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택트(Contact) 1: 그 접촉의 주변
밖은 끝없이 내화(內化)-하고
안은 자꾸만 외화(外化)-한다.
껍질은 살이-되고
살은 껍질이-된다.
칼 세이건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조디 포스터가 주연한 영화,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의 <콘택트>는 나에게 아주 인상적인 영화입니다.
나는 이 영화를 2002년 전에 이미 열 번 넘게 보았고, 지금까지 스무 번 가까이 보았습니다.
처음 본 것은 그러니까 1999년. 스크린으로 본 적은 없고 비디오로 봤었습니다.
그 뒤 2002년 초 DVD를 구입했는데, DVD player도 없는 처지에 이를테면 ‘사치’를 부린 것이지만
공용 데스크톱 컴퓨터를 켜서 보면서도 전혀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최초의 메시지를 재확인할 뿐 아니라
새로운 메시지마저 읽기 때문입니다.
<콘택트> 읽기의 처음인 “콘택트: 그 접촉의 주변”은 내가 읽어낸 두 개의 기표(記表, 프랑스어: signifiant 시니피앙)에 대해
먼저 첫 번째 기표의 기의(記意, 프랑스어: signifié 시니피에)를 해명하고자 하는 작업입니다.
그런데 이 글의 첫머리에 적은 대로 나는, 안팎의 전이(轉移)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러한 안팍의 전이 — 전복보다는 확장, 동질화로서 — 가 발견됩니다.
그것도 매우 짙게.
조디 포스터가 분한 엘리 애로웨이는 외계인탐사작업(외계의 지적생명탐사, 영어: 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 SETI)에 매달린 학자이고
작중에서 결국 외계의 신호를 수신합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탐사를 다녀오고, 이에 대해 청문회를 받게 되지요.
그런데 엘런 애로웨이[엘리는 애칭] 박사에게는 팔머 자스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연인이라고 불러도 좋겠지만, 그들의 사랑이란 건 이 작품에서 쓰인 여러 기둥 중 하나이되
필수적인 중심부는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아무튼 자스는
대통령 자문위원 중 하나로서 엘리의 동료 켄트의 말을 빌자면, “영적인 존재”입니다.
애로웨이는 신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녀는 이 때문에 자스와 논쟁을 벌이곤 하였습니다.
자스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자스의 체험을 ‘그건 간절히 바란 탓에 느낀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지요.
두 번째 만남에서도 그녀는
오캄의 면도날(Ockam’s razor) 이야길 끄집어냅니다.
(윌리엄 오캄은 중세 후기의 가톨릭 사제이자 수도사입니다만, 오랜 동안 중세의 신중심주의 사고를
기초에서부터 무너뜨린 주범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아이러니죠.)
같은 조건이라면 보다 단순한 답이 올바르다는 오캄의 면도날.
자스 역시 그 자체에는 동의합니다.
그런데 자스는 난데없이 그녀에게 이렇게 물어요.
“아빠를 사랑했나요?”
애로웨이는 대답합니다.
“네, 무척.”
자스는 곧바로 묻습니다.
“그럼, 그걸 증명해봐요.”
사랑했다는 걸 증명할 도리는 없을 겁니다.
영화에서는 애로웨이가 잠시 멈칫하는 사이에 암호를 해독했다는 급보가 와서
둘의 대화가 이어지지 못합니다.
나중에 청문회장에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믿으라는 거냐고 따지는 (청문위원 중 한 사람인) 키츠에게,
그렇다면 애당초 경험이 실제가 아니라고 증언을 철회해야 하지 않느냐는 키츠에게
애로웨이는 답합니다.
“그럴 수 없으니까요.”
“난 경험했습니다.”
“증명하거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한 인간으로서 그것이 사실이었다는 걸 압니다.”
Because I can’t.
I had an experience.
I can’t pove it, I can’t even explain it.
But everything I know as a human being, everything I am…
…tells me it was real.
(이성의 법칙을 충족시키게끔, 그에 해당하는 언어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전체로서의) 한 인간으로서는 모든 것이 내게, 그것은 사실이라고 일러주고 있다는 걸 안다……
접촉은
모든 것을 바꾸어 버립니다.
Arroway. 화살과 길이 합쳐진 말.
Ellen.
그리스 신화로 가면 그 미모로 인하여 트로이 전쟁을 촉발했다는 여인이며,
그리스도교 문화로 들어가자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로서
로마가 그리스도교를 믿는 자유를 허락, 인정하는 데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고
팔레스타인에서 예수를 못박았던 십자가를 발굴해 로마로 가져왔다는 전설의 주인공,
성녀로 추앙받는 인물의 하나.
이 아이러니한 이름을 간직한 인물은
작품 속에서도 ‘faith’(믿음)이 적절해보이는 자리에 잠시 말을 골라내 ‘모험심’(adventure)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과학자로서의, 자원자로서의 자신의 온전한 경험을 부정할 만큼
이른바 ‘이성적’이라거나 ‘과학적’이라는 말을 교조(敎條, dogma)로 떠받들진 않습니다.
— 과학자이지 과학교도는 아닌 겁니다. —
그녀가 진정 의심할 줄 알기에
그녀는 그토록 강하게 자신하고, 자신의 증언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청문회장을 나올 때 사람들은
우리의 마음을 열고, 우리의 우주를 열라거나
엘리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했다라거나 하는 등 여러 피켓을 들고 환영합니다.
엘리는 자신이 녹화해 온 테잎의 진실에 대해 알지 못합니다.
(저도 여기서 먼저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경험’에 대해 확신합니다.
그 모든 부정적인 가능성, 반론가능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자신이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인간이 된다는 것, 그것은 자신을 믿는 것이며, 자기 경험을 믿는 일입니다.
자기 세계를 믿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어떻게도 타자와의 접촉(contact)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타자’를 스스로 굳건히 세워야만 하기 때문에.
그래서 혹자는 절대자를 믿고(영화에서는 그 수를 세계인구의 95%라고 추산합니다)
혹자는 과학을 믿으며,
혹자는 인격[주관적 권위]을 요구하고, 혹자는 증거[객관적 권위]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대통령의 ‘사실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말이
모두에게 같을 수야 없습니다.
애로웨이가 경험한 사실이 그들이 ‘증거’를 통해 확인하고자 한 것과 다르기 때문에.
살아가며 믿는다는 건 무언지 묻고,
그 믿음을 지켜간다는 건 어렵다는 걸 느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버리지 않는 것,
자신마저 스스로를 믿지 않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아마 자스처럼 강렬한 체험으로 일찌감치 믿는 사람도 있겠으나
애로웨이처럼 강력한 의심을 바탕으로, 자신의 경험을 부정할 수 없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경우든 한 가지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접촉한 사람들은(자스는 하느님을 느꼈다고 하고, 애로웨이는 외계의 지적존재를 만났다고 합니다)
‘희망’을 갖습니다.
이 희망은 다음 글에서 적겠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런 증거가 없어도 스스로 믿습니다.
(2에서 계속)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