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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벅스 Oct 07. 2022

린다의 손님과 객

린다 시리즈 삶에도 손님과 객은 찾아온다.

 아이들이 유치원과 초등학교 다닐 때 꼬마 손님들이 집에 자주 놀러 왔었다. 그들이 오면 나는 웃음 띤 얼굴로 ‘어서 와’를 말하고 달라고 하지 않아도 먹을 것을 주었다. 맛있게 먹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났었다. 언제든 와도 된다고 생각했던 반가운 손님들이었다.      


 저고리 입고 호롱불로 방을 밝히는 사극 드라마를 보면 이런 장면이 나온다. 어두운 저녁 인적이 드문 인가에 주인장을 부르며 묻는다. 지나가는 객인데 하룻밤 묵어갈 수 있냐고. 대부분은 누추하지만 재워준다고 한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그럼 왜 스스로 객이라 그랬을까. 손과 객은 다른 곳에서 찾아온 사람이라는 말이다. 같지만 다르다. 손에는 높임말 '남'자도 붙인다. 뜻풀이를 찾아보니 손은 적지만 돈이 되는 사람이고 객은 입만 가져온 사람이라 한다. ‘객식구’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밥 먹기도 빠듯한 상황에서 식구가 하나 더 늘었을 때 썼던 말이다. 입만 가져와 밥을 축낸다는 뜻이다.     


 집에만 손님과 객들이 오고 갔겠는가. 삶에도 늘 들락거린다. 반기지 않는 시련의 객이든 두 손들고 맞이하는 희소식의 손님이든 말이다. 그들은 소리 없이 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알아차리게 갈 것이라는 언질을 주기도 한다. 희소식은 모르고 오던 알아차리게 오던 문제가 안되지만 나쁜 소식을 들고 오는 객이 왔을 때 갑자기 왔다며 허둥거리고 때로는 올 것이 왔다며 체념을 하거나 빨리 쫓아낼 궁리를 한다. 자연재해가 객이 아닐까 한다. 거대한 태풍이 온다고 하면 최소한의 피해를 위해 준비한다. 행여 경고의 소리를 무시하고 넘어갔다가 최대한 피해를 입지 않으려 한다. 객은 밥을 축내듯 삶도 축내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미용실에는 문 위에 종을 달아 들고나갈 때 종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주인이 들고 나는 손님을 알아채기 위해서 이다. 이렇듯 대부분 손님과 객은 작은 소리도 내기도 하고 큰 소리를 내어 방문할 것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 한다.      


 삶에 찾아온 손님은 늘 함께 하고 싶지만 객은 얼른 떠나기를 바란다. 싫든 좋든 반기든 반기지 않든 우리의 삶에 손님과 객은 언제든 올 것이다. 자연재해가 오고 간 곳에 흔적이 남듯 삶에 객이 다녀간 자리에도 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다. 손님의 아름다운 자국은 좋은 추억쯤으로 간직하고 싶지만 객이 머물던 자리에는 때론 상처로 남을지도 모른다.      


 언제든 어디서든 찾아오는 손님은 환영이지만 입만 가져와 밥만 축내는 객처럼 내 삶의 일부를 먹어 버린다면 큰일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객에 먹히지 말고 상처로만 남길 수 있게 지내야 한다. 객에 맞서 싸운 상처야 시간이 지나면 흐려지기도 하니 말이다. 영광의 상처란 말도 있지 않나. 


 결국은 우리는 아름다운 추억도 영광의 상처도 다 내 안에 손님으로 남겨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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