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디킨슨 시 <그녀의 얼굴은> 같이 읽기
1. 노래 가사 (Transcript/Lyrics)
해당 영상의 곡은 작곡가 케빈 푸츠(Kevin Puts)의 "Her Face"**이며, 가사는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시에서 가져왔습니다.
YouTube 영상의 스크립트는 아래와 같습니다.
[시간대] 가사
[00:27] Her face was
[00:31] in a bed of Her face was in a bed of hell in a bed of hair like flowers like
[00:43] flowers in a plot her hand was Her hand was weren
[00:57] the secret
[01:02] your tongue more tender than the tune that toers in the less
[01:30] black flower her hand was white on the
[01:40] feeds the night
[01:45] Her
[02:00] Who hears they be in Christ
[02:10] as
[02:14] sweetness as
[02:26] witnesses
참고: 이 곡의 가사 원문(에밀리 디킨슨의 시)은 다음과 같습니다:
Her face was in a bed of hair,
Like flowers in a plot—
Her hand was whiter than the sperm
That feeds the sacred light.
Her tongue more tender than the tune
That totters in the leaves—
Who hears may be incredulous
Who witnesses, believes.
2. 노래의 저작권 및 배경 정보
제목
Her Face (연가곡 《Emily — No Prisoner Be》 중 No. 19)
작곡가
케빈 푸츠 (Kevin Puts) (퓰리처상 및 그래미상 수상 경력이 있는 미국 작곡가)
가사 원작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의 시
유래 및 배경
이 곡은 케빈 푸츠가 작곡한 새로운 극적 연가곡 《Emily — No Prisoner Be》에 포함된 곡입니다. 이 연가곡은 고전 음악의 기교와 록의 에너지를 결합하여 에밀리 디킨슨의 시 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작품입니다.
영상 속 공연자
메조소프라노 조이스 디도나토 (Joyce DiDonato)와 현악 트리오 타임 포 쓰리 (Time For Three)입니다.
저작권 사항
작곡가 케빈 푸츠의 모든 작품은 G. Ricordi & Co., New York (Universal Music Publishing Classics & Screen 소속)을 통해 전 세계적으로 출판 및 관리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곡은 저작권이 있는 작품이며 해당 출판사를 통해 저작권이 관리됩니다.
특별한 사용처 및 사유
검색된 정보만으로는 이 곡이 특정 영화나 광고 등에서 특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내용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 곡은 《Emily — No Prisoner Be》라는 극적 연가곡을 구성하는 하나의 넘버로 작곡되었습니다.
YouTube URL: Her Face - Kevin Puts | Joyce DiDonato & Time For Three
Her face was in a bed of hair,
Like flowers in a plot—
Her hand was whiter than the sperm
That feeds the sacred light.
그녀의 얼굴은 머리카락 침대 속에
화단의 꽃처럼 누워 있었고—
그녀의 손은 성스러운 빛을
먹여 살리는 정액보다 더 희었네.
Her tongue more tender than the tune
That totters in the leaves—
Who hears may be incredulous
Who witnesses, believes.
그녀의 혀는 나뭇잎 사이에서
위태롭게 흐느끼는 가락보다도 더 여렸지—
듣기만 한 이는 믿기 어려울지라도,
눈으로 본 이는 믿을 수밖에 없다네.
에밀리 디킨스의 시들은 제목을 붙이지 않았고, 생전에 일부가 단편 단편 발표됐을 뿐 묶여서 시집으로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이 음반 《Emily — No Prisoner Be》은 에밀리 디킨슨의 시들에 가락을 붙여 만든 연가곡(聯歌曲, Song Cycle)집(集)입니다. 이 형식은 낭만주의 시대 이후 슈베르트나 슈만 같은 작곡가들이 문학적인 서사를 음악에 담기 위해 즐겨 사용했던 형식입니다.
에밀리의 시들은 깊은 주관적 진리의 세계를 넓은 상호주관의 세계로 확장하여, 객관의 문을 넘나들 수 있게 하여 줍니다. 이 노래는 마치 고대의 문헌들처럼, 가톨릭교회의 공식 문헌들처럼 첫 구절을 따 이름으로 쓰고 있습니다. 시구 첫 행(行)을 따서 “Her face,” 그러니까, “그녀의 얼굴[은]”입니다.
Her face was in a bed of hair,
그이의 얼굴은 머리카락 침대 속에
(직역) 그녀의 얼굴은 머리카락의 침상(침대) 속에 있었고,
그녀의 얼굴이 — 머리가 아니라 ‘얼굴’, 무언가를 담고 있는 머리가 아니라 무언가를 표출하는 ‘얼굴’이다 —
머리카락으로 이루어진 침대 속에 놓여 있습니다.
