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시와 현실

빈집에 대하여; 「빈집」에 대하여(기형도 시)

by 이제월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빈집」 전문


― 기형도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사, 2005(재판 36쇄, 초판 1989), 81.




「빈집」은 요절하고 신화가 된 천재 기형도 시인의 유일한 시집에 실린 시 중 하나입니다.

천재들이 좀 그렇습니다.

혹은 그래야 좀 천재라고 합니다.

물론 시절을 타서 그 시절엔 그랬고, 지금은 그게 꼭 정답은 아닌데

그런 느낌 정도는 슥 통한달까요?

그의 죽음에 낭만이나 숭고함은 없습니다.

그건 그냥 사고였고, 어느 만큼은 죽은 그에게 부주의를 탓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 시대를 탓하는 것도 얼마든지.


중요한 건 시인이 주고 간 시입니다.

우린 그걸 먹고 마시고 헤엄칠 거니까요.


[1]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이게 뭔일입니까, 왜 하필, 잃고서 쓰는가요?

그는 상실의 시인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상실의 시대』(원제는 ‘노르웨이의 숲’입니다만)를 써서

산문으로 할퀴어 상실의 흔적을 남겼다면

그래도 시는 여전히 기형도 시인이 할퀸 게 자국이 큽니다.

더 깊은 자국을 허수경 시인에게서 찾는대도 말입니다.

너무 많은 수의 사람들이 그 상처를 벌려보고 거기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기 때문입니다.

빌미는 시인이 주었습니다.

그는 사랑을 ‘잃고’ 썼으니까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때 시가 그를 만나 주었으니까요.



사랑을 잃었기 때문에

시인은 찬란한 것들을 쓸 수가 없습니다.

현재하는 것들과 교감할 수 없고

모두가 죽은 것 혹은 과거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것들을 과거에 두지 않습니다.

쓰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사랑을 잃고 나는 썼네>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는 분명 <쓰네>라고 하였습니다.

<쓴다>라고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두 겹의 짚어볼 특징을 보여 줍니다.

시인은 사랑을 잃고서 그걸 그냥 놓친 게 아니라

과거에 두고 온 게 아니라

씀으로써 ‘현재화’합니다.

시인이 쓰기 때문에 그것은 현재에 있게 됩니다.

<썼>다면, 잃고 쓴 과거이지만

잃은 것이 과거의 명명백백한 사건일지언정

그는 <씀>으로써 그것을 현재에 멈추게 합니다.

과거로, 어딘가로 달아날 수 없게 합니다.

그런데 그건 또 <쓴다>가 아니라

<쓰네>입니다.

시인이 자기 자신을 관찰하는 겁니다.

자기 행위를 보고 있는 것입니다.

즉, 작정하고 집요하게 무얼 한 게 아니라

나는 이렇게 하는데, 아, 내가 이렇게 하고 있구나 하고 보는 겁니다.

그는 자기 운명의 목격자입니다.

이렇게 쓰는 것은 시인에게 <부득이>(不得已)한 것입니다.



[2]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시인은 작별 인사를 시작합니다.

그가 사랑을 잃고 쓰기 때문에

그가 쓰는 것들은 사랑이거나 사랑에 대한 것, 적어도

사랑에 관한 어떤 것들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일러 제일 처음 <밤>이라고 합니다.

혹은 제일 처음 <밤>을 부릅니다.

사랑의 여러 모습, 최소한 사랑과 어울려 다니는 여러 무리 중 첫손 꼽은 게

<밤>인 겁니다.

왜 밤인가, 불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대신

색깔을 감추고 형태도 경계도 희미하기 때문입니다.

없거나, 모르거나, 알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정확하게 알고, 정확하게 인식할 수는 없는 채입니다.

무엇 하나, 그중 어느 것이 아니라

통째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감각의 혼란이요, 인식의 혼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짧>습니다. <짧았던> 것이 분명합니다.

모든 사랑이? 아니면 시인의 ‘그’ 사랑이.


그리하여 다음 떠올려 부르는 것도, 혹은 불러서 떠올리는 것도

희미하고 경계를 지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첫 행에서 <쓰네>라고 말한 것처럼

시인은 자기가 쓰는 행위조차 남의 것인 것처럼 말한 것처럼

여기서도 이어지는 그것도

마치 밤이라는 ‘세계’, ‘시공간’ 자체가 그러하듯이

손쓸 수 없는 것,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 나를

국외자(局外者)로 만드는 것입니다.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겨울 또한 짧을 것입니다.

그렇게 나를 소외하는 사랑의 성질은

그러나 사랑의 다른 성질도 떠올려줍니다.

모든 사랑은 아니라도 시인이 노래하는 ‘이’ 사랑은

이 청춘의 사랑은

결코 늙을 리 없는, 요절한 시인이 아는 사랑은

영원히 청년인 시인이 노래할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짧게> 다녀갈 뿐, 내게 깊이 스밀 수 없고

나를 할퀴고 영원한 상처를 남기지만

나와 하나되지 못하고, 나와 온전히 섞이거나 스미지 못하여

영원한 이질감을 남기므로

이 관계는 — 모든 관계는 쌍방향이므로, 모든 길은 일방통행으로 만들어도

얼마든지 반대 방향으로 통행할 수 있으므로, 그래서 결국 같아지므로 —

양쪽에 같은 조건을 부여합니다.

