한 사람은 고민을 하거나 바꿀 수 있지만
여기에도 ‘시간’은 들며
그들은 한쪽에는 배신자가 되고, 한쪽에는 밀정이 아닐까 의심받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자 중 팔할은 그만두게 됩니다.
여성은 타자의 움직임을 보며
동료애를 느끼거나 같은 종으로서의 연민을 느끼는 대신
증오나 한심함, 불가해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닐 수도 있지만, 결코 안심은 못합니다.
그것을 그것대로 인정하더라도 이는
야생을 원망하지 않아도 매순간의 생존의 위협을 느끼며 신경이 곤두서는 것과 같습니다.
말하다보니 디스토피아입니다.
눈치 보지 않는 자가 남을 괴롭히는 자입니다.
명절 때 전 부치는 사람과 설거지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을 살피고
시간을 살핍니다.
명절이 휴식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노동 위에 서 있는 겁니다.
공정치 않죠.
같이 쉬거나 같이 일해야 합니다.
강화길 작가가 쓴 「음복」에는 착한 사람만 나옵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나쁜 사람들입니다.
개인으로서 착한 자가
구조 안에서 악을 정착시키고 전파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뜻하지 않았다? 악의가 없는 걸로는 부족합니다.
피해자가 있는데 그런 핑계는 곤란합니다.
그렇게 거기서부턴 난 모르겠다는, 몰라도 된다는 생각이 나쁜 마음이고
모른다는 것이 나쁜 구조에 편승한다는 증좌이며
몰라도 되는, 모를 수 있는 것이 권리 아닌 특권입니다.
특권이라 함은 충분히 합의 가능한 공공선을 위한 게 아니라면
그러고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대체불가한 최선의 방식이 아니라면
타자의 몫을 빼앗는 약탈이 분명합니다.
개인으로서는 악의 없음이 ‘선하다’고 간주하는 기준이 되지만
공동체/집단은 선의 없음이 ‘악하다’고 간주하는 기준이 됩니다.
비단 남녀 사이의 일이 아닙니다.
많은 집단적 이익이 이런 불균형을 안고 있습니다.
어느 만큼은 움직이는 동안의 불균형이란 불가피한 것이긴 합니다.
그래도 전체적인 중심은 맞아야 하고,
역할을 번갈아 맡아야죠.
한쪽에 계속 전가(轉嫁)하는 부담은 분명 불의한 것입니다.
예에 어긋납니다.
「음복」은 아주 짧은 분량 속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지나쳐온 무수한 제사의 풍경을
굉장히 낯설게, 섬뜩하고 기이하게 바라보게 해 줍니다.
알아차리십시오.
이 민감성으로
이웃을 늘리고
적을 줄이십시오.
책은 언제나 ‘타자-되기’를 실현시켜 줍니다.
물론,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