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아무도 안전하지 않았던 집
모든 게 비정상처럼 보였다.
너무나 억울했다.
이유 없는 짜증과 엄마의 윽박소리에 대든 나의 대사는 거의 이랬다.
“엄마, 내가 대체 뭘 잘못했어? 내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 말한 게 잘못이야?
사랑해 달라고 말한 게 잘못이야? “
나는 계속 같은 말을 해왔다.
어떻게든 트집을 잡는 것처럼 엄마는 나를 못살게 굴었다.
나는 엄마를 이해하려 애썼다.
오해가 될 만한 상황이었으면 일일이 설명했다.
형태도 바꾸어보았다. 차분하게도 말해보고, 울면서도 말해보고, 애원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하면 상대의 감정이 덜어질까 싶어 미안하다고 먼저 말해보기도 하고…
이 전략이 잘못되었던 걸까?
남편도 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난 할 만큼 했어! 그만해!” 말하곤 늘 나가버리기 일쑤였다.
시간이 갈수록 다 소용없었지만 나는 참 나에게 미안한 습관을 갖게 되었다.
나보다 타인이 우선이 되는 역효과가 자리 잡은 것이었다.
결국 세상을 건강하게 제대로 배운 적 없는 내가 배운 건 빠르게 사람들의 감정을 읽고 적응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이해했다. 거기에 나는 없었다.
나의 공감은 그들에게 주는 감정 한 조각이었지만 나는 없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나중에 먹어야 할 위시리스트에 넣어두고 타인을 주인공의 자리에 세웠다.
나는 착하고 재밌는 사람이 되었다. 작은 말투도, 눈빛도 셜록이 된 듯 다 읽혔다.
사람들은 그런 나를 좋아했다. 누군들 좋아하지 않을 수 있으랴, 싱글싱글 웃으며 티 없이 해맑고 친절하게 나를 맞춰주는 사람을.
그게 나의 최선이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어 몇 달치 월급을 모아 아껴두었던 돈도
친구들의 약속을 거절하지 못해 모임에 써버리고 나를 달랬다. ’ 에이, 그거 없이도 지금까지 잘 살았는데 뭐.‘.
그렇게 내가 지워져 가는 줄도 모르고.
설명을 해도 지워졌고, 맞춰 살아도 나는 지워졌다.
지워지는 아이러니한 안팎의 삶에 밤마다 눈물이 흘렀다.
하프 스마일을 하며 나는 나를 달랬다.
“왜 울어? 웃어봐, 넌 웃는 게 예뻐. 울지 마. 네가 뭐가 부족해? 다들 잘 지내잖아. “
사람에게 기대하는 삶은 최후가 없이 비참했다.
상대가 가족일지라도.
내가 옳은 말을 하면 맞는 말이라고 인정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엄마도 아빠도 남편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답이 있지도 않았다.
마치 문제없는 문제집의 해설집을 만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왜 나는 그토록 설명해야 했을까.
성경은 일말의 비유적인 표현 없이 단박에 나를 이해시켰다. (마 10:36-38)
그때서야 나는 깨달았다.
내가 붙들고 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상,
나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그 자리에 세우는 것, 그것이었다.
30년 동안 내가 만든 해설집은 표현만 다를 뿐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 나 좀 사랑해 줘”
이윽고 설명을 멈추고 해설집도 불태웠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 빈가슴을 부여잡고 크게 울었다.
처음으로 실오라기하나 가려지지 않은 완벽한 나를 마주하고 상처를 다독였다.
’왜 울어?‘ 가 아닌,
‘울어도 돼’,
‘일어나’가 아닌,
‘그래도 돼, 넌 게으르지 않아’,
‘웃어’가 아닌,
‘말하지 않아도 돼’,
‘내가 이랬다면 달라졌을까..’가 아닌,
‘넌 최선을 다했어’.
자각이 시작될 무렵 그분이 내게 처음 말씀하셨던 음성이 사실임을 고백한다.
“이리 와서 쉬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