‘이’ 사랑은

나에 대해, 혹은 나를 통해서 만날, 만났을, 만나는 세계에 대해서 순결하리만치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그리하여 시인은

짧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소외시킨 만큼

저도 나에게 스미지 못하고 <떠돌던> 밤들을, 겨울 안개들을, 촛불들을

<짧지만> 혼자가 아닌 것들, 나를 외롭게 하지만 저는 무리 지어

나를 휩쓸던 그것들을

<잘 가라>는 대신

<잘 있거라> 인사합니다.


시인은 사랑하는 동안, 사랑을 지닌 동안 — 곧, 사랑이 나를 지닌 동안 — 무능했지만

<사랑을 잃고> 권능을 되찾습니다.

시인의 권능이야, <쓰는> 겁니다.

그래서 시인은 문득 주권을 회복하고, 삶의 주인으로 되돌아와

자기가 여기 주인이므로

그것들의 운명을 처분합니다.

시인은 보내는 대신, 할일 다했다는 듯이 흥미를 잃은 저들을

억류합니다.

<잘 있거라>고.

마치 자기는 떠난다는 듯이.

주인으로서 그들의 체류를 결정하고

자신은 망명객처럼, 혹은 객기일 뿐 돌아올 여행인 걸 알면서

<잘 있거라>며 자신을 스스로 소외시킵니다.

사랑이 가한 소외를, 스스로 선택합니다.

그는 피해자였다가

행위자가 됨으로써

그 피해를 완성합니다.

그것이 피해로 머물지 않고 변성[transformation]하게 합니다.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시인은 이제 바로 봅니다.

그것은 환한 게 아니라 밤이었고, 따뜻한 날들이 아니라 겨울이었고,

태양이 아니라, 달과 별조차 아니라

흔들리는 촛불들이었다고,

하나의 온전한 상을 잡아 주는 또렷한 광원이 아니라

여러 개의 그림자 속에 진상을 흩뜨리는 <촛불-들>이었다고 고발합니다.

그리고는 쓰디쓰게 말합니다.

그때 <흰 종이들>은 <공포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왜 공포를 기다렸는가?

왜 시인은 그것을 공포라고 하는가?

모든 게 처음인 것이기 때문에.

사랑은 반복할 때조차 처음이기 때문에,

무력하게 모든 걸 빼앗기 때문에.


그리하여 그의 말들은 자유롭지 않고

어디서 어떤 말이 쏟아질지

말을 받을 종이는, 날마다의 나 — 사랑하는 이, 사랑에 빠진 이는

시작된 순간 상실마저 시작된 ‘이 사랑’에 의해

사랑해 마지 않는 그것을 전부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그리하여 그때 무능했던 자신을, 무력했던 자신을 떠올립니다.

그때의 눈물은 슬픔과는 다르게

장차 슬픔을 불러올, <망설임>인 것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열망들은 그것들이 주인인 동안만

내가 주인인 것을 허락하기에

시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을 정확하게 가리켜 부릅니다.

그것들도 <잘 있거라> 인사합니다.

이 작별은 어떤 의례, 무엇을 수행함일까요?



[3]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시인은

국외자였던 사랑을 끝내 저버리지 못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랑은 아니지만

‘이’ 사랑에 대한 의리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영영 그것을 오롯하게는 알지 못하는 <장님>인 채로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급니다.

이것은 운명이지 선택이 아닙니다.

그러나 명백히 억지가 아니라 제 손으로 하고 있는 자기 수행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기 행위를 애닯아 합니다.

자기가 가두면서, 문을 잠그면서

<가엾은 내사랑>을 한탄합니다.

그러나 가두었기 때문에만 가여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이 머물 곳이 <빈집>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하여 빈집이냐.

<사랑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잃어 빈집이 된 시인은, 청춘의 시인은

이 빈집을 봉인합니다.

다른 사랑이 들어가지 않게

잃어버린 사랑을 가둡니다.

부득이 ‘잃어버린 사랑-을’ 가둔다고 하였지만

잃어버린 사랑을 되찾아 가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사랑은 잃었고,

그리하여 물질에 대한 반-물질처럼

반(反)-사랑을, 사랑과 만나면 폭발하여 무화될, 쌍소멸할 <반-사랑>을

사랑을 잃은 빈집에 가두는 것입니다.

신을 영원히 신전에 가두듯이.


또한 사랑이 가엾은 까닭은 더 있습니다.

요절한 시인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일이지만,

세상 모든 청춘들은

사랑을 잃고 쓰디쓴 그 시절 뒤에

다른 사랑에 자기 집을 내어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잃어버린 사랑은 떠나지 않고 갇혀 있다가

그 사랑과 동거할 것입니다.

그 사랑을 목격하고

심지어 조언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시인은 예감하고 예언하는 것입니다.

나는 언제까지고 빈집이로구나.

내가 감히 사람 사는 집, 살아 있는 집, 무언가로 충만한 집이라고 불릴 수 있겠는가.

이 절망을 안고

비루한 자신을 부정함으로써 긍정하는 것입니다.

긍정함으로써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짧은 몇 줄의 시구 속에서

사람들은 영원토록 떠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와 <아니오>가 전부

구획이 구분되지 않고

단 하나의 붓질로 그어져 있기 때문에

모든 언어로, 모든 마음으로 통역할 수 있기 때문에.



시는 이런 식으로

모순으로 모순을 극복하고 지우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렇게 현실을 닮고

어쩌면 이렇게 현실을 초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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