마치 소녀가 포근한 침대 속에 이불을 덮고 들어가 있듯이
얼굴, 모든 것을 담고 있고 뿜어 내는 얼굴은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웅크린 것도 아니고
숨긴 것도 아닙니다.
숨어 있지만 드러나 있고, 드러나 있지만 살짝 숨어 있습니다.
그저 편안하게 그러고 있는 것뿐 다른 뜻을 찾아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들어 있더라는 겁니다.
Like flowers in a plot—
한 자리에 꽃처럼 누워 있었고—
(직역) 마치 꽃들이 한 구획(화단) 안에 있는 것처럼—
그녀의 얼굴은, 화단에 있는 꽃처럼 누워 있다고 합니다.
화단은 bed나 border를 쓰는 게 더 일반적입니다. flower/garden bed/border.
그러나 시인은 뜻이 분명하게 통하는 한에서 다른 표현을 택해
나중 단어가 앞 단어의 뜻을 받으면서 의미를 더하게 합니다. 더 풍성해지는 것이고
더 세밀하게 조정돼 정확해지는 것입니다.
언어는 단순한 물질 자와 다르게 커지는 동시에 작아지고, 성겨지는 동시에 촘촘해집니다.
언어가 물질에 구속되지 않는 정신성의 도구요 ‘상징’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a plot, 하나의 구획, 구분된 자리에, 말하자면 자기 영토 안에 꽃이 있습니다.
앞선 행의 주역인, 아직은 주어인지 목적어인지 시 전체에서의 위치가 불확정한 채인 ‘얼굴’이, 이렇게 마치 꽃이 한 자리 차지하여 놓인 것처럼 침대에 놓여 — 있는데, 침대니까, ‘누워’ — 있습니다.
그이의 얼굴은 머리카락 침대 속에
한 자리에 꽃처럼 누워 있었고—
Her hand was whiter than the sperm
That feeds the sacred light.
그이의 손은 성스러운 빛을 먹이는
정액보다 더 희었네.
(직역) 그녀의 손은 정액보다 더 희었네 / 성스러운 빛을 먹여 주는
그녀의 손은 정액보다 더 힙니다. 정액은 외설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생명력, 생명을 일으키는 힘을 가리킵니다. 다만, 뒤에 모아서 이야기하겠지만, 시인은 생명의 신성을 남성에게 귀속시키는 시도에 저항하고 있습니다. 링감만 아니라 요니도 있다는 거죠. 그리고 여기서는 결국 생산력[여기서 정액]이 거룩함을 만들고, 성별하는 빛을 구성한다고 하면서, 그것[그녀의 손]의 흼(빛이 아닌 것 중 가장 빛에 가까운 빛깔)이 저것[정액]의 흼을 능가한다고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해 이 손이야말로 더욱 성스러운 빛을 먹여 살릴 거다, 성스러움을, 빛을 공급할 거라고 넌지시 내비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과거시제는 단순히 문장을 과거형으로 ‘설명’하는 게 아니라 진술한 바를 ‘주장’이 아니라 ‘이미 실현된’ 것으로서 <사실>의 지위로 묶어 둡니다. 그래서 그녀의 손은 단지 희다고 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희었다’고 해야 합니다. 시인은 이같은 ‘사실’에 따라 자연스럽게, 혹은 계산하여 “더 희었네”(was whiter)라고 쓰고 있습니다.
그이의 얼굴이, 그이의 손이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거기서 확장해 자기를 드러내고 주장합니다. 얼굴은 참으로 드러나는 존재, 참존재를 가리킵니다. C. S. 루이스는 자신의 작품 『우리가 얼굴을 가질 때까지』에서 정확하게 Till We Have Faces라고 함으로써 얼굴을 갖거나 갖지 못하는 것이 존재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인간존재의 첫 사명 또는 종국적 사명이 얼굴을 찾는 일임을 드러냅니다. 그것은 인간이 참으로 존재하느냐, 참으로 사랑하느냐, 참으로 사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여기 이어서 손은 권능을 의미합니다. 존재하는 것이 행위하는지, 어떤 기능을 하는지는 그것이 실제로 존재함을 확증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얼굴을 지니고, 다시 손을 지닙니다. 종종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래(古來)로부터 어느 그림에 손이 덩그러니 그려 있다면 그건 곧 신 또는 신적 존재와 신의 ‘개입’(介入)을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신의 섭리(攝理).
