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람이에게 | 달빛독서

황비홍: 우아함에 대하여

by 이제월



황비홍: 우아한 싸움

(부제: 균형에 대하여)

*이 글은 <황비홍> 1편에 한한 것입니다.



싸움을 칭찬한다는 건 그리 좋은 일이 아닐 겁니다. 적어도 교육적이진 않겠죠.

그러나 특별히 이 한 편의 영화에 대해서는 ‘우아함’을 상찬(賞讚)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꽤 오래된 영화이지만, 그 오래된 느낌 속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녹슬지 않는 감흥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황비홍*은 중국 근대의 전설적인 실존 인물입니다.

영화가 보여주는 바로 그런 사람은 아니지만,

워낙 중국인의 사랑을 널리 받아와서 <취권>을 비롯한 여러 영화에서 그 이름이 등장하지요.

이 황비홍 시리즈도 편수를 더해가면서 다각도로 주제와 배경을 넓히지만

내가 진짜 ‘황비홍’이라고 여기는 건 이 첫째 편입니다.

서극 감독과 정소동 감독이 그렇게 행복하게 만난 건 이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닌가 싶어요.

그리고 영화를 보고 나면 이연걸이 결코 악역을 맡지 않길 바라는

부질없는 바람이 생길 지경입니다. 왜?

이미 말해버렸지만 영화가 ‘우아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 너무나 잘 알려진 영화에 대해서 이 한 단어만 가지고 이야기를 펼칠 거랍니다.


이 영화에 나타나는 싸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요.

우아한 싸움과 지저분한 싸움.

열강의 싸움의 그렇고 망해가는 청조의 관리들이 저희끼리 벌이는 싸움이 그렇습니다.

그런데 철포삼 엄동진과 황비홍의 싸움은 과연 지저분한가, 우아한가?

나는 우아하다는 쪽에 더 손을 들어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잠시 귀 기울여 준다면, 누구라도 설득하려 애쓸 용의가 있습니다.


철포삼 엄동진은 한 비열한 — 아니, 어쩌면 그저 평범한 — 사내와의 결투 가운데

참으로 멋지게 싸웁니다. 상대는 처음부터 상대를 업수이여기고 기어이 세 수를 봐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그는 비겁한 수를 쓰면서까지

싸움을 끝내자는 상대의 동정어린 제의를 거절합니다.

여기에서 그런 상대를 맞는 철포삼 엄동진은 단지 안타까운 처지에 놓인 비극적 인물일 뿐입니다.


그러나 사호에서 온 범죄자들의 사부라 참칭되면서

그는 단순한 비극의 인물이 아니라 스스로 헤어나오기 힘든

자기 모순을 지닌 복잡한 인물로 드러납니다.

그는 참된 선, 변하지 않는 정의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으며

여기서 살아남는 길은 ‘강자’가 되는 것뿐이라고 믿는 듯합니다.

(흥미롭게도 <황비홍>의 주제가는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强) 즉,

“사내는 모름지기(=마땅히) 강해야 한다”입니다.)


타이틀을 띄우기도 전에 먼저 ‘불평등조약’을 적어둔 부채를 꺼내보이는 이 영화는, 어떤 의미로

개인과 집단, 국가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이념 — “강하라”는 요구를 어떤 당위, 적어도 절박하고 불가피한 요청인 것처럼 제기합니다.

그러나 이 강함은 헐리우드식 강자와는 다른 ‘영웅’으로 그려집니다.

헐리우드식 영웅이 ‘강하다’는 가치중립적이고 겉으로 드러나는[외현(外顯)] 힘과

이어지는, ‘성공’이라는 ‘결과’에 의해 성립된다면,

(기껏 다른 식의 영웅들이 등장하는 영화에는 이를 진짜 영웅의 범주로 넣지 않고

반-영웅[anti-hero]이라고 이름해서만 그 자리를 찾습니다.)

<황비홍>이 보여주는 영웅상은

내면에서부터 솟구치는 기품(氣品)과 지조(志操)로 인해 — 즉, 그 자신의 ‘결’로 인해

영웅임이 확인됩니다.

