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최민순 역 시편 10장 3절)
“[…]바닥이 송두리째 무너나는 이 마당에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이냐.”
[……]
의로우신 주님이기 정의를 즐기시나니
올바른 자 당신 얼굴을 뵈옵게 되리라.
— 시편 10(11)장 3절;7절*
기도의 출발점.
여기가 엉망진창이라는 생각.
적어도 이게 이상에 부합하고, 가능한 최선은 아니라는 지각.
기도의 도착점.
볼 거라는, 만나서 마주 볼 거라는 희망.
기도의 도착점이 ‘무엇’이 아니라 ‘누구’이며
그 누구는 ‘의롭다’, 하니 ‘정의를 즐긴다’는 믿음,
그렇다면 올바른 자가, 의인이 그의/당신의 얼굴을 뵙게 될 거라는
이지(理智)에서 비롯한 믿음.
앞선 두 희망-믿음은
의지가 바라는 당위이지만
뒤이은 하나의 믿음은
기도하는 자 자신과 기도받는 자, 3인칭 당신에 대한 가정에 입각해
이치에 따라, 지성이 바라는 당위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특이점은
고통받는 의인이 바라는 보상이
고통의 소멸이니
피해의 복구나 높은 상급(賞給, prize; award; reward)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의인에게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의로우며, 전지하고 전능한 존재로서의 당신이
정의를 즐기기에 올바른 자만 대면할 것이요,
그에게만 낯빛을 보일 것이기에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올바른가? 내가 정말 의로운가?
내가 행한 것은 정의로운 것이었나?
옳거니, 내가 당신을 만난다면 그러하다는 입증이로구나!
— 의인은 진심으로 올바르길 바라기에
동시에 자신의 불완전함을 알기에
다른 보상이 아니라
자신이 진짜로 올바르기를
자신의 결정과 대응 또는 생각과 행동이, 심지어 마음이!
올바른 것입니다 — 올바르고, 올바른 걸 아는 것입니다.
아, 지금 아는 걸 바라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언젠가는 알 수 있기를 바라는 겁니다.
이 간절한 몸부림이
의롭다는 것에 주어지는 현실에서의 대가입니다.
지상의 삶은
의로움에 대가를 지불하지 않습니다.
어떤 현실적 보상과 포상도
올바른 자가 내적으로 수행하는 저 커다랗고 전적인 헌신에 대해
갚거나 채울 수 없습니다. 아주 조금이라도!
그러므로 의롭다는 건 외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믿고 희망하는 가운데서는,
여기에는 그의 온전한 의지는 물론
빼어나고 근면한 지성까지 필요한데, 어느 하나 부족함 없이 그가 그러한 자라면
— 외롭지 않습니다.
그는 홀로 서지만 혼자가 아니고
외롭기 짝이 없지만 외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는 비정상적이고 일탈한 존재입니다.
그는 본래 그럴 수 없고, 그러면 안 되는데,
지상에서 이미 천상의 질서를 체현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는,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이미 미래를 가져다 자신의 일부로 삼았으며
본래 가질 수 없는 영원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가리키는 ‘올바른 자’,
꼭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성경이 아니더라도
그 말의 뜻의 최상급 구현으로서 ‘올바른 자’ ‘의인’이란
사람[human nature]과 사람 아닌 무엇, 말하자면 다음 사람[post-human]의
경계에 선 존재입니다. 번개처럼, 실재하지만 곧 실재하지 않는
‘무엇’이라기보다는 ‘어떤 것’ 그러니까
사물이 아니라 사건, 현상[Phenomenon]입니다.
이를 인식할 만큼의 지성이 있고
여기서 상상의 도피처를 찾아 거짓 안식을 얻지 않을 정도의 의지가 있어야만
바로 이런 방식으로 올바를 수 있기 때문에,
의인이라는 부름이 합당한 바로 그 ‘의인’은
‘올바른 사람’은
자신이 그런 존재라고 도취되지 않고
끝까지 이 ‘분열하는 일치’를 직시하여
이 현상, 자신이 결정하고—감내하고—실행하고—견지하는 이 올바른 생각과 말과 행위, 마음을
자신의 업적으로 여기기는커녕
은총(恩寵, grace)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사물이 아니라 사건, 하고 있는 중인 사건 같은 것이기에
시시때때로 숨을 고를 때마다
때론 안도하고 때론 괴로워하며
— 자신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만큼 안도하고, 자신의 불완전함을 대면하는 만큼 괴로워하며 —
온전히 믿지 못하고
온전히 희망하지 못하는
자신의 가엾은 처지를 지각하되,
이 명철한 지각이 연민 따위로 변환하지 않고
오직 타인을 향해서만 연민을 발동하게 됩니다.
그는 자신의 죄, 다시 말해, 악을 발출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의 자기 죄를 고백하고
슬퍼하며
이 슬픔을 계속하는 한
미래로부터 행복합니다.
영원 안에서 행복합니다.
그것은 지금 벌어지지만,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이미’와 ‘아직’ 사이에 서 있는 겁니다.
올바른 사람은 게으를 수 없고
비겁할 수 없습니다.
현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그들은 말하자면
식어가는 세계 안에서 불타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에 대해
어떤 상찬이나 수식을 붙이더라도 나는 미동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불타고 있다, 그렇게 식어가는 속에서도 열을 내고 있다고 하거든
그들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고 하면
그제서야 벌떡 일어나
‘정말?’ 하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고
올바른 사람들의 얼굴을 통하여
다른 시간에는 하느님의 얼굴을 마주하려 할 것입니다.
이것은 귀하고 드문 일이며
다른 것으로 비슷하게도 대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불타오르는 자를 보거든
그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올바르다는 건
인간을 벗어나는 고독을 요구하는 것이고
거짓이 아닌 한 그들은 — 늘상 우리를 위로하는 그들은 —
가장 큰 위로를 필요로 하고 있을 테니까요.
나는 살릴 수 없더라도
그에게 물 한 방울을 양보할 것입니다.
비록 바닥이 무너나는 이 마당이지만
그렇게 하는 건.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요.
감사한 일입니다.
休
*최민순 신부의 번역은 학문적 정확성에 아쉬움이 있을지 모르나
시적으로 아름답고 폐부를 찌르는 빼어남이 있어 『구약성경』 「시편」의 번역으로 이 역본을 선택하였습니다.
시편은 통상 70인역으로 불리는 그리스어본과 히브리어본의 장 구분이 달라
괄호 속에 히브리어본의 장 번호를 나란히 표기하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