그녀의 얼굴은 평화롭게 그리고 엄위롭게 자기 자리를 지니고 안식을 누리고 아름다움을 떨칩니다. 그녀의 손은 전통적인 남근숭배가 비추는 흰빛을 능가합니다. 이는 ‘세다’가 아니라 더 참되다는 겁니다. 더 센 건 뒤따르는 결과일 뿐입니다. 정액이 상징하는 재생산, 활력, 번성은 실은 의존적이며 자립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이의 손은 더 흽니다. 욕망을 거치거나, 욕망의 실행 즉 약취(掠取)를 수반하지 않습니다. 내것이 아닌 것을 빼앗아 갖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발생시키고 생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여신은 남신으로부터 제것을 되찾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손이 정액보다 더 희다는 말의 사실로서의 뜻입니다.
그이의 얼굴은 머리카락 침대 속에
한 자리에 꽃처럼 누워 있었고—
그이의 손은 성스러운 빛을 먹이는
정액보다 더 희었네.
Her tongue more tender than the tune
That totters in the leaves—
그이의 혀는 나뭇잎 사이에서
위태롭게 흐느끼는 가락보다도 더 여렸지—
(직역) 그녀의 혀는 나뭇잎들 속에서 비틀거리며 흔들리는 / 가락보다 더 부드러웠다—
이제 그이의 마법이 시작됩니다. “그녀의 혀”는 ‘더’ 부드럽습니다. 더 여립니다. 어떻게 여리냐?
나뭇잎들 사이에서 부스럭부스럭 아니 솨아아 하고 흔들립니다. 그 혀는 나뭇잎 사이에서 위태위태하게 흔들립니다. 그런데 선율은 melody가 아닙니다. tune입니다. 선율이라는 말이 맞긴 맞는데 멜로디와 혼동하게 된다는 점에서, 현대에는 멜로디가 그 자리를 꿰찼다는 점에서 적절치 않은 번역일 수 있습니다. 멜로디(melody)는 선형(線形)으로 시간선을 따라 전개되는 가락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구조적이고 예술적으로 조직된 것입니다. 작곡하고 분석하고 비평하는 형식적이며 미학적인 대상입니다. 추상적이고 이론적이지요.
그러나 튠(tune)은 다릅니다. 구체적이고 관습적이며 친숙하고 즉각적으로 알아차리는 것으로서 일상의 영역에 있습니다. 민요나 노래, 흥얼거림이 여기 해당합니다. 감각적이고 생활적인 용어입니다.
사실 이 두 낱말은 어원이 다릅니다. 튠은 라틴어 토누스(tonus)에서 온 말로, 고 프랑스어에서는 톤(ton)이었다고 합니다. 본래 의미는 <소리의 높이> 그리고 <조율>(調律)을 뜻합니다. 소리를 맞추는 일, 익숙한 가락을 흥얼거리는 걸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익숙한 가락을 흥얼걸리는 건 조율과 구분되는 행동이 아닙니다. 본질이 같습니다. 튜닝은 악기의 음높이를 정확하게 맞추는 일이고, 여러 악기의 조율은 동일하게 조율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익숙한 가락을 흥얼거린다는 말은 개인이 집단에, 저자가 따로 없는 작곡되지 않은, 집단 안에서 자연 발생한 것처럼 생겨나 퍼진 그 음율에 자신을 맞추는 일입니다. 우리는 조율을 통해 외떨어진 개인이 아니라 전체와 동조(同調)하며 하나가 됩니다.
멜로디는 그리스어 melōidía (melos = 노래 + ōidē = 노래하다)에서 기원합니다. 사람이 체감하는 가락보다는 음들의 질서, 조성, 구조, 형식을 가리킵니다. 고전 음악의 이론 전통과 직결하지요. 음악적으로 구성된 선율입니다. 음정이나 동기(動機, motif), 선율의 진행 등을 분석하고 비평하는 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튠은 멜로디 전체를 체험적으로 지칭하여 모든 튠은 멜로디이지만, 모든 멜로디가 튠이라고 불리지는 않습니다. 바람, 나뭇잎, 종소리, 새소리까지도 튠의 일부입니다. 우연히 들려오는 소리도, 흔들리는 소리의 감각도 모두 튠입니다.
멜로디는 그에 비하면 인간의 의식적 창작이며, 빈약하고, 형식적입니다. 그래도 아름답지요. 어쩌면 소리들의 배열이 갖는 정수를 뽑아낸 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수를 뽑아낸다는 건 앙상해진다는 것. 튠이 갖는 풍성함에 비하면 겨울나무처럼 비어 빈약합니다. 자연을 묘사하는 멜로디는 과잉된 추상이 되기 일쑤입니다.