마찬가지로 <황비홍>(따로 말하지 않는 한, 나는 오로지 1편에 제한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은

강함에 대해서도 다른 해석을 내립니다.

그 강함이 진짜 강함인 것은, 그래서 철포삼보다 황비홍이 더 강하다고 판단하는 것은

그가 결투에서 이겨서가 아니라

(철포삼이 총에 맞지 않았더라면? 승부에 대해서 논분을 일으킬 수도 있는 결말이었죠)

그가 ‘승부’하는 자세, 그가 ‘사는’ 자세 때문입니다.


— 저는 자세(姿勢)나 기세(氣勢)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절로 풍겨나오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다.

작용으로써 존재를 인정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앞서고, 작용은 자연히 따르는 것입니다.

꽃의 향기는 털지 않아도 퍼지는 법이지요. —


우아함은 서로 간의 계약에서 싹트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아함은 예의바람이나 분위기 좋은 것과 다릅니다.

우아함은 황비홍과 엄동진의 대결에서 보여지듯

(확장된 의미에서, 푼이 엄동진에게 매료된 그 결투에서도 역시 보여지듯)

단 한쪽만의 ‘무엇’만으로도 성립할 수 있습니다.


다만 엄동진은 돈이나 명예, 또 황비홍과의 승부 막바지에서처럼

자신의 그 ‘무엇’을 잃어버릴 줄 아는 사람이었고,

황비홍은 그 ‘무엇’을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철포삼 엄동진은 보지림(寶芝林, 바오즈린)을 부수고 거기에 자기 승리의 흔적이요

기업(企業: 여기선 무예관)을 일으켜야만 자기 힘과 존재를 확인받는 것이고,

황비홍은 자신이 무고와 누명 앞에 놓여도,

능멸과 도전 앞에 놓여도 굳이 스스로를 해명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무엇’은 무엇인가?

첫째, 그 우아함은 무엇보다 ‘존중’입니다.

이 존중은 그러나 예의범절이 요구하는 외형적 ‘짜임새’가 아닙니다.

도리어 내면의 형성[짜임] 원리입니다.

그래서 내면의 짜임이 잘된 이는 예절 이전에

기품을 갖습니다.

— 지조 역시 뜻이 ‘안에서부터 잘 고루어진 것’을 말합니다 —

그래서 이 존중은 타인이나 특정 관계에서가 아니라

언제나 ‘나’와 ‘남’ 양방향으로 뻗어나갑니다.

(세영을 타박하는 걸 두고 ‘존중하지 않는 것’으로 읽는 무리수는 두지 않기 바랍니다.

현실감각과 그에 따른 조절이 없는 존중을 말하는 건 아니니까요.)

그래서 철포삼이 불산 황비홍의 이름을 마구 부르는 동안에도

끝내 황비홍은 그럴 ‘엄사부’라고 존대합니다.


우대(優待)와 존대(尊待)는 다릅니다.

우대는 그 이면에 하대(下待)를 달고 있습니다.

(그 하대가 상대에 대해 ‘나’이든, 그 상대에 비겨 다른 ‘남’이든

우대와 하대는 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존대는 언제나 무한히 베풀어질 수 있습니다.

존대는 모두를 향할 수 있습니다.

존대는 상대를 높여도 자신이 낮춰지지 않으니까요. 마치 대자연의 폭풍처럼!

— 그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두려운지요! —

대자연의 고봉처럼!

— 그것은 얼마나 자비롭고, 얼마나 잔인한가요! —

신비로운 균형, 산[生] 균형입니다.


황비홍은 동작 속에서 팽팽한 균형,

부드럽지만 흩어지는 법 없는 긴장된 생기를 유지합니다.

황비홍은 균형감각이 무엇인지, 그것(균형감각)이 얼마나 ‘존중’하는 마음에 의거하는지,

그것이 얼마나 ‘자기 자신을 앎’으로서의 ‘겸손’에 근거[해야]하는지를 보여줍니다.

황비홍의 우아함은 이것입니다.


그의 이름마저 우연찮게도 ‘나는 황새[飛鴻]’입니다.

그리고 비홍은 참으로 그 자신 ‘보지림’입니다.

