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웹툰 <데이빗>으로 살펴보는 작품과 독자의 상호 작용
2000년대 초 일부 포털 사이트들이 이용자 유입을 늘리기 위해 제공하기 시작한 웹툰 서비스는 지속적인 성장을 통해 오늘날 한국 문화 콘텐츠의 한 축을 담당하는 문화 산업으로 자리잡았다. 초기 웹툰은 종이책을 사거나 대여하지 않고도 인터넷으로 만화를 볼 수 있다는 물리적 접근성과 일상의 소재를 활용하여 짧고 공감이 쉽다는 심리적 접근성으로 인기를 끌었으나, 웹툰 시장이 성장함에 따라 여러 플랫폼에서 다양한 장르의 만화가 제공되면서 웹툰은 더 이상 종이책보다 보기 쉽다는 특성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또한 웹툰 형식의 만화가 대중화가 되어 독자적인 산업으로 성장한 지 10년도 훌쩍 넘은 시점에서 종이책과의 단순한 비교는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으며, 이제는 이전 산업과의 대조를 벗어나 웹툰만의 특징에 주목하여 작품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웹툰에서 주목해야 하는 특징은 바로 독자들 간의 감상 공유와 소통이다. 웹툰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플랫폼과 SNS는 ‘좋아요’로 대변되는 공감 기능을 활용하고 있으며, 공감 수는 게시물이나 콘텐츠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한다. 웹툰에서도 언젠가부터 ‘베스트 댓글’ 제도가 생겨나면서 독자들은 자신과 같은 작품을 본 독자들이 어떤 감상을 받았으며, 그중 어떤 의견이 많은 공감, 또는 비공감을 얻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오늘날 웹툰을 본다는 것은 작가가 그린 작품 그 자체를 보는 것과 더불어 같은 작품을 본 다른 독자들의 감상, 그중에서도 많은 공감을 받은 감상까지 읽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본 평론은 이러한 웹툰의 특성을 고려하여 작품을 독자의 반응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d몬 작가의 <데이빗>에서는 작품과 독자 간의 상호 작용이 독특한 양상으로 드러난다. <데이빗>은 돼지의 몸으로 태어나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존재 ‘데이빗’의 여정을 그린 웹툰으로, 독자들에게 그동안 생각해보지 못했던 문제들에 대한 깊은 사유를 요구하는 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는 첫 부분에서 작품을 여는 질문인 ‘사람은 무엇으로 정의하는가’와 같이 독자에 따라 생각하는 바가 다를 수밖에 없는 무거운 의문들을 반복해서 던진다. 따라서 <데이빗>의 독자 반응은 주인공의 처지에 공감하거나 악역을 비난하는 등의 표면적이고 감정적인 감상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작가가 던진 질문에 대한 고민과 대답의 형식을 띄기 때문에 매우 넓은 스펙트럼을 갖는다. 성인 인간과 비슷한 지능과 사고력, 그리고 언어 구사력을 가진 돼지의 인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어떤 이에게는 당연히 받아들여져야 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는 매우 불쾌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독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표출하고 접하며 사고를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데이빗>은 일정 분량으로 분할되어 기간을 두고 연재되며 해당 회차를 감상한 후에는 다른 독자들과 의견을 공유할 수 있다는 웹툰의 특징을 이용하여 독자들의 단계적인 사유를 유도하고, 서사의 진행에 따라서 질문들을 순서대로 하나 둘 내어 놓는다. 그리고 그 모든 질문들을 관통하는 단 하나의 문제는 데이빗이라는 세상에 없던 존재에 대한 합당한 정의를 찾는 일이다. 극 초반에서 독자들은 조지의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 후 자신이 사람이 아닌 돼지라는 사실을 알게 된 데이빗을 보고 생김새가 다르다는 이유로 데이빗이 인격체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약자를 괴롭히는 조지의 친구들과 현명하고 사람과 소통할 줄 아는 데이빗 중 누가 지성체인지, 허황되고 큰 꿈에 비해 능력이 없어 데이빗을 이용하려는 조지와 배려심 넘치고 자신을 아는 데이빗 중 누구를 인간으로 정의해야 하는지 고민한다. 그러나 이는 도덕성을 인간의 필수 요건으로 설정한 탓에 발생한 오류이다. 당장 뉴스만 틀어 보아도, 도덕과 윤리를 상실한 사람들은 차고 넘치지만 그들이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다. 슬프지만 도덕성은 인간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는 아니기 때문이다.
