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 서평
2016년 한국사회가 봉착한 난관을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다양한 차원에서의 접근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이를 민주주의의 위기라는 측면에서 정리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대중들이 평등과 자유라는 근대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이어나가는 정치적 실천의 지속적인 과정이다. 이러한 정의 하에서 민주주의는 세 가지 특징적인 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첫째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시민(정치체에 대한 권리를 갖는 인간)이라는 ‘근대의 이상’을 신뢰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신뢰는 근원적으로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평등하며 자유롭다(그렇기 때문에 정치의 장에서 배제와 차별은 있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으로부터 기원한다. 둘째로 정치적 실천의 주체로 ‘대중들’이 선언된다는 점이다. 즉,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개인들은 외부에 존재하는 신이나 종교적 권위 내지는 폭력과 야만에 의거해서가 아니라 대중들 스스로의 집단적인 정치적 행위를 통해 차별로부터 해방될 권리를 담보한다. 셋째로 민주주의는 고정된 정체가 아니라 각종 배제와 차별의 원칙들에 끊임없이 맞서는 ‘과정’으로만 나타날 수 있다. 모든 차별과 억압이 사라진 유토피아는 현실화될 수 없기에 근대의 이상을 신뢰하는 대중들의 실천 역시도 부단히 지속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한 번 완성되고 나면 반영구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차별과 억압에 저항하는 봉기와 봉기를 제도화하고 문명화하는 헌정 속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발리바르 2010; 발리바르 2014).
그렇다면 민주주의의 위기란 무엇을 말하는가? 한국사회에서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은 인간이 갖는 시민성이 다각적으로 위협받고 있음을 의미한다. 첫째로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에서 ‘사람은 평등하지 않다’는, 즉 근대의 이상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다. 오늘날 유행하는 ‘자기계발 담론’은 경쟁 사회 속에서 더 높은 지위를 획득하고 자신의 ‘가치’를 확대하고자 하는 신자유주의의 자기-경영적 주체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사람들은 스스로를 하나의 수익성을 갖는 ‘자본’으로 생각하게 된다(요시유키 2014). 인간이 ‘시민’ 아닌 ‘인적자본’으로 대체되면서 인간의 가치는 평등한 것이 아니라 (인적자본론에 따르면 ‘자신이 투자한 노력만큼 보상받는’) 수익성(소득)에 따라 계층화되고 철저하게 위계가 나뉜 것으로 인식된다. 특히 한국의 경우에는 대학 서열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오찬호 2013).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는 여성혐오(misogyny) 현상을 통해서도 뚜렷하게 드러난다. 남성중심적인 인터넷문화에서 여성들은 차별을 받아 마땅한 대상으로 취급되었다(김수아 2015)⑴. 특히 경제위기 이후 저성장이 심화되면서 패권적 남성성의 수행이 어려워지고 남성들이 자신들의 경험세계 안에서 경험하는 ‘차별’⑵이 확대됨에 따라 ‘역차별’이라는 이름 아래 이러한 차별이 용인되는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이처럼 인터넷과 더불어 사회 전반에 만연한 여성에 대한 차별적인 인식은 ‘여성이 나를 무시해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 용의자의 살인동기를 통해서 가장 노골적이고 폭력적인 형태로 드러나고 말았다. 이처럼 차별과 폭력이 ‘당연시’ 되는 사회에서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을 말소하고자 하는 극단적 폭력이 횡행하게 되고, 따라서 정치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발리바르 2012). 정치가 불가능한 것이 되었을 때 민주주의도 정지할 수밖에 없다.
둘째로 물질적인 측면에서 대중들의 생계가 불안정해지면서 시민으로서의 정치적 역량이 축소되고 있다. 당장의 생계유지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서민들이 각종 정책과 복잡다단한 제도들에 신경을 쓰고 숙고를 하여 정치적 결정을 내리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보다 각종 정보들을 수집하고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구체적인 정치적 의사결정을 내리는 과정에는 다소간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이와 같은 전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 개인들이 높은 비용(예컨대 높은 등록금, 긴 학습시간 등)을 지불해야하며 공교육에서는 정치적 중립성을 명분으로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함구한다는 문제가 뒤따르게 된다. 결국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함께 경제적 하층에 위치한 대중들의 정치적 역량은 위협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이러한 경제적 불평등으로부터 파생된 정치적 역량의 불균형을 이용해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려는 보수주의적 지배 전략이다. ‘대안’ 내지 ‘변화’라는 수사는 현 질서에 적응하기에도 벅찬 서민층의 불안감을 증대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실제로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진보의 수사를 역이용하여 변화는 현재의 불안정성을 강화할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효과적으로 현 상황을 정당화한다(허시먼 2010).
