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 — 육화 또는 뫼비우스의 띠: ‘링’의 공포 해명 시론(試論)
영화 또는 소설 『링』을 본 분들 가운데, 갑자기 ‘뫼비우스의 띠’가 등장하는 데 의아할 분도 계실 겁니다.
그러나 장르 특성상 공포영화는 본래가 세계관을 비틀기에 적합하고,
상상력이 가장 크게 허용되는 영역이지요.
그런데 <링>의 경우는 그와는 좀 다르긴 합니다. 단지 공포의 효과에 기대지 않고
공포의 본질을 천착한 작품이다,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는 원작 소설 『링』, 『라센』, 『루프』 3부작이 순수하게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링>은 형이상학적 성찰과 틀이 강한 영화입니다.
물론 별다른 욕심 없이 그저 영화가 주는 순수한 공포만 만끽해도 손해 볼 건 없습니다.
그래도 이미 보신 분들을 겨냥해서, 또는 아직 안 봤어도 연달아 두 번은 볼 마음을 갖춘 분들을 위해서
생각할거리 하나 마련해보려 합니다.
<링>에서 공포의 원천은 ‘사다코’이지만, 단지 그것뿐이라면 색다를 게 없습니다.
영화의 공포는 사다코가 점점 더 구체적으로 몸을 획득해간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신은 인간의 살과 피를 취하는 육화(肉化, incarnation)로써
인류와 모든 피조물 — 즉, 몸을 가진 모든 존재를 구원합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사다코가 육화하는 것은 구원과는 반대, 반-구원(反-救援)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원작 3부작 가운데 <루프>를 제외한 두 편이 영화로 제작되었고, 그중 1편 격인 <링>은 <링 1>과 <링 2>로 나누어 제작되었습니다.
영화의 경우, <링 1.의 끝은 비디오 밖으로 사다코가 기어나오는 데서 끝나며
<링 2>에서 사다코는 요츠키던가요? 아무튼 어린 사내아이를 빌어 힘을 발휘합니다.
3부작의 2부격인 <라센>은 영화 말미에서 사다코가 미요의 자궁을 통해 직접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미요와 똑같지요.
그런가 하면 죽은 아이의 유전자로부터도 그 아이를 다시 만들어냅니다.
탄생과 복제의 묘한 엇갈림이지요. 그리고 항의하는 미요에게 그들은 말합니다, 사다코의 완전성을.
이제 태어난 인류가 병들지도 무능하지도 않다면서요.
영화화되지는 않았지만, 소설 삼부작의 마지막인 『루프』에서는 이제
사다코가 바이러스 형태로 사이버 공간을 잠식하고는 그 사용자들에게,
사실상 전 인류에게 침투하여 그들을 정체불명의 질병으로 죽게 하고,
바꾸어 말하자면, 온세상 사람들 모두를 또 다른 사다코로 대체해 버립니다.
(이 부분에서 반대의 해석도 가능하지만 이건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에 감춰두겠습니다.
막상 작품을 대하고서 다른 해석, 정반대의 해석을 정론으로 삼고 싶대도
스포일러를 감춘 정성만은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 <링 2>에서 사다코는 미요에게 말합니다. 왜 이 모든 일을 벌이는지에 대하여.
— “나의 공포를 온세상에 알리고 싶어서”.
이것이 사다코의 육화가 주는 무서움입니다.
성서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경우, 지상에서 하는 모든 일에서부터 그것이 자신의 일이 아니라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라 함으로써, 또 무엇이나 제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함으로써 자기중심성이란 근원적 부폐 원인을 제거하고 극복합니다.
그것이 극복인 이유는 자기실현의 좌절이 아니라 자기 실현을 초월하는 데 둠으로써
오히려 이룩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영화에서 사다코는 그와 사뭇 다릅니다.
자신의 공포를 전하려고 한다고 말했지만, 사실상 『라센』과 『루프』에서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는
사다코가 공포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복제’입니다. ‘획일화’이지요.
개성을 파괴하는 것은
그것이 아무리 열성을 제거하고 우성을 키우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 자체로 비극입니다.
그 참상 앞에서는 아무도 안전하지 않습니다. ‘강하다’는 것은 언제나 상대적이기 때문에
어쩌면 사다코는 자신보다 더 강력한 존재에 의해 다시금 대치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영화는 그 원인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것도 주지시킵니다.
애초에 남보다 좀 특별하던 소녀 사다코가 세상으로부터 내어쫓겨났을 뿐 아니라
그의 힘을 두려워한 아버지로부터도 버림받으니까요.
그리고 우물에서 30여 년간 죽지는 않고 실질적 무덤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의 몸은 죽음-묻힘-썩음의 과정 대신
묻히는 사건이 먼저 발생함으로써
‘몸의 숙명’의 기본 원칙, 순리를 역행하고 말았습니다. 도치(倒置). 잘못된 위치 변경.
사다코가 저지르는 일들도
또한 사다코에게 옛적에 행해진 일들도 모두 똑같이
‘다름’의 <배제>이고, ‘나(의 힘)’의 <군림>입니다.