점점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독자들에게 작가는 ‘빅 요크’에 도착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환호를 받는 데이빗을 보여준다. ‘제 입장에서 말하는 거니 발을 들어주세요!’라 말하면서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말하는 돼지’로 희화화하며 기꺼이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던 데이빗은 캐서린에게 동물 취급을 받는 것에 만족하냐는 날카로운 질문을 받고,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까지 자신을 혼란을 야기하는 존재로 취급하는 현실에 충격을 받는다. 이 지점에서 독자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가장 많이 공감을 얻은 반응은 데이빗은 사람이 아닌 돼지라는 의견으로 만화 속 대중들과 동일하다. 그러나 지성과 인성을 갖춘 데이빗이 어째서 인간이 아니냐는 질문과 지성체가 인간의 동의어는 아니라는 의견, 데이빗은 돼지에게서 태어났으니 생물학적으로 인간일 수 없다는 주장과 인간의 정의를 생물학적인 기준에서만 적용할 수 있느냐는 반박도 찾아볼 수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 반응의 스펙트럼에서 확장이 일어나며, 어느 것 하나 절대적으로 맞거나 틀린 말이 없기에 결론은 쉽사리 한 방향으로 모이지 않는다.
데이빗은 말하는 돼지가 아닌 인간으로서 권리를 얻기 위해 조지를 떠나 캐서린과 인권단체에 합류하고, 이 부분에서 독자들도 여러 번 짚었던 소수자 문제가 직접적으로 언급된다. 이에 독자들은 과거 인간 대우를 받지 못했던 신분제도상의 천민, 유색 인종, 장애인 등을 생각할 때 데이빗 역시 차별을 당하는 소수자와 다를 바가 없다는 데까지 사유의 범위를 확장한다. 그러나 쉽게 결론을 내어 줄 생각이 없는 작가는 우리 앞에 한 층 더 복잡한 문제를 던진다. 데이빗이 캐서린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캐서린과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지는 꿈을 꾸는 장면에서 데이빗의 두 가지 욕망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하나는 인간 여성에 대한 욕망으로, 돼지인 데이빗의 성적 욕망은 암컷 돼지가 아닌 인간인 캐서린을 향하고 있다. 이는 이후 목사가 데이빗이 짐승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그에게 발정제를 놓고 암컷 돼지를 마주하게 한 상황에서 데이빗이 캐서린의 이름을 부르짖을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또 다른 욕망은 인간 육체에 대한 소유욕인데, 이는 데이빗이 자신에게 발굽이 아닌 손가락이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로써 데이빗은 지성도, 이성도, 감성도 아닌 욕망으로 자신의 인간성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이러한 데이빗이 욕망, 특히 캐서린을 향한 욕망이 드러난 부분에서 데이빗을 인간이라 주장해왔던 독자들조차 데이빗에게 거부감과 혐오감을 느꼈다고 시인한다. 데이빗은 생물학적 인간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인격체로서 권리를 인정받고 싶은 것이라며 인간도 돼지도 아닌 제 3의 존재로서 데이빗을 인정해 주자는 절충안을 제시했던 이들 역시 데이빗이 발굽이 아닌 손가락, 즉 인간의 육체를 욕망하는 장면에서 할 말을 잃고 만다. 이로써 데이빗은 여성의 몸을 한 남성, 남성의 몸을 한 여성인 트랜스 젠더처럼 돼지의 육체에 갇힌 인간이라는 사실이 자명해지는 동시에 독자들의 느끼는 거북함도 덩달아 커진다.