이런 이유로 tune을 ‘선율’이라고 번역하는 건 지나치게 ‘작곡된’ 느낌을 줍니다. 멜로디가 머리로 이해하는 음악이라면 튠은 우리가 그것을 듣는 것, 몸이 기억하는 소리입니다. 나뭇잎이 비조직적으로 명확한 구조 없이 부비며 내는 소리를 ‘가락’으로 듣는 것은 내 몸입니다. 즉, 머리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겁니다.
신성의 표현 중 ‘혀’는 말씀의 힘이며, 들리는 것으로서, 얼굴과 손에서 한 발 더 나아갔고, 얼굴과 손과 더불어 하나의 신비, 삼위일체(三位一體, Τριάς, Trinitas)를 이룹니다. 얼굴이 참으로 존재함이요, 손이 참으로 활동함이라면, 혀는 그 신비가 수신자에게 전달되고 체득되어 참으로 실현됨입니다. 맨 마지막 자락에 있지만, 가장 높은 데 이르는 힘인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일을 해낸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혀는 니체가 배격한 바, 서구에서 남성이 약취해 간 변형된 그리스도교,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통치술로서 다듬고 변성시킨 그리스도교(동아시아에서 한나라가 유교를 그렇게 한 것처럼)처럼 질서정연한 인공의 아름다움 대신 어떻게 해도 아름다운, 아무리 어지럽게 피어나도, 어떤 규칙과 법도 없이 태어나도 아름답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그런 가락을 냅니다. 더 본래적이고, ‘말할 수 없는’ 말을 이 혀는 펼쳐내고 있는 것입니다. 잎사귀의 바스락거림처럼, 강하기보다 여리고, 그리하여 비로소 전적인, 배제되는 게 없는, 빠지거나 놓치는 게 없는. 존재했고, 존재할, 존재할 수 있는, 존재했을지 모르는 모든 소리가 이 혀에서 나옵니다. 이 혀는 지배하지 않고 해방시킵니다. 아니, 이미 해방되었다고 선언합니다. 경계를 지웁니다. 소멸.
그이의 얼굴은 머리카락 침대 속에
한 자리에 꽃처럼 누워 있었고—
그이의 손은 성스러운 빛을 먹이는
정액보다 더 희었네.
그이의 혀는 나뭇잎 사이에서
위태롭게 흐느끼는 선율보다도 더 여렸지—
Who hears may be incredulous
듣기만 한 이는 믿기 어려울지라도,
(직역) 듣는 이는 믿기 어려울지라도,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는 이것은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신비는 체험하여야 합니다.
아무도 신을 증명할 수 없듯이
누구도 그녀의 얼굴, 손, 혀를 전시할 수도 폭로할 수도 없습니다.
그녀 자신만이 자신을 폭로해 모두 앞에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녀를 만난 이, 직접 닿고 미치는 이들은 전부 믿습니다.
그대는 어느 쪽입니까.
그저 듣고만 있습니까?
보고 있습니까?
본다면 믿으면 그만입니다.
그만 의심을 거두십시오.
굳이 상처에 손가락을 찔러 넣겠다고(성 토마스)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직접 만지기 전에 믿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부활한 그리스도를 마주치자 곧바로 외쳤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그이의 얼굴은 머리카락 침대 속에
한 자리에 꽃처럼 누워 있었고—
그이의 손은 성스러운 빛을 먹이는
정액보다 더 희었네.
그이의 혀는 나뭇잎 사이에서
위태롭게 흐느끼는 선율보다도 더 여렸지지—
듣기만 한 이는 믿기 어려울지라도,
눈으로 본 이는 믿을 수밖에 없다네.
시인은 체험자입니다. 목격자이며, 체험자, 그리고 실은 당사자.