가톨릭의 한 수도회인 작은형제회(Ordo Fratrum Minorum)는 1996년 문헌을 통해
현대 세계를 ‘이성’과 ‘생산’이 지배하는 세계로 인식하고,
그 속에서 자신들의 사명을 ‘배제’와 ‘군림’의 원리에 대항하는 것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저는 <링>을 보면서 그러한 소명의식의 정당성을 어느 만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어쨌건 공포의 근원은
“나는 그보다 약하고, 약하다는 것 하나만으로 나는 그에 의해 제거될 것이다.
세상에는 오직 그만이 남는다”라는 원초적 인식입니다.
우리는 사다코 앞에서 먹이가 되는 것이며, 사다코는 전부를 먹어치울 만큼, 비정상적인 포식자인 것입니다.
영화에서 ‘몸의 획득’이 갖는 비정상적 궤도에 덧붙여 이 영화는 ‘세계관’의 문제를 담고 있습니다.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고 마는,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는 도식도 ‘뫼비우스의 띠’이지만,
영화는 반복적으로 세계의 차원들을 넘나듭니다.
어떻게 인간의 사고가, 심지어 그가 죽어서까지도 비디오 테잎에 남는지,
비디오 테잎 속의 사건이 발전해서 어떻게 육체를 띤 인간에게 작용하고 죽음을 선사하는지,
어떻게 비디오 속 내지 염체(念體)에 불과한 이가 자궁 속에서 잉태되어 단시간에 다시 인간으로 나오는지,
그 인간이 또 어떻게 사이버 상에 침투하고, 사이버 상에 존재하다가 다시금 그 사용자, 접속자 전부에게 감염되어 자신을 복제해 가는지……<링>은
끝도 없이 우리가 단절되어 있고, 하나가 실상이라면, 다른 하나는 가상이라고 여기는 의식에 도전합니다.
그것이 또 하나의 공포의 축입니다.
경계가 희미해지고 무너지는 것.
사다코가 몸을 갖는다는 것이 가지는 이중성은
그것의 공간적 무제한성만이 아니라 이처럼
‘차원의 무제한성’도 갖는 것입니다.
심지어 영화 개봉 초기에 영화를 본 이들이 죽어간다는 소문이 돌았었는데,
<링>이 선사하는 공포의 본질을 반영한 현상이라 할 만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어디서도 안전하지 않다는 것, 심지어 무서운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듣지 않으려 할 수도 없다는 — 안전지대의 해체,
무장해제의 두려움인 것입니다.
도깨비 들린 사람을 옆에서 보면 아무도 없는데 혼자서 허공에서 씨름하다 기진하여 실성하거나 죽고 만다고 합니다.
어쩌면 <링>은 그런 영향력에 대해 말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사는 뭍과 달리 사다코는 물, 바다와 친숙하고,
공포는 계속 물의 이미지로 전염됩니다.
곧 우리가 숨쉴 수 없는 공간에서 숨쉬는 것이 우리를 모두
끌고들어가버리는 것입니다. 물귀신 이야기.
그러나 그것은 또한 공포의 한계도 말해줍니다.
공포란 효과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거기에 응답하여 함께 흔들리지 않는다면
아무런 물리적 힘도 발휘할 수 없을 겁니다.
공포는 그것이 물리적 힘을 갖도록, 나에 대한 지배권을 갖도록
스스로 내어주지 않는 이상, 무서움이나 비극으로 이끌기보다
폭력과 배제에 대한 성찰을 하게끔 우리를 이끌어 줄 것입니다.
몸을 갖는다는 주제의 변주를 보고 싶다면 오시이 마모루 감독 작품 <공각기동대>를,
또한 세계 간 차원의 전이에 대한, 뫼비우스적 세계에 대한 또다른 성찰을 바란다면
같은 감독의 작품 <아바론>이나 1999년 개봉한 영원한 신작 <매트릭스>를 보시기를 권합니다.
休
<링>을 말하는 건 단순히 공포영화를 말하는 것 이상입니다.
거기에 사람을 놀래키는 기술만 아니라
공포 또는 존재에 대한 깊은 이해가 도사리고 있어서이죠.
<링>이 무서운 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사다코에 진저리치는 건
그 어둠이나 형상 때문이 아닙니다.
그것이 끊임없이 허상을 실상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언젠가 <라센>에 이어 『루프』까지 <링>의 나머지 편들이 영화화된다면,
그것은 세계 전체의 암화(癌-化)라는 충격적인 그림을 보다 완벽하게 보여줄 거예요.
그리스도교의 예수는 ‘말씀’에서 ‘살’이 됨으로써 구원을 가져왔답니다.
그건 그가 타인을 위해 죽었기 때문이죠.
그러한 위타(爲他) 존재를 실현해보였기 때문에 ‘희망’이 되는 겁니다.
그러나 링 사다코는 ‘염력의 영상’에서 ‘살’이 됨으로써 공포를 가져옵니다.
까닭은 그가 자기를 위해 타인을 죽이고, 복제하기 때문입니다.
그건 우리 모두의 안에 담겨 있지만, 다행히 누구에게도
이를 실현할 힘이 없는
순수한 나르시즘의 극치입니다.
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