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시간 속으로 12화
10년 전, 서연과 만나기로 약속한 비 오는 날, 선우는 누군가에게 계속 쫓기고 있었다.
"학생! 선우 학생! 난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잠깐! 잠깐만 거기 좀 서봐요. 선우 학생 아버님이 보자고 하십니다!"
선우는 계속 도망치다가 세게 넘어져, 손에서 피가 많이 났다. 그래도 다시 일어나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몇 분 후에야, 쫓아오던 이를 가까스로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학교 근처 횡단보도 앞, 저 멀리 연보랏빛 비옷을 입은 서연이 보인다. 건너편에 서있는 아름다운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선우는 안도감이 느껴지고 왠지 살 것 같다. 녹색불이 켜지자마자, 선우는 단숨에 횡단보도를 건너 서연에게 다가갔다.
"하아.. 후우.. 서연아 미안해. 오다가 일이 좀 있었어."
"......"
서연은 뾰로퉁한 표정으로 대꾸조차 하기 싫은 듯 입을 꼭 다물고 있다.
"서연아, 화 풀어! 늦어서 정말 미안해. 내가 오늘 아님 안된다고, 무조건 나오라고 그래놓고선. 비오는데 여기 서있느라 너 많이 춥고 힘들었겠다. 그래도 한번만 봐주라, 응?"
두 손을 기도하듯 모으는 선우를 보고 마음이 조금 풀어진 듯 선우에게 눈길을 준 순간, 서연은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선우의 손에 난 심한 상처,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피!
***
미대 출신 유명 배우였던 선우의 엄마, 차희재는 정상의 자리에 있을 때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스물 일곱, '만인의 연인'이었던 아름다운 그녀의 갑작스런 은퇴 소식에 많은 팬들은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사실, 그녀는 LS그룹 장남 김성민의 첫사랑이자 유일한 사랑이었다. 그러나 성민은 집안 어른들의 뜻대로 대호그룹의 장녀 성준희와 정략결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결코 희재를 포기할 수는 없었기에, 그는 희재에게 그의 숨겨진 연인으로 살아줄 것을 부탁하며 남부러울 것 없는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그런 현실이 너무도 비참하고 서글펐지만 바로 뒤돌아서 그를 떠나기엔, 희재 역시 성민을 너무도 사랑했다.
***
"읍! 우욱, 우우욱!"
희재는 밥 냄새에 갑자기 속이 메슥거려 손으로 급히 입을 막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먹은 것도 별로 없는데 한참 전에 먹은 물까지 다 토해내고 나서야 겨우 속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기진맥진해서 결국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축하합니다! 임신 4개월째 접어드네요. 초음파 보시면 자 여기, 아기집에 자리도 잘 잡았죠? 이제 아기 심장소리 들어보세요. 아주 건강합니다."
산부인과 진료실에서 나오는 희재의 눈에서 굵은 눈물 방울이 툭 떨어진다.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졌는데 아무에게도 축하받을 수 없는 현실에 하염없이 눈물이 흐른다.
***
어느 날 갑자기, 성민 몰래 자취를 감춘 그녀는, 도미하여 선우를 낳았다. 얼굴이 알려진 그녀였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이의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끝까지 비밀로 하고 싶었다. 그 대단한 집안에서 알게 되는 날에는, 아이는 세상 빛조차 못보거나, 태어나더라도 빼앗길 게 분명해보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에서의 삶도 결코 녹록치는 않았다. 영어도 서툴렀고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수중에 갖고있던 돈을 다 들고 갔어도 그걸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연예계로 돌아가긴 죽기보다 싫었기에, 식당 설거지 같은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지만 아무리 수수하고 허름한 차림을 해도 그녀의 미모는 어디서나 빛이 났다. 미모 때문에 홀서빙이나 좀더 편한 일자리를 얻기도 했지만 툭하면 손님들에게 성희롱을 당하기 일쑤였고 간혹 사장이나 매니저가 그녀의 몸을 탐하려 할 때면 겁에 질려 도망치기도 여러 번이었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도, 힘들 때 의지가 되어줄 사람도, 희재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홀로 선우를 낳은 걸 후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이는 커갈수록 그녀가 사랑했던 성민을 꼭 빼닮아서 때로는 그의 분신처럼, 때로는 두 사람 사랑의 살아있는 징표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타국에서의 고단한 삶도 마다치 않는, 그녀 자신의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삶에도 적응이 될 무렵, 그 일만 없었더라면 희재는 한국으로 절대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 희재 씨? 영화배우 차희재 씨 맞죠?"
다니던 교회에 새로 온 신자 중에, 한국 연예지 전문기자였던 이가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고 그걸 감지한 희재는 10살 된 선우를 데리고 도망치듯 급히 귀국했다.
희재의 사정을 아는 친한 선배의 소개로, 수도권 어느 중소도시의 한 미술입시학원 강사 자리를 소개받아, 당장 모자의 생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녀는 미국에서 모은 돈으로 작은 전셋집을 얻어, 그렇게 또 다시 낯선 곳에서의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
3선을 노리고 국회의원에 출마한 김성민 의원은, 선거 운동기간 중이라 차로 이동하는 시간이 많았다.
"한기사, 잠깐만! 잠깐 차 좀 세워보게."
그가 탄 고급 세단 창밖으로 우연히 스쳐지나가는 여인의 모습! 꿈에도 그리던 희재, 분명 그녀였다.
세월이 많이 흘렀고 여배우다운 차림새도 아니었지만 고운 옆모습 하며 아직도 가녀린 몸매가 그대로였다.
"난 여기서 내려 유세장으로 갈 테니, 저 여자분 뒤를 좀 밟아주겠나? 어디 사는지, 아니면 일하는 곳이라도 꼭 알아봐주게. 더 조사가 필요하면 최비서한테 미리 얘기해두고. 알겠나?"
"네. 의원님."
그렇게 희재의 뒤를 밟도록 하고 뒷조사를 시켜서 김의원은 선우의 존재까지 알게 되었다. 다시 가슴이 뛴다. 미안함만 가득 남은 옛사랑과의 재회도 설레이는 일이었지만...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에도 그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아내 성준희와의 사이에서 10년 넘도록 아이가 안생기자.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를 택한 성민!
사회적 지위에 어울리게끔, 또한 정치적 명망을 쌓을 목적으로, 이들 부부는 후원하던 고아원에서 딸 둘을 입양해서 키웠다. 그의 아내는 철저히 대중에게 보여주기식으로 사는 여자였다. 그녀는 카메라 밖에선 딸들에게 냉랭했지만 성민은 그 아이들을 항상 사랑으로 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이기 이전에 대기업의 후계자인 그에겐, 아들이 하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늘 있었다. 동생 성준에겐 고등학생 아들이 있어서, 자칫하면 후계 문제로 LS그룹 내에서의 자기 입지가 흔들릴 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자신의 유일한 혈육인 선우가 4대째 S대에 들어간 재원이라는 것도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역시 내 아들!'이라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힘들게 혼자 선우를 낳아 잘 키워준 희재에 대한 고마움에 김의원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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