인간의 욕망을 가진 데이빗의 인간성을 더 이상 부정할 수도, 그렇다고 데이빗의 육체까지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어 혼란이 극에 달한 독자들에게 작가는 잠시 어려운 질문을 멈추고 정치 싸움이라는 사건을 전개하여 이야기의 긴장감을 높이다가, 발정 상태의 데이빗이 캐서린에게 고백하는 장면으로 극의 절정을 이끌어 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데이빗은 대중들에게 인간성을 입증하지만 캐서린의 끝내 데이빗의 마음을 거절한다. 그 어떤 사람보다, 심지어 데이빗보다도 먼저 데이빗을 한 명의 인간으로 인정하고 그가 인권을 획득하는 것에 도움을 주며 함께 성장한 캐서린은 결국 그를 떠나지만, 그 어떤 독자도 캐서린을 비난하지 않는다. 우리들 중 그 어떤 이도 돼지의 육체까지 사랑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한 명의 온전한 인간으로서 헌법과 모든 사람에게 인권을 인정받았지만, 가장 원했던 단 한 사람의 사랑을 얻지 못한 데이빗은 갖은 위기를 겪으며 얻어 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농장에서 떠나올 때 했던, 다시는 화물칸에 타지 않으리라는 결심마저 저버리고 식육돼지 무리에 섞여 기차에 몸을 싣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한 명의 남자로 인정받지 못한 것이 힘들게 얻어낸 인간의 삶마저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린 것이다. 도축장으로 흘러간 데이빗은 눈 먼 멱따개와 짧은 대화를 나누고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 삶을 마감하려 하지만, ‘사람’을 해칠까 두려워 늘 마음을 졸이며 살았다며 데이빗이 다가오는 것을 막는 멱따개에 데이빗은 새로운 결심을 한 듯 발걸음을 돌리고 막이 내려간다.
마지막 화가 끝난 후 독자들은 데이빗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외견을 극복하지 못한 캐서린, 그리고 이전의 다른 인물들과 멱따개를 비교하며 눈이 멀어 데이빗의 외모를 볼 수 없는 자만이 데이빗을 온전히 인간으로 대우해 주었다고 말한다. 한편 일부 독자들은 눈이 보이지 않냐는 데이빗의 질문에 멱따개는 완전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으며, 다가오는 데이빗을 가로막을 때에도 팔을 몸체가 낮은 데이빗이 있는 아래쪽으로 뻗었다는 사실을 들어 멱따개는 데이빗이 돼지의 육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를 한 명의 인간으로 받아들여 준 덕분에 데이빗이 비로소 모든 한계를 극복하였다는 주장을 설득력 있게 펼치기도 한다.
이로써 <데이빗>의 전반적인 내용과 함께 독자 반응을 함께 살펴보았는데, 작품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반응, 그리고 그 반응들이 모여 나타내는 현상 역시 비평의 대상으로 하는 본 평론에서 지적하고 싶은 몇몇 부분을 찾을 수 있었다. 많은 독자들이 감명을 받은 마지막 화에서도 ‘베스트 댓글’란의 해석만을 정답으로 보고 넘어가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었다. 애초에 데이빗이 아무런 위험 없이 안락하게 살 수 있었던 오두막을 떠나 빅 요크로 향한 이유가 무엇인가? 데이빗은 자신이 울타리에 갇힌 어미 돼지처럼 오두막에서만 살다 보면 자신의 존재 의미 또한 어미 돼지와 다를 바가 없어질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도망쳤다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사회를 구성하고 그 사회 안에서 구성원으로 인정을 받는 것을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사회적 동물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데이빗이 빅요크로 향한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 사회에서 함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권리, 즉 성원권(成員權; membership)을 획득하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데이빗은 투쟁을 통해 인권을 보장받는 인간으로 인정을 받음으로써 원래의 목적을 달성하였지만,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핵심적인 욕망인 사랑에 실패하고 망연자실하여 힘들게 얻은 성원권마저 포기하였다. 그런 데이빗 앞에 나타난 것(정확히는 데이빗이 간 것이지만)이 바로 멱따개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멱따개를 단순히 눈이 보이지 않아서, 또는 눈이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데이빗을 인간으로 온전히 인정하였기 때문에 데이빗의 한계 극복에 가장 궁극적인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상정한 채로 결말의 해석을 매듭짓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멱따개는 단순히 눈 먼 자가 아니라 눈이 멀었기 때문에 인간 사회에서 더불어 살 수 없는, 다시 말해 오두막의 데이빗과 마찬가지로 성원권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멱따개가 데이빗을 인간으로 대우한 것에 대한 해석은 대다수의 독자들이 생각한 것과는 반대로 데이빗이 인간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대상은 성원권이 없는 반쪽짜리 인간이 유일하다는, 오히려 데이빗의 한계를 공고히 하는 쪽으로도 가능하다.
