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1789), 그후 지금은?
1789년 9월 20일
혁명기 프랑스의 국회에서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승인되었습니다.
당초 5월 삼부회(세 신분의 회의 즉, 성직자, 귀족, 평민의 회의로 이중 성직자와 귀족 들은 면세 계층)는 루이 16세가 재정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집한 것이었습니다.
1614년 이후 무려 175년만에 소집된 삼부회에 평민들은 큰 기대감을 가졌습니다.
화려했던, 그리고 유럽 역사상 가장 오래 재위한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로부터 이때에 이르기까지 프랑스는 가장 부강한 국가였지만, 갖가지 전쟁을 벌이고 온갖 전쟁에 개입함으로써, 특히 미국의 독립전쟁을 영국을 약화할 기회로 보고 지원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부채를 졌으며, 인구 폭증과 북반구를 덮친 소빙하기로 인한 흉작 등이 겹쳐 위태한 재정 상황에 직면하였습니다. 동시에 상업을 중시하는 중상주의 기조 안에서 일부 평민 계층이 ‘부르주아’(‘성 안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부유한 계층으로 성장하여 경제적 지위에 걸맞는 사회적 지위도 바랐으며, 계몽주의가 퍼지면서 타고난 신분보다 학습된 지식과 지적 능력에 맞게 사는 게 타당하다는 생각도 유행했습니다.
절대왕정기 루이 13세, 14세, 15세는 모두 삼부회를 거치지 않고 국왕의 권위로 나라를 다스렸지만, 루이 16세는 그런 성품도 아니거니와 이제 프랑스의 재정은 대규모 증세 없이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삼부회를 소집해 증세 논의를 하려는데, 당시 프랑스는 1신분(성직자)과 2신분(귀족)은 세금을 내지 않고, 평민이 인두세, 소금세 등 세금 전부를 부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해 소집한 삼부회의 의원 구성은 총 1천200명 가운데 제1신분이 291명, 제2신분이 270명, 제3신분이 578명으로 제3신분이 다른 두 신분을 합한 것보다 많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표결 방법은 ‘신분별 1표’여서 특권을 누리던 1신분과 2신분이 합하여 2표, 3신분은 1표로 평민 대표의 수적 우위가 무력해지는 방식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인구는 약 1천만명으로, 대략 1신분이 10만명, 2신분이 40만명, 3신분이 950만명에 달했습니다.)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소집된 삼부회는 또 다시 평민에게만 과세하였고, 분노한 평민들, 즉 농민, 장인 대표들은 테니스 코트*에 모여서 불만을 터뜨리며 자신들이 진정한 의회라며 삼부회와 별개로 ‘국민의회 선언’(1789년 6월)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권리 내용을 조문하였습니다. 라파예트, 시에예스 등 의회 의원들은 왕이 없는 나라, 얼마 전 독립한 미국 독립혁명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이 권리 선언을 마련하는데, 1789년 8월 26일 국민의회가 17개 조항으로 채택하고, 의회를 이를 공식 승인한 후, 루이 16세가 형식적으로 인정하여 전국에 인쇄, 게시되었습니다. 이는 또 즉시 세계로 확산되어 알려졌습니다.
이는 유럽 전역, 라틴아메리카, 멀리는 아시아의 개화기 담론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여성이나 노예, 식민지인은 이러한 ‘권리’ 선언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올랭프 드 구즈의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1791) 같은 비판이 나온 건 당연한 수순이었지요.
그럼에도 이는 처음으로 평민들의 권리를 마치 왕의 권한을 선포하듯 선언한 것이었고, 프랑스 시민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포함한 선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은 이후 퍼져간 각국의 ‘시민 혁명’의 길고 긴 여정에 불을 놓은 ‘대혁명’으로 불리는 것입니다. 얼마 안 가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시내 한복판에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국왕 루이16세를 단두대에 처형했습니다. 프랑스 안에서도 반혁명파들이 봉기하여 파리로 진군하며 프랑스는 내전 상태가 되었고, 주변국들은 일제히 대(對) 프랑스 연합을 이루어 프랑스의 혁명 정부를 처단하고 왕정을 되돌리고자 전쟁을 선포하였습니다.
프랑스는 전 유럽과의 전쟁 상태에 놓이게 되고, 혁명 정신을 전파하며 가는 곳마다 ‘해방군’을 자처하게 되는데, 여기에 저항해 평민들이 왕과 귀족과 자신을 한 무리로 인식하도록 묶기 위해 ‘민족’(民族, 國家, nation) 개념이 창시됩니다. 이는 만주와 한반도에 오랜 세월 거주하며 다져진 우리의 민족 개념과는 차이가 있으나 현대 국가의 대부분은 이런 민족을 단위로 해 구성되는 흐름을 촉발하였습니다. 이들 민족을 묶는 원리는 주로 언어와 신화 등이었고,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는 강한 정신적 결속으로 유럽의 국경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패망 후 프랑스는 샤를 18세가 즉위하는 등 왕정복고를 겪고,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이름을 딴 ‘메테르니히 체제’는 전 유럽을 나폴레옹 전쟁 이전 상태로 되돌립니다. 영토뿐 아니라 국가 체제도. 그러나 시민들은 이미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접하였고, 결국 왕들은 자신들의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민주정을 받아들여야했습니다. 민주주의 선진국이라는 유럽의 많은 나라가 ‘왕’이 있는 건 프랑스처럼 왕이 쫓겨나고 처형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계몽군주들이 ‘입헌군주제’를 받아들이며 양측이 갈등을 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선언은 어쩌면 비명 소리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패배자의 마음가짐이 아니라 새로운 승리자, 새 시대의 개창자로 나서며 만인의 권리를 외침으로써 세계사를 ‘근대’로, 나아가 ‘현대’로 쏟뜨리는 큰 물줄기를 열었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시대의 고유한 짐을 지고 있습니다. 모순들에 짓눌려 신음하고 각양각색의 비명을 지르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살 길은 다시 새로운 질서를 선언하는 데 있을지 모릅니다.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기대와 다르게 모든 평민을 챙겨야 했고, 프랑스 시민들이 모든 인간, 만인의 권리에 대해 외쳤으며, 마지 못해 열었을지 모르는 이 평등의 문 안에 여성이 배제된 데 대한 비판이 곧 뒤따른 것처럼, 어쩌면 지금 시대에 우리도 인간만을 생각해서는 출구가 없고, ‘인간을 넘어서’, ‘우리의 범위’를 넓혀서만 타개책을 마련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는 이제 ‘지구’로서 묶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모든 생물의 생명권을 주장하고, 광물까지 지구 전체의 권리를, 지구권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休
*court. 당시 유럽의 성들은 외성과 내성 사이에 중정(中庭, court)이 있었는데, 이곳은 평소 귀족들이 테니스 등 운동을 즐기는 경기장이었고, 평민들이 성주에게 재판을 받을 때면 내성까지 들어오지 못하고 이곳 중정에서 재판을 받았으므로, 코트(court)는 운동경기장과 재판정 둘 다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