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그치는 말투 앞에서 멈춰버리는 시간

03 관계 안에서 사라지는 나

by 노엘




사람은 누구나 우위를 점하고 싶어 한다.

자신을 높여주길 원하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들이 끊임없이 불쑥거린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아이들과 십 대들의 따돌림이 유치하고 미성숙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행하고 있는 모습들은 아이들의 미성숙함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이것을 많이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바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


고성과 비웃음, 그리고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듣기 싫다는 태도는 상대를 제압하는 태도일 뿐 아니라

유치한 소극적 공격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많은 어른들이 이 같은 태도를 ‘화’라고 부르며

자신의 감정을 정당화한다.


어른들이 같은 미성숙한 행동을 했는 데도 불구하고 비교적 덜 미성숙해 보이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복잡하고 정교하고 그럴듯한 말로 메꿀 수 있게 커버린 것은 아닐까.

이런 관점에서 육체의 성장이란 참으로 유익이 없는 것 같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남편과 1여 년간의 부부상담에서 얻은 건 그의 본성이 완전히 드러나게 된 것이었다.

그는 참아왔던 분노와 화를 이때다 싶어 기다려온 사람처럼 터뜨렸고

‘지금까지 이해가지 않았는데 참아왔다, 맞춰왔다, 내가 얼마나 죽고 싶었는지 아냐’며 답답함을 과격하게 토로했다.


그의 귀엔, 그의 눈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알지 못했던 진실이 왜곡되고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 삼는데 상담사의 권위만큼 넉넉한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상담에서 얻은 회복의 열쇠가 무거웠는지 열쇠는 바닥에 버려둔 채,

자신의 마음의 문을 열어 미성숙함을 탈탈탈 털어내기 시작했다.


내 욕을 친한 친구도 아닌데 한 두 번 만난 사람에게 하고 다니고

교회에서도 기도해 달라는 명목으로 우리 얘길 하고 다니며

내가 그 모임에 참석하기를 바랐다.


물론 악의는 없었다.

정서나이 유아기라는 상담사의 따끔한 직면이 있었음에도 그는 당당히 말했다.


‘거봐, 내가 우리 애들보다 정서나이가 어릴 수도 있어. 그러니 나한테 잘해줘야지. 안 그래?

어린애한테 소리 지르고 계속 말하면 알아듣겠어?‘


수치심이나 창피함 대신 그의 눈엔 거짓 당당함과 공허가 깊어 보였다.


상담사가 연 그의 내부는 철저하게 엉망이었다.

그의 내부를 어떻게 손봐야 할지 몰랐던 걸까, 결국, 상담은 남편의 내부를 깊이 드러낸 채 멈춰 섰다.

마치 개복은 되었지만 아직 봉합되지 않은 상태처럼 느껴졌다.


남편은 더더욱 난폭해졌다. 별다른 말이 아닌 대도 자신의 귀에 거슬리면 다그쳤다.

어린아이가 엄마(상담사)를 갑자기 잃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만큼 그는 상담사를 의지하면서도 상담사가 하라는 대로 말하고 행동했지만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을 적용했다.

그에게 분별은 너무나 어렵고 복잡했다.


나는 그 구조를 오래전부터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설명할수록, 이상하게도 나는 더 작아지는 느낌이었다.

잘은 모르겠으나 상담사라는 전문가는 11년간 함께한 아내의 관찰력은 참고일 뿐 자신이 알아본 일이 진실이라 믿는 것 같이 느껴졌다.

나는 바보 같게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당사자이지만 상담사는 객관성을 갖고 바라볼 수 있는 자리이기에.

객관적인 심리검사를 진행했을 때 나는 흔히 말하는 안정형의 성향이 누구보다 강했다.

상담사는 그런 내 검사 결과를 보고 예상과는 너무나 반대라서 놀랐다고 했다. 그만큼 상담사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상담사가 갑자기 부재한 그 자리엔 너무나 큰 자국이 파였고

남편은 그 길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폭주했다.


또 억울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았다.

머리로는.


모든 일이 그렇듯 머리에서 마음으로의 길이 가장 멀다지만 내겐 지름길이 필요했다.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었지만 매달려도 해결해 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여기는 영국이다.


완벽한 광야에서 완벽하게 매장당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소리를 질러도 메아리조차 돌아오지 않는 곳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만난 처음, 무슨 기도든지 다 들어주셨던 응답들은 달콤한 은혜의 시간이라 여겨졌다.

하지만 지금 만난 문제 앞에 나는 자꾸 작아졌고 내 시야를 가렸고 하늘을 보면 넓어지다가도 또 가려지고를 반복했다.

더 이상 은혜의 시간이라고 생각이 들지 않았다.


우는 것 밖에 할 수 없어 밤마다 차에서 광광울며 기도했다.

그 시간이 내가 유일하게 숨 쉴 수 있는 시간이며 나를 찾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인가 숨을 퉤 뱉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첫째 아이가 말했다.

“엄마 요새 좋은 일 있어? 요새 좋은 일 있는 거 같은데.. 엄마 작년에는 갑자기 안 웃다가 요즘 다시 잘 웃어.”


그가 내 기도에 응답하심으로.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 (시편 34:4)


보고 있냐고, 왜 가만히 계시냐고,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고 어기장을 부리며

고성기도를 한 내 앞에 길을 내신 건 하나님,


상황이 변하지 않았음에도 내가 숨 쉴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길인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게 나의 회복의 시작이라는 걸.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