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무도 안전하지 않던 집
어릴 때부터 나는 유독 엄마에게서 잘 떨어지지 못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였던가, 집에 돌아오면 불이 꺼져있는 단칸방이 그리 외롭게 느껴졌다. 나는 집안 어딘가에 있는 사진 꾸러미를 꺼내서 사진 속 엄마를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시간이 되면 엄마가 돌아올 걸 알면서도 내겐 무언가 먹먹하게 사무치는 그리움이 느껴졌다.
나는 그 길로 두 살 어린 여동생 손을 잡고 엄마를 찾아 나섰다.
어떻게 알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엄마의 회사를 찾아간 적도 있었고, 그대로 하염없이 울면서 집 앞 담벼락에 붙어서 엄마가 올 때까지 운 적도 있었다.
매일을 서럽게 우는 통에 엄마는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지나 자연스럽게 크면서 나는 엄마의 품을 벗어나게 되었고 엄마도 다시 직장을 다니셨다.
그때 내 모습은 당연히 많이 변해있었다. 누구보다 독립적이었고 늘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7시 즈음되면 엄마가 오셨는데 나는 그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나는 엄마랑 저녁을 먹으며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늘어놓았다. 학교에서 있던 일, 친구 이야기…
마치 어린 빨간 머리 앤이 마릴라에게 재잘거렸던 것처럼. 여느 중학생과 다름없는 평범한 소녀였다.
그러나 내 마음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도 재잘거림을 타고 왔다.
엄마는 늘 피곤해했고 내가 혼자 떠들 때면 멍하게 어딘가를 응시했다. 딴생각을 하는 듯 한 날도 많았다.
엄마가 내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생각이 든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 엄마를 깨우는 날에는 끝에 비난이 꽂혔다.
“엄마, 내 얘기 듣고 있어?”
“(소리 지르며) 엄마 지금 너무 피곤해! 넌 왜 그렇게 눈치가 없어?”
상처가 됐다. 서운했다.
나는 내가 엄마 말처럼 눈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지만 엄마는 하루 종일 일하고 와서 피곤할 거야.
나를 사랑하고, 나랑 대화하고 싶지만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내가 삐질 일은 아니지, 엄마랑 안 보고 살 것도 아닌데 뭐, 그깟 이런 일로.’
어린 나는 나름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했다.
여전히 혼자 재잘댔지만 반응을 바라지 않아도 내 마음엔 늘 상처가 남았다.
‘조용히 좀 해! 왜 이렇게 눈치가 없어? 너 때문에 힘들어 죽겠어!’
‘너만 없으면 우리 집 조용해! 소리 지를 일이 없어!‘
이유 없이, 맥락 없이 꽂히는 상처에 대체 왜 그러냐 묻는 내 물음을 뒤로 엄마는 고성을 토해내며
내 탓만 계속 늘어놓을 뿐이었다.
날이 갈수록 엄마의 비난과 언어폭력은 심해졌다. 밖에서 받은 모든 스트레스를 나에게 푸는 것 같았다.
지나가다가 바지가게에서 바지를 구경하고 있었고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엄마는 갑자기 화를 냈다.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대체 왜 그러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반박하는 날엔 나를 때렸는데,
키도 힘도 비슷해진 내가 엄마의 폭력을 막을 수 있게 되자 엄마는 아빠를 동원해서 나를 때리게 시켰다.
아빠는 나와 아무 언쟁이 없었지만 아빠는 엄마에게 버릇없이 대든다며 나를 인정사정없이 때렸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이상해 보였다. 얌전히 티비를 보고 있던 아빠는 마치 나를 때릴 정당한 이유를 만들어서 스스로 화가 난 상태를 만든 다음 나를 때리는 것 같았다.
아빠가 그렇게 불을 붙이는 시도를 하면 타이밍 적절하게 엄마는 ‘쟤 오늘 아주 작살 내버려!’라고 바람을 불어주는 것 같았다.
그런 이질적인 과정이 내 눈에 보일 정도로 나는 왜 맞아야 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부모가 우주였던 소녀에게 원망의 마음도 결국은,
‘엄마 아빠는 나를 사랑해. 근데 엄마 아빠도 어렵게 자랐고 사랑 못 받아봐서 그런 거야.
그렇다고 엄마 아빠랑 인연 끊고 살 것도 아닌데 뭐.‘
또 반복.
내 마음은 성할 날이 없었지만 엄마는 이미 당연한 듯이 나를 감정 쓰레기통으로 사용했고
악의적이진 않았어도 내 털털한 성격을 이용한 것 같이 보였다.
‘너는 그게 장점이야. 5분도 안 돼서 툭 털어내고 풀리잖아. 동생과 다르게 꿍하고 있지 않고 말이야.’
나는 바보같이 그런 내 성격을 자랑스러워했고 다시 깨발랄로 돌아왔다.
그 어느 누구도 내가 이런 상처를 갖고 있다는 것도 상상 못 할 만큼 나는 밝았다.
억지로 밝은 척을 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회복 탄력성이 꽤 좋았던 어릴 적에나 통하는 이야기라는 것도 곧 알게 되었다.
어른이 되어서부터는 밝은 내 모습을 뒤로 아픔이 보일 때도 실컷 자유롭게 아파해보지 못한 티가 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씻을 때나 이불을 뒤집어쓰고 숨죽여 울었다. 소리 내 우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울지 마! 넌 아기였을 때부터 너무 울었어! 엄마 죽으라고 울어?’
시간이 지나 엄마가 갱년기 여서 더 그랬을 것이라는 강한 추측이 생겼어도
정말이지, 단 한 번 부모와 대화해 본 기억 없이 세차게 맞고 자란 내 가슴은 이미 퍼런색이었다.
그래도 난 바보 같이 웃었다. 엄마는 헤프게 웃는다며 그렇게 웃고 다니지 말라고 했어도.
고작 내 생존방법이 웃으며 버티는 거라니, 너무 바보 같아 보여 싫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어릴 적 나의 웃음이 아픔을 가리는 데 사용되었었다면 지금은 단단함의 상징이 되었으니.
그 시작은 내 마음에 처음 들린 음성이었다.
‘넌 누구보다 강해, 내가 널 그렇게 만들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