셋째로 자기계발 담론과 불안정한 삶으로 인해서 경쟁이 심화되다보니 파편화된 개인들이 등장하게 된다. 파편화된 개인들은 집단적 행위로서의 정치에 대한 혐오를 강하게 드러낸다. 특히 이러한 모습은 보수적인 성향의 대형 인터넷 커뮤니티인 ‘일간베스트 저장소’를 통해서 뚜렷하게 포착되는데 일베에서는 소위 ‘친목질’을 방지하고 정치적 ‘선동’을 막는다는 명목 하에서 개인들의 연결이 철저하게 해체된 모습을 보여준다(위형석 2013). 이렇게 강화된 탈정치화는 결국 개인이 누리는 권리의 유지·확장은 대중들의 정치적 실천 과정에 의해서만 담보될 수 있다는 민주주의적 원칙을 소실시킨다.
그런데 도대체 ‘민주주의의 위기’를 논하는 것이 “한국 자본주의의 전환과 신자유주의적 구조의 형성 과정을 종합적으로 보여주려고”(지주형, 2011, p.10, 이하 쪽수 표시는 전부 같은 책) 시도하는 『한국 신자유주의의 기원과 형성』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이에 대해 필자는 책의 논지를 빌려와 민주주의의 위기야말로 신자유주의의 형성 및 운동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음을 보임으로써 답하고자 한다.
정치적 역량을 말소시키는 물질적인 궁핍화와 불평등은 신자유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첫째로 신자유주의는 금융위기와 위기가 만들어낸 부담의 불평등한 분배를 통해 경제적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기본적으로 자본주의는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⑶ 신자유주의는 그 특성상 금융위기의 위험성을 확대함으로써 경제적 불평등을 더욱 극적으로 확대하게 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금융자유화가 가진 “카지노 자본주의(casino capitalism)”(p.60)적인 속성에 의한 것이다. 금융자산을 평가하는 자본화 지표는 자본주의 세계체계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지닌 국제기구들에 의해서 다소 자의적으로 결정되며, 특히 단기수익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투기를 조장한다. 투기가 과열됨에 따라서 자산평가의 거품을 만들어내는 내재적 원인⑷이 촉진되고 이 취약성으로부터 금융위기가 발생하게 된다. 이렇게 발생한 금융위기는 IMF와 같은 최종대부자에 의한 구조조정과 함께 새로운 자본축적의 원동력으로 탈바꿈하게 되는데, 이때 구조조정 과정에서 금융위기의 부담과 비용이 제도와 시장 환경에 따라 불평등하게 전가된다는 점이 중요하다. 거대한 금융기업은 국가의 지원을 통해 구제되지만 소위 경제호황기의 거품에 편승하여 양산된 부실기업은 전부 도산의 위기에 처하게 된다. 또한 금융위기로 경제가 침체기에 접어들게 되면 대형기업에서도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하게 된다. 따라서 금융위기의 타격을 버텨내기 힘든 중소기업 자본가, 영세자영업자,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서민층에게 그 부담과 피해가 오롯이 돌아가게 되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나라에서는 1987년 전환기를 기점으로 이러한 모순이 심화되었다. 권위주의 독재세력을 몰아내면서 “국가의 권위주의적인 ‘시장’ 개입에 대한 지식인과 대중의 비판”(p.129)이 거세졌고 이로 인해 금융부문의 자율화는 더욱 급속도로 팽창되었지만, 결과적으로 권위주의 독재세력이 키워낸 재벌들에 대해서는 개혁의 칼날이 빗겨나갔던 것이다. 이는 결국 “통치되지 않는 재벌 주도 체제”(p.161)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또한 금융부문의 자율화에 있어서도 자본유출을 고려하지 않은 채 단기외자도입을 자유화하는 등 “관리되지 않은 개방”(p.143)이 이뤄지면서 “위기관리의 위기”(p.153), 즉 이러한 금융위기에 적절히 대처하고 사후관리를 수행하는 제도적 대응책을 만드는 데에 있어서의 치명적인 실패가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 해체되지 않은 재벌의 독점적 영향력과 관리되지 않은 성급한 자본시장 개방은 서로 맞물리며 1997년 외환위기와 IMF의 엄혹한 구조조정이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재벌⑸은 다른 재벌을 흡수하며 몸집을 불리며(예컨대, 현대-자동차그룹) 위기에 따른 부문 분할을 축적의 기회로 전유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절대다수의 한국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의 여파로 실업자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평생직장’의 소멸, 노동유연화에 따른 불안정한 생계가 겹치면서 현실적 존재조건이 취약해진 대중들의 위기의식이 고취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의식은 언제든 이데올로기적 공세와 만나 보수적 정치편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둘째로 금융자산의 평가를 내리는 방식에 있어서 단기수익성이 중심에 놓이게 됨에 따라 두 가지 효과가 발생했다. 