또한 마지막화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받은 댓글(아버지, 아들내미. 서커스단장, 캐서린, 정치인 등등이 데이빗에게 인간적인 대우를 해줬으나 결국 돼지라는 외견을 극복하지 못함. 외견을 볼 수 없었던 저 도축업자만이 데이빗을 가장 인간처럼 대우해줌)은 멱따개가 앞서 나온 모든 인물들의 한계를 극복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지만, 자신을 여행자라고 소개한 데이빗과 잠시 말을 섞을 뿐인 멱따개와 돼지의 육체를 가진 이를 한 명의 남성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한 캐서린이 느끼는 무게와 부담은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캐서린이나 다른 누구도 데이빗이 그저 자신을 스쳐가는 존재라면 ‘우린 서로 다르지만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다 같은 사람’이라고 말을 해 주는 것을 그리 어렵게 느끼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의 독자 반응은 작가가 연출을 통해 어느 정도 의도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독자뿐만 아니라 작가 역시 인간은 자신과 밀접한 관련이 없는 대상에게는 쉽게 관대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 아닐까 싶다.
데이빗을 어느 부분까지 인간으로 인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에서 한 가지를 더 짚고 넘어갈 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캐서린이 데이빗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을 데이빗의 육체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다. 예를 들어, 한 이성애자가 이성의 동성애자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이 동성애자는 자신을 사랑하는 이성애자를 사랑할 수 없다. 그리고 이것은 성적 지향의 문제이기에 아무도 이 동성애자가 한계를 깨지 못했다고 하지 않고, 이 동성애자 역시 자신을 사랑하는 이성애자를 사랑할 수 없을 뿐이지 인간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데이빗이 캐서린을 사랑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캐서린은 돼지의 외형을 한 데이빗을 사랑하지 못하는 것 역시 캐서린이 데이빗을 온전한 인간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와는 다를 수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지향성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단순히 동족이라는 이유로 사랑이 가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굳이 동성애자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누군가를 한 명의 인간으로, 또 친구로 존중하는 것과 그에게서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것은 아주 다른 문제라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부분 역시 독자들로 하여금 캐서린은 데이빗의 육체를 극복하지 못하였고, 그로 인해 데이빗은 크게 상심했다고 생각하도록 작가가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캐서린이 데이빗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를 캐서린의 한계로 상정하고 그로 인해 데이빗이 어렵게 얻은 인권과 성원권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과 지향의 문제점을 지나치게 단순화시켰다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
오늘날의 웹툰은 작품과 독자, 그리고 독자와 독자 간의 상호작용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갖추고 있다. 고차원적인 질문들이 서사의 전개와 맞물리며 끊임없이 제공되고, 어쩌면 작품 자체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하나의 거대한 질문인 작품 <데이빗>은 그러한 현재의 웹툰 환경에서 작품이 가진 것 이상의 의미를 독자들과 함께 창출해 낸다. 그러나 공감 수를 기준으로 정렬되는 댓글에 의해 독자들은 자신의 머리로 직접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작품은 다채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잃기도 한다. ‘좋아요’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공감과 비공감 수가 곧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웹툰에서 공감 수를 많이 얻는 의견들은 사람들이 쉽게 동의할 수 있는 직관적인 반응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공감이 많은 댓글이 곧 해당 작품에 대한 ‘옳은’ 해석이라 여기고 무수한 대답이 나올 수 있는 질문에 대한 숙고 없이 감상을 끝내 버린다면, 작품은 입체성을 잃고 납작하게 눌려 버림과 동시에 작품 자체의 한계나 모순점까지도 간과해버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한 현상에 경계하며 다른 의견을 적극적으로 접하면서도 스스로 의문을 해결해보려는 노력과 함께 감상한다면, <데이빗>이야말로 차이가 너무나 쉽게 차별의 빌미가 되어 버리고 마는 혐오의 시대에서 공존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작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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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CAF 웹툰 평론 공모전에 제출했던 평론. 결과는 낙선이지만 나름 끙끙대며 쓴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