목격자, 증인은 믿는다는 것, 그렇게 결단한다는 게 아니라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Witness believes라고 말하지 않고
관계사 — Who 가 들어가고, 주어 — witness와 동사 — believe(s) 사이에 부호, 약속, 문법적 명령, 계명을 넣습니다. 이 형식은 다른 내용이 없기에 어떤 내용보다도 강력한 것입니다. 형식 자체가 내용이니까요. 변경할 수 없는 내용이 되는 것입니다. 이 빈, 그래서 꽉 찬 내용-형식은 여기서 쉼표(,)인데, 쉼표, 콤마(comma)는 그리스어 kómma (κόμμα)에서 나온 말로, 절단된 부분, ‘자른 조각’, 구간, 구획을 가리킵니다. 라틴어로 comma는 문법적으로 ‘문장의 짧은 구획’을 뜻하는데, 쉼표의 본래 의미는 ‘문장을 잠시 잘라 숨을 고르는 최소 단위’이고, 현대에 자리잡은 콤마, 쉼표는 문장 내부의 약한 분절을 표시하는 부호로서, 문법적 의미는 나연, 부연, 삽입을, 통사적으로는 ‘문장을 끝내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말해, ‘독립성을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멈추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거죠. 그래서 독립되지 않고 어딘가에 귀속됩니다. 그러나 약하게. 나연, 부연, 삽입을 [찍혀-있음으로써] 수행하고, [찍음으로써] 요청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이중의 장치는 목격자를 그 어느 누구든으로 만듭니다. anyone, anything. 그리고 목격자의 믿음에서 믿는다는 행위가 단순하게 목격자, 행위자에 속하여 단순 발생하지 않고, 마치 독립된 무엇인 것처럼, 그러나 정말로 독립성을 갖지는 않은 채 주어와 나란히, 마치 같은 종류, 같은 지위를 지닌 것들을 나열하듯 병렬하고 연속하여 제시됨으로써 반드시 일어날 일, 확실하게 일어난 일이 되게 합니다. 그러니까 그 어느 누구라도 바로 그 자리에 놓이면, 그 자리에 서면 반드시 그렇게 행동한다 즉, <목격자는 ‘반드시, 부득이하고 불가피하게’ ‘믿는다’>고 기술한 것입니다.
그대는 신비 안에서 뛰놀고 잠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작은 머리로 굳이 이해하려고 한다면
이제부터 영영 불면의 밤을 보내겠지요.
나는 그대를 안타까워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건 그대의 몫입니다.
그이의 얼굴은 머리카락 침대 속에
한 자리에 꽃처럼 누워 있었고—
그이의 손은 성스러운 빛을 먹이는
정액보다 더 희었네.
그이의 혀는 나뭇잎 사이에서
위태롭게 흐느끼는 선율보다도 더 연약했지—
듣기만 한 이는 믿기 어려울지라도,
눈으로 본 이는 믿을 수밖에 없다네.
그녀의 얼굴, 그녀의 손, 그녀의 혀.
얼굴과 손과 혀는 모두 신성(神性)의 상징입니다.
신성에 관한 말로 생각하는 까닭은 명료합니다. 에밀리는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Her를 항상 대문자로 시작합니다. 이 시 어디에도 소문자로 시작하는 her는 없습니다.
시에 쓰인 얼굴, 손, 혀. 이 상징들 앞의 ‘그분’은 항상 ‘His’ 즉, 남성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성이, ‘그이’가 나타났습니다.
‘그의’에 대항하여 ‘그녀’가 나왔거니와
저는 이항 대립(二項 對立) ‘그’ 또는 ‘그녀’ 대신 합하여 양쪽 모두를 가리킬 수 있고
양쪽 어디서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그이’로 바꾸어 썼습니다.
왜냐하면 에밀리가 “Her”라고 호칭할 때,
“His”에게 빼앗긴 여성의 신성, 여성의 존엄을 되찾으려 한 것이지
남성에게서는 신성을, 존엄을 모조리 박탈하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럽어에서 나머지 하나는 It 입니다. 탈성(脫性)은 없고, 성별 바깥도 없이
명사마다 성별을 붙인 나머지 남성이나 여성이 아니면 ‘중성’이고 맙니다. 그것 또한
나머지 성별을 ‘배제’하는 언어입니다.
아무튼 그럴 수 없으니 에밀리는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란 뜻으로 ‘Her’를 택해야 했을 겁니다.
그러나 한국어는 이 부분에서 자유롭습니다 — 혹은 모호합니다. 아니, 둘 다 아닙니다.
한국어는 이 부분에서 경계를 짓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든 남성일 수도 여성일 수도 있습니다.
간성(間性)도 있지만, 전부는 아닙니다.
대부분은 지정 성별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자유로운 말, 어디에 소속되지 않는 말로서 단지 가리킬 뿐인 지칭어 ‘그이’를 썼습니다.
조금 다르게 옮길 수도 있습니다. 더 좋은 번역이 있다면 얼마든지 바꾸어 주십시오.
그녀의 얼굴은 머리칼의 잠자리 속에 놓여 있었고,
구역의 꽃들처럼—
그녀의 손은
거룩한 빛을 기르는
정액보다도 더 희었으며.
그녀의 혀는
잎사귀 사이에서 비틀거리며 들려오는 가락보다도
더 부드러웠다—
듣는 이는 의심할지 모르나
보는 이는 믿게 된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