우선 고용을 창출하는 실물분야의 투자가 둔화되었다. 실물투자는 비교적 큰 비용을 들인 연구개발 사업을 필요로 할 뿐만 아니라 이익이 장기간에 걸쳐 실현되며 그 실현가능성도 불투명하다는 한계를 안고 있어 단기수익성의 측면에서 보기엔 부적절하다. 그나마 이러한 실물투자의 위험부담은 개발독재 시기에는 국가에 의한 보조금과 차관을 통해 뒷받침이 되었지만 1980년대 말부터 점차 신자유주의가 도입되고 재벌을 보호하는 보조금이 줄어들자 실물투자가 축소되고 말았다. 재벌들의 실물투자 축소는 곧 취업경쟁의 극대화를 불러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실업을 극복하기 위한 개인(주로 청년세대)의 투자와 노력이 자기계발을 강조하는 사회현실과 맞물리면서 신자유주의적 자기-경영주체가 탄생하게 된다.⑹
셋째로 노동유연화에 따른 노동시장의 이중화로 노동조합이 약화되었다. 여기에 보수주의 정부는 “노동운동을 불법적이고 폭력적인 집단이기주의로 규정하는 법적, 행정적,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동원함으로써 중산층이 노동운동에 등을 돌리게 하는 ‘헤게모니적 배제’ 전략”(p.127)을 도입함으로써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강제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였다. 이는 위기의 비용을 전부 노동자들에게 떠넘기기 위한 정치적 프로젝트였다. 앞서 살펴본 두 가지 측면(고용축소와 고용불안정)에 의해서 극단적인 폭력들이 촉진된다. 가장 두드러지는 폭력적 현상이 앞서 거론한 여성혐오이다. 한국의 상황에서 신자유주의적 노동유연화와 불안정성은 남성성을 지탱하는 ‘남성 생계부양자 모델’의 수행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특히 여기에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경험과 반공주의와 경직된 위계질서로 점철된 군대문화라는 한국적인 맥락이 더해지면서 폭력에 호소해 남성성의 복원을 시도하는 ‘제3세계 식민지 초남성성’이 강력하게 발현되는 구조적 조건이 형성되게 된다(정희진 2013).
넷째로 중산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는 탈을 쓴 채 권위주의적 정치를 되풀이하는 “인기영합적 권위주의(populist authoritarianism)”(p.128)나 “지역감정 등에 의존한 이데올로기적 설득”(p.126)이 도입되면서 권위주의 개발독재 이후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던 ‘성장의 과실을 분배하라’는 요구나 ‘사회적 정의와 개혁을 실현하라’는 요구가 왜곡된 형태로 우회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자신의 계급적 이익 내지 현실적 존재조건과 무관하게 기존의 지배질서를 지지하는 정치적 왜곡이 발생하였고, 그리고 동시에 청년세대를 중심으로 정치참여가 삶의 어떠한 측면도 바꾸지 못한다는 정치적 무력감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는 탈정치화, 탈이념화를 부추겼으며 결국 청년세대의 정치참여가 저조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신자유주의는 분명 ‘민주주의의 얼굴’을 하고 등장했다. 신자유주의의 이상은 국가의 지배와 교란으로부터 자유롭게 시장과 사적재산을 통해 자신의 개성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더구나 개발독재와 권위주의 하에서 신음하던 한국 사회에는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이상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김재익 前 청와대 경제수석의 “시장경제의 활성화와 자유화가 한국의 민주화를 앞당길 것이라는 신념”(p.113)⑺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은 안타깝게도 신자유주의화가 정반대의 결과로, 즉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극단적 폭력을 부추기고 시민성의 물질적 조건을 파괴하는 형태로 치닫고 말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더불어서 신자유주의를 실현하는 과정은 그것이 내세웠던 ‘국가의 축소와 시장의 확대’라는 표어와 정반대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과 금융자유화, 금융기관에 대한 보장,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 등을 요청했다는 사실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정치경제적 권력의 상위에 위치한 이들에 의해 하위에 위치한 이들 일방적으로 부담과 폭력에 노출되는 불평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었으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초래한 근본적인 측면이었다.
