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지 안 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오래간만에 합격소식

내 인생 어디로 갈지 나도 몰라

by 노랑연두

회사 그만둔 뒤로 뭐 하나 붙잡지 못하고 글도 썼다가 악기연습도 했다 그림도 그렸다가 이력서도 썼다 그러는 중인데.. 오래간만에 합격 소식을 들어서 글을 남겨본다.


일단 재작년 말부터 혼자 음대 입시를 준비해 봤었다. 대단한 음악가가 되겠다 이런 건 아니었고 어차피 대학학비 공짜이니 교수한테 공짜 레슨이나 받자는 심산에서 시작한 것.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플루트를 배우기 시작해서 꽤 오래 악기를 했다. 전공을 했다거나 30년 넘게 안 쉬고 쭉 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항상 내 인생의 반려악기, 나의 분신처럼 생각했기에 좀 더 잘하고 싶다는 마음은 늘 있었다.


그래서 재작년 말 두 개의 학부과정과 한 개의 석사 과정에 지원하고는 연습을 시작했더랬다. 학부과정은 시대별로 3 곡을 준비해야 했고 석사과정은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1번 1, 2악장과 폴랑 플루트소나타 2악장을 피콜로부는 것 그리고 그 외에 3개의 엄청 어려운 오케스트라곡 엑섭(발췌)을 3개나 해야 했더랬다. 석사는 피콜로도 없고 엑섭도 너무 어려워서 지정곡을 다 못 냈고 학사는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1번에 폴랑 플루트소나타 2악장, 그리고 초등학교때 했던 아를르의 여인 미뉴에트를 들고 들어갔더랬다. 결과는 모두 대기번호도 없는 불합격.


될 거라는 기대도 크지 않았지만 막상 결과를 받아 드니 앞으로 뭐를 해야 하는지 막막했다. 재수, 휴학이란 것도 한 번도 안 해본 체 학교- 회사만 전전했던 나에게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란 너무 힘든 일이었기 때문. 그래서 찾다가 고등학교 나온 애들이 대학 전에 다니는 2년짜리 음악학교를 찾아서 지원했더랬다. 할 수 있는 모든 악기를 다 선보이래서 플루트에 피아노에 바이올린에 기타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 영상까지 보냈고 학교에 가서 오디션도 봤더랬다. 플루트를 불고 나니 피아노도 치래서 치는데 우와.. 피아노가 완전 엉망인 거다. 조율을 언제 한 건지 왼손을 치는데 계속 징징 울리는데 신경 쓰여서 칠 수가 없을 정도. 결국 합격은 했는데, 오픈하우스 때 본 졸업예정자들의 수준 이하의 실력과 열악한 시설, 수학여행 같은 것도 간다는 공지에 현타가 와서 포기했다. 왕립음악원 수업에 자리를 받은 것도 한몫했고.


어쨌든 왕립음악원에서 수업 들으면서 작년 말 또다시 모차르트 플루트 협주곡 1번 연습에 돌입했다. 원래는 전년도처럼 학사 두 개 석사 하나를 넣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석사 곡들은 내 수준을 넘어서서 지원 철회를 했고 학사만 진행했더랬다. 전년보다 더 나아진 게 맞는지 의심스러워 중간중간 현타가 좀 왔지만 어쨌든 계속 연습을 했다. 나머지 두곡은 챗지피티의 도움을 받아 바흐와 폴랑 소나타 1악장으로 정해 연습을 하고 영상을 보냈다. 한 곳은 그걸로 끝이고 다른 하나는 그거보고 1차 선발해서 실기랑 필기를 다시 보는데 작년에 엄청 못 봐서 자격 미달이 나왔더랬다. 이번에도 실기와 필기 모두 부족한 실력이지만 그나마도 잘 발휘하진 못 해서 꽤나 우울했었다.


아무튼 오늘, 영상만으로 뽑았던 학교의 입시 결과가 나왔다. 이주 전쯤 전산 오류로 결과가 잘못 노출되었지만 3월 말에 진짜 결과가 나올 거라는 메시지가 왔던 학교이다. 뒤늦게 사이트 들어갔을 때는 결과 없이 오디션 점수가 800점 만점에 800점이라고 써져 있어서 이것도 오류인가 했는데 오늘 보니 그게 맞았는지 합격이란다.


거리도 멀고 네임벨류도 떨어지는 학교라서 갈지 안 갈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작년보다는” 성장했구나 싶어 조금 대견하다.


아직 결과가 안 나온 학교가 좋은 데인데.. 실기도 필기도 만족스럽게 못 본 탓에 자신이 없다. 여긴 1차 합격자 발표가 4월 중순인데 과연.. 이번에는 자격미달을 벗어나서 대기번호를 받을 수 있을는지.. 만에 하나 하늘이 도와서 합격한다고 한다면 거기를 다니는 게 내 인생에서 맞는 선택 인지.. 솔직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루정도는 플루트 실력이 스웨덴 지방대 음대는 들어갈 수 있을 만큼이라고 인정받았다는 걸 대견해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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