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과호흡은 갑자기 오지 않았다.

몸이 먼저 알았다,

by 노엘




내가 걱정이라는 걸 해본 적이 있나?


생각해 보면 그렇게 걱정을 조마조마하게 했던 날이 어릴 때 시험결과 나오는 날 정도였던 것 같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적도 없었고 걱정거리를 만들지 말자라는 개똥철학도 없었다.

그렇다고 큰 중심이 있지도 않았지만은 나는 대체로 무던하고 털털한 편이었다.


누구나 그렇듯 내 상처가 더 크게 보이고 내 아픔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하고 내 눈물만 아깝게 흐르는 화학반응인 양

세상을 냉소적이고 회의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럴 때조차 나는 그 감정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그 외로움을 즐겼다.


남편이 아무리 자신의 불안을 통제하기 위해 내게 툴툴거리고 통제적인 말투를 쓴다 한들 내게는 ‘왜 저래’로 끝나는 일이었다.


몸이 무너지던 어느 날이었던 것 같다.


둘째 아이는 생각만큼 잘 생기지 않았다. 둘째를 만나기까지 많은 시간과 기도가 필요했다. 그때까지도 나는 내 신체가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워져가고 있다는

인간적인 세월을 자각하고 있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간절한 아이였으니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두 번의 유산을 겪고 나서야 나는 내 몸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두 걸음 못 떼고서 다리가 풀려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나는 그대로 엉엉 울어버렸다.

파리한 얼굴에 아무도 없는 집에서 겨우 챙겨 먹은 끼니를 치우고 침실로 돌아가는 계단이 그리 힘든 여정이 될 거라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슬프기도 했지만 이유 없는 짜증도 솟구쳤다. 그냥 아무 이유가 없었다. (후에 우연히 어느 책에서 유산의 부작용이 짜증이라는 걸 알았다.)


때는 코로나가 창궐하여 영국은 lock down 상태였고 우린 새 집 단지에 이사 온 사람들이라 주위의 이웃도, 친구도 볼 수 없었고 심지어 교회도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는 시기였다.


누워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남편이 준비해 준 식사를 마치면 다시 누워있는 게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온몸의 관절이 너무 아팠고 무엇보다 아이를 두 번이나 잃은 마음의 상처가 너무나 컸다.


두 번 다 임신초기에 유산이 됐다.

첫 번째는, 아기집에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고 자연스레 하혈로 배출이 되어 임신이 종료되었다.

두 번째는, 불안해서 찾은 사설 산부인과 초음파에서 아기집, 난황에, 아주 작은 생명도 보았다. 하지만 점점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있다는 소노그라퍼의 소견을 들었고

기적을 바라며 기다리던 끝에 결국 소파술로 아이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소파술을 하고 회복실로 옮겨졌을 때 나와 같은 아픔을 나누기 위한 단체가 주는 선물이라며 간호사는 작은 박스꾸러미를 내밀었다.

그 상자 안엔 위로의 편지와 크로셰로 만들어진 작은 손인형들과 물망초(forget me not) 씨앗이 들어있었다.

나는 그 상자를 열자마자 간호사 앞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직업이지만 어찌 되었든 내 아픔을 짧게나마 위로해 준 그녀가 고마워 간식을 건네고 퇴원했던 기억이 난다.


집에서 나는 그야말로 짐이 된 기분이었다.

첫째 아이는 너무 예쁜 나이 3살이었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라 고사리 같은 손으로 엄마의 눈물을 닦아주었지만

아이에게 씩씩한 엄마로 기억되고 싶었기에 울지 않으려 노력했다.


‘엄마는 진짜 우리 로이 동생 많이 기다렸는데 하나님께서 동생을 너무 많이 사랑하시나 봐. 더 곁에 두고 싶으셔서 작별인사를 길게 하시나 봐 ‘


예쁜 아이와 뛰어놀지 못하는 내 몸뚱이도 너무나 싫었다. 언제나 체력장에서 1등급을 놓치지 않았던, 남자아이들과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는 운동신경을 자랑하던 내가

이렇게나 쓸모없이 누워지내야만 한다는 생각에 서러웠다.


남편은 남편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나를 위로했다.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하는 것, 그야말로 행동으로 보여주는 남편의 사랑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의 말없는 돌봄이 고마우면서도 이렇게 힘들 때 감정 한 조각조차 나누어 주지 못하는 남편의 ’ 어쩔 수 없다’는 심리구조가 미웠다.


그때부터 나는 그의 감정 한 조각을 애달프게 바랐던 것 같다.

어느 전래동화처럼 감나무에 감 떨어지길 입 벌리고 기다리는 듯이.


기다리다, 기다리다 감사하게도 둘째를 만나고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구체적인 지시 없이 그의 감정 한 조각을 받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안아달라고 해야만 안아주었다. 주물러 달라고 해야 주물러 주었다. 굳은 표정으로..

그게 남자의 언어라 해도, 남편의 최선이었을지라도 같은 아픔 속에서 같은 마음이길 어떻게든 우겨서라도 받아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크고 작게 터진 상처가 쌓여 터진 내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던 남편은 힘겨운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지인을 통해 상담사를 추천받았다.

외마디 협박 아닌 협박과 함께.


‘나랑 이혼할래, 아니면 상담받을래?

만약 이혼한다면 내가 가진 모든 인맥을 동원해서 친권 양육권 다 가져갈 거고, 여보는 지금까지 모은 돈 다 가져가. 그게 싫으면 상담받아’


그때부터 내가 찾기 시작했던 건 ‘숨통’이었다. 절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