또 하나 중요하게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이러한 고찰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관점이 갖는 중요한 한계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프로이센과 초기 독일제국의 전근대적인 권위주의와 바이마르 공화국의 근대적인 자유민주주의, 히틀러의 반동적인 민족주의적 전체주의, 탈근대적인 초현실주의적 문화 예술이 뒤섞인 1935년의 바이마르 공화국을 설명하기 위해 이 개념을 도입하였다. 그러나 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은 명백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바로 그러한 비동시성들이 맺고 있는 필연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겉보기에 ‘상이해 보이는 역사적 시간들’은 사실은 근본적인 모순의 층위(이데올로기, 생산양식)에서 적절하게 요청되고 결합된다.
예컨대 한국 민주주의의 저발전은 일견 전근대에 귀속된 것으로, 근대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시간과는 다른 층위에 놓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정치경제적 모순의 층위에서 파악할 때 (자본주의의 ‘최신 버전’인) 신자유주의에 내재된 자연스러운 결말임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는 기본적으로 “재산권의 극대화를 위한 제도와 실천의 집합체”(p.10)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이 정의는 짤막하지만 실로 중요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 재산권의 극대화란 1원당 한 표가 지배하는 영역으로서의 시장논리가 확대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매키언, 2009)⑻. 이는 필연적으로 1인당 한 표가 할당되는(즉, 정치적으로 대등한 시민을 가정하는) 민주주의와 상충하는 부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소위 말하는 시장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의 불편한 동거로 만들어진 ‘자유민주주의’가 ‘배태된 자유주의’의 단계를 넘어서 통제되지 않는 자본과 자유시장을 예찬하는 신자유주의에 이르렀을 때, 그 모순이 파열하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동시에 민주주의의 원칙들이 제한되었을 때에만(ex. 노동운동의 탄압)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수월하게 행해질 수 있었던 것도 필연적인 사실이다.
결국 우리는 이러한 인식 속에서 ‘전근대’ 상황에 놓여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를 해결하는 것이 ‘정치의 시간’ 속에서 단독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게 아님을 알게 된다. 즉, 자유시장경제와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의 시간을 그대로 둔 채 민주주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은 한 발로 직립보행을 할 수 있다는 말만큼이나 허황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대안을 제시해야 할까? 재벌 중심의 체제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이 시기⑼에 우리는 어떤 변화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필자는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재벌의 이익을 위해 현재의 불평등을 옹호하는 보수주의 우파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정치적 논의가 가능한 장을 열어야 한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오늘날 우파 이데올로기의 가장 큰 모순은 박정희로 대변되는 '국가주의-보수주의-개발독재'라는 자본주의의 옛 패러다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작업과 다른 한 축에서 김재익으로 대변되는 '질서자유주의-신보수주의-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새 패러다임을 실질적으로 도입하는 작업이 다소 모순적으로 결합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⑽ 이 둘이 모순적이면서도 결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오늘날 자본의 이윤을 담보하기 위해서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이 필요한데, 이 개혁을 담보하기 위한 정치권력은 (대중들을 설득하기 위한) 과거에 대한 미화와 왜곡으로부터 기인할 수밖에 없다는 모순적 상황 때문이다. 또한 이 둘이 모순적으로 결합하면서 신자유주의도 그 본질과는 다르게 왜곡되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시장에 대한 독점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경제적 비효율성에 노출된 재벌 체제는 그대로 두면서 노동에 대한 유연화만 지나치게 강조되는 '불평등을 더 극단으로 밀어붙이는 신자유주의' 모델이 등장하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열과 균열, 내부모순을 감추는 도구로서 동원되는 것은 이승만-박정희-전두환에 걸쳐 일관되게 나타나는 '반공주의'이다. 이는 앞선 모순을 시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세계경제의 변화에 따라 공산화를 막고 자본주의 체제(소위 시장에서의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대응이라는 차원에서 긍정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준다. 이에 따라 반기득권 세력을 공산주의자와 아울러 지칭하는 '종북'이라는 말이 우파의 담론에서 특권적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가 분명해진다. 그 말이야말로 보수주의 이데올로기의 균열 바로 위에 놓인 차폐막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들춰버리고 났을 때 보수주의 세력을 일관된 정치적 집단으로 유지시켜줄 바탕이란 재벌과 그에 봉사하는 관리자 계층의 특수이익이라는 협소한 지평(다시 말해,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확산력을 갖추지 못한 것) 뿐이다. 그러나 반공주의조차도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공산주의에 대한 대중들의 왜곡된 인식에 입각한 공포를 바탕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결국 이러한 공포와 편견이 점점 축소되고 지배층의 균열이 가속화될수록 피억압계층으로서의 대중들은 지금껏 그들을 억압해온 보수주의 세력에게 공포의 대상이 될 것이다. 결국 반공주의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의견이 다르다는 이유로 대상을 정치체에서 축출하려는 극단적 폭력을 넘어설 때 대안의 가능성, 즉 민주주의적 정치는 그 회생의 첫 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⑴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개인의 문제를 성(gender) 자체에 귀속시키는 ‘OO녀’ 담론이 유행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한국 여성들에 대한 ‘김치녀’라는 멸칭은 여성혐오 현상을 가장 노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⑵ 예컨대, 비정규직 노동시장에 해당하는 파트타임(아르바이트) 시장에서 여성들이 우대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것은 파트타임 일자리를 구하려는 남성의 입장에서 차별로 느껴질 수 있지만, 거시적인 차원에서는 남성의 경제활동참여율이 여성의 경제활동참여율에 비해 더 높고 정규직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 또한 임금, 사내 차별 등 각종 지표에서도 남성은 여성에 비해 노동시장에서 더 나은 조건들을 누리고 있다. 이는 개인이 좁은 경험세계를 통해 전체 사회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식적 왜곡이라는 점에서 알튀세르가 정의하는 이데올로기의 정의에 부합한다.
