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무도 안전하지 않던 집
나는 눈치가 없었다. 새하얀 도화지 같이 맑고 순수했다. 이런 어린 시절 보내고 있는 중에도 나는 잘 웃었고 해맑았다.
그게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성정이었다. 하지만 사람은 좋은 것과 나쁜 것이 나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뒤죽박죽 덕지덕지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중 한 단 면이 유달리 남보다 해맑고 긍정적인 나였다.
계속 웃다 보니 눈웃음이 생겼다. 최근에야 알았지만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에게 하프 스마일을 권한다고 한다.
웃고 싶지 않아도 입꼬리를 올리는 연습을 시키는 거라고.
그러다 보면 점점 나아진다는 것이다. 그 얘기를 듣고 내가 어릴 적부터 습관적으로 하프스마일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게 나의 생존 방법이었다는 걸.
생명의 생존 본능은 그런 거였다.
아파도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감출 수 있는 능력, 그게 내 진짜 모습인 양 취할 수 있는 보호색도 될 수 있는.
가만히 웃든, 털털하게 웃든, 어쨌든 잘 웃는 건 내가 친구를 사귈 수 있고 인기가 많을 수 있는 이유가 되었다.
내가 마음을 열고 웃음 가면 속의 나를 오픈하면 친구들은 나를 멀리할 것만 같았다.
당당하고 잘 웃는 모습으로 나를 만나 친구 했는데 사기당한 듯 우울한 내 모습에 놀랄 것만 같았다.
그땐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내가 스스로 우울한 나를 싫어했던 것 같다.
아직도 기억난다.
중학교는 남녀공학이었고 너무 재미있게 보냈다. 졸업하는 날까지도 시끌벅적 재밌게 삼삼오오 모여 우린 그 시절을 즐겼다.
운동을 잘했던 나는 방과 후에 축구하는 남자애들 사이에 껴서 같이 축구도하고
가무에도 능했던 지라 학예회나 축제날이 되면 당연하게 무대에 올랐다. 나는 학교에서 그야말로 인싸였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전혀 달랐다. 여고를 갔는데 예민하고 까탈스러운 여학생들의 집단이었다.
입학날부터 교실뒤를 점령한, 소위 좀 나간다는 애들이 들어오는 아이들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하고 있었다.
이때는 두드러지게 성별의 차이가 보였다. 여자애들은 누구나 단짝이 있었다. 같이 화장실도 가고 뭘 해도 같이 붙어 다녔다.
수학여행을 가도 단짝과 앉는 건 당연지사였다. 하지만 나는 단짝이 없었다. 굳이 왜 화장실을 같이 가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두루두루 잘 어울렸던 편이라 수학여행 버스 옆자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그냥 남는 자리에 앉아도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나는 나대로 잘 지냈고 오히려 이 아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루는 같이 놀던 친구들 셋넷이 모여서 아무 말도 안 하고 화난 표정으로 서있는 걸 봤다.
그 친구들은 다 같은 반이었고 나만 옆반으로 떨어져 있어 대체 무슨 영문으로 화가 난 것 같아 보이는지를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진짜, 너는 왜 그렇게 눈치가 없냐?’
엄마한테 늘 듣던 말을 친구에게 들었을 때 나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곧장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 구석 나무그루터기에 앉아 엉엉 울었다.
그때 어린 내가 받아들인 눈치의 정의는 이랬다.
“밝지 않을 때는 침묵”.
머리가 크고 정말 어른이 되었어도 사람들은 그 정의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정의가 관계에서의 연결감을 원하는 나를 가끔은 미치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우울할 때도 있어주고 싶었다.
그 안에 나를 끼어주지 않으면 덜 중요한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 도망갈수록 나는 쫓아갔다.
나에게 눈치는 그런 것이었다.
또 상처에서 피어난 키우기 어려운 꽃.
또.
내가 얼마나 밝은 아이 었던지 집에서 눈치 없다는 소리가 듣기 싫어 입을 닫는 날엔 짙은 한숨소리와 함께
또 고성이 꽂혔다. 엄마를 신경 쓰이게 한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고 했다.
이래나 저래나 동네 북 신세에 눈치는 내게 너무 어려운 과제였다.
나는 나대로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배울 곳을 찾는 제대로 ‘주변인’이었다.
그런 내가 문제였을까.
사랑스럽던 학창 시절의 내가 안쓰러워 안아주고 싶은 날엔 그날의 눈빛이 떠오른다.
어찌할 바를 몰라 흔들리던 소녀의 갈 곳 잃은 눈동자.
지금이라도 실컷 말해주고 있다. 어린 내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울어도 돼, 엉엉 울어버려,
넌 절대 혼자가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