그의 보화와 신약(神藥: 芝를 의미하려는 겁니다)은 그 자신 안에 있습니다.

자신과 타인을 똑같이 존중하는 마음이지요.

어쩌면 그 마음은 극 속에서 시종일관 인술(仁術)을 베풀려는 그의 마음인

‘측은지심’(惻隱之心)에 다름 아닌지도 모릅니다.


<황비홍>은 하나의 진품(珍品)입니다.

이 진품은 그것을 넘어설 다른 작품을 갖지 못할 겁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품(眞品)이기 때문에

그의 품에는 그와 동등한 성취를 이루는 무수한 동반자(작품)들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그 우아함은 무엇이든 제 품에 안아들일 수 있는

지고한 ‘강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늘 다시 한 번 <황비홍>을 돌려 보며

거기서 여전히 우아한 자태로 상대를 바라보는 황비홍을 만났습니다.

우아한 싸움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홀로라도’ 아름다운 것이며,

아직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미련한 듯한 우직함을,

희망을 실현할 버팀목을 믿게 만드는 힘을 지닙니다.


우아하다는 건 이 균형감 ,

혼자여도 끄떡없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기 어려워보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그래서 영원과 선에 맞닿아 있는 그 특이한 ‘경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계는 언제나 외부세계, 외부자에게 있지 않고

자기 내면에만 숨겨져 있기 마련입니다.


아! 잊을 뻔했습니다.

우아함에는 위에 밝힌 존대의 정신(혹은 보편적 연민의 마음) 말고도

또 다른 기조(基調)가 있습니다.

다만 이 기조는 앞의 우아함의 특질과 배치되거나 우아함의 세계를 양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를 구성하는 씨줄과 날줄로서

때에 따라 어느 한쪽이 더 돋보일지언정

몸통의 볕이 드는 곳과 그늘진 곳처럼 늘 하나입니다.


“모든 중국 사람이 양복을 입게 될 때, 그땐 나도 [양복을] 입겠소.”


양복을 지어주려는 ‘삼삼이’의 청을 거절하며,

‘변화! 변화하고 있는데 우린 과연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느냐’ 물으며 황비홍이 하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맨 마지막에 ‘푼’을 새 제자로 맞으며 ‘양복을 입고서’

그가 올리는 차를 받습니다.

캐릭터로서의 황비홍이 갖는 기품은 변하지 않는 것과 변하는 것 사이의 어떤 연결, 호흡처럼 매끄러운, 그러나 힘있는 무엇일 겁니다.

그리고 마땅하게도 황비홍의 기품은 진정으로 우아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그 남성적

— 남성 또는 여성성에 대한 규정은

단지 일반론 수준에서 의미하는 바를 말하는 거랍니다.

오해하여 열분하는 분이 없기를.

단지 통용되는 뜻을 연상시키기 위한 것임을 재차 확인합니다 — 해답을 보여주고 있다.



나는 이 우아한 ‘힘’과 ‘존재-자체’의 균형[마주침, 균열을 포함하여!]을 다시 맛보고 싶습니다.

명화여, 태어나라!

(이 세계는 너를 품어도 좋도록 드넓도다!)







*황비홍(黃飛鴻). 위키백과에 따르면, 황비홍(중국어 간체자: 黄飞鸿, 정체자: 黃飛鴻, 병음: Huáng Fēihóng 황페이훙, 광둥어 발음: Wòhng Fēihùhng)은 1847년 음력 7월 9일 태어나 1924년 3월 25일 사망한 인물로 태어날 때 청나라 사람으로 태어나서 중화민국무술가, 한의사, 항일 독립운동가로서 살아갔습니다. 현대 홍가권의 체계를 정리한 업적으로 현대 홍가권의 시조로 추앙받고 있으며 그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만도 현재까지 100편을 넘기고, 지금도 계속해서 소설, 드라마 등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가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존경받고 사랑받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

선비. 진정한 의미에서 황비홍이 드러내는 건 '선비'이죠. 다만 황비홍은 무예를 통해 그의 내면의 힘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는 기법을 차용한 영화랄까요. 그 시각적 아름다움 너머 정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면 '강하다'는 개념이 신선하게 바뀔 거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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