⑶ 마르크스 경제학의 경우에는 이를 ‘잉여가치론’에 입각한 착취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피케티의 경우에는 자본소득 증가율이 노동소득 증가율을 항상 앞질러왔음을 강조하며 자본주의의 내재적 동인에 의해 불평등은 심화되어 왔다고 분석한다(류동민·주상영 2015)
⑷ 이 메커니즘에 대해서는 책의 103-104쪽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이를 요약하자면 신용대출로 인해 금융상품의 가격 상승과 수요 상승이 같이 담보되고 이것이 거품을 낳는다. 그러나 실제 수익증가는 그 수익의 기반이 되는 피착취계급의 각종 한계로 인해 거품의 증가속도를 따라잡기 못하게 되며 필연적으로 거품이 붕괴하며 자산을 처분해도 부채를 갚을 수 없는 부채-디플레이션이 발생한다. (이 외에도 하비(2014)의 p.247-269, 뒤메닐·레비(2014)의 p.183-205 참조)
⑸ 특히 2016년 현재 저성장 국면에서 그나마 성장세를 이어나가고 있는 소위 ‘범4대그룹’(현대, 삼성, LG, SK)이 IMF 구조조정 당시에도 특혜, 즉 “자율적 구조조정”(p.285)을 보장받는 위치에 있었던 5대 재벌(현대, 삼성, 대우, LG, SK)에 속한다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이 중에서 대우는 기업어음과 회사채에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부채상환 독촉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함으로써 무너지게 되지만 나머지는 충실하게 구조조정을 통해 김대중 정부와의 정치-경제적 교환을 성사시킴으로써 다소간 회생하게 된다.
⑹ 이러한 자기경영주체를 매개하는 가장 중요한 틀은 대학의 서열이라고 앞서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대학은 신자유주의적 재편을 거치며 시장수요에 맞는 노동력(다른 표현으로는 ‘인적자본’의 확충)을 인증하고 육성하는 역할로 변화한다(레비도, 2009). 이 과정에서 정작 대학이 갖는 대안지식과 (시민성을 포갈하는) 인간성의 확보는 도외시(ex. 인문학 구조조정)되고 만다.
⑺ 한국의 前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이자 前 대통령 경제수석을 맡았던 故 김재익의 신념이자 하이에크와 같은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의 신봉자들이 갖는 믿음이기도 했다. 국가의 시장개입을 최대한 줄이고 개인들의 선호가 반영되는 투명한 시장을 구축하기 위한 제도적 보완을 늘려나가면 다양한 개인의 선호와 지향을 온전히 공존하는 민주적 사회가 구축되리라는 믿음이다.
⑻ 이 외에도 ‘제도와 실천’이라는 말은 푸코나 알튀세르가 지적하듯이 ‘법’과 ‘규율’을 통해 움직이는 이데올로기적 주체화 양상과도 맞닿는 부분이다. 이에 대해서는 사토 요시유키(2014)의 논의를 참고.
⑼ 경향비즈 2016년 5월 28일자 기사 “재벌부터 알바까지, 모조리 위기인 한국경제”
⑽ 즉, 개발독재가 낳은 재벌과 경제성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바로 그 재벌과 경제성장이 낳은 경제적 비효율성(ex. 지역불균형 발전, 재벌체제의 비효율성 등)과 독재와 국가통제(계획경제적 요소들)를 ‘노예의 길’이라고까지 부르며 비판하는 신자유주의적 개혁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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