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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덤한 이별

by 노이의 유럽일기


"헤어지자"

그녀는 너무나 작아서 잘 들리지도 않았을 법한, 그의 짧은 한마디를 조심스럽게 주워다가 귓속에 넣었다.
어렵게 꺼낸 말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꼭 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겠지만.
누구에게나 그 한마디는 가장 하고싶지 않지만 절대 하지않으면 안되는 말로써 언젠가는 입에 담아야 할 순간이 오게 마련인, 그 한마디.
늘 그랬듯 그녀는 쓸데없이 이해심이 많았다.
자신에게 헤어짐을 고하는 그의 마음조차 이해해버리고 말았다.
그 이해심은 그녀의 슬픔보다도 앞서는 것이라서 그녀는 아직 눈물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지금 헤어져도"


그녀는 거기서 잠시 말을 멈췄다.
멈춤과 동시에 정수리밖에 보이지 않던 그의 머리가 어느새 그리운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다음 말을 기다리는 눈빛. 뭔가 애처롭다.
자신의 이런 결정을 돌이키도록 하지는 말아달라는 듯한 잔인한 애절함.
그의 얼굴을 다시 보고 싶어서 말을 멈춘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마른 침을 삼키며 입술을 연다.


"지금 헤어진다고해도 넌 나에게 다시 돌아올거야."


적잖이 당황한 그의 얼굴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녀는 평소 확신에 찬 말투는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대부분 "아마 그럴걸" 이라던가 "그런 것 같아" 라는 식의 애매모호한 문장들이 그녀가 내뱉는 말의 전부다.



"그럴거라면 헤어지자고 하지 않았을거야. 이해해줘. 미안해 ..."

"미안해할 거 없어. 네가 가볍게 말하지 않는 사람이란거 알아. 하지만 이건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직감이야. 헤어질거라는 것도 직감으로 느껴졌지만 더 강하게 느껴지는 건 그거야. 넌 내게 다시 돌아와."



그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그녀가 당황하거나 울거나 아니면 한마디말로 붙잡기라도 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렇게 나온다면 그는 어떻게 해야할지 수 많은 생각을 했었지만,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이 자리에 나왔었다. 답이 나오지 않는게 당연했다. 상황조차 그의 예상과 제대로 빗나가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속여왔다고 생각했다.
그녀, 그리고 그 자신을.
그녀를 위한 이해가 아닌 자신을 위한 이해로 꽁꽁 무장한 채
그저 현상유지만을 해왔던 지난 2년 간의 연애.
결국 그는 지쳤고, 헤어지자고 말하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헌데 그녀는 그의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나도 담담하게, 차분하게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게다가 그가 다시 그녀에게 돌아올 것이라는 예언같지 않은 예언마저 하고 있다.
그가 한참을 말이 없자, 결국 다시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 때가 되면, 누군가 새로운 사람이 내 옆에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라면, 다시 생각해볼게. 너에게로 돌아가는 일."

"넌 한번 헤어진 사람과는 절대 다시 만나지 않는다고 했잖아."

"그랬지. 앞으로도 그럴거야. 하지만 넌 달라."



그녀로서는 자존심을 굽히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바로 지금 자기자신을 버리려드는 사람에게 넌 내게 특별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그래도 계속해서 말해야 했다.



"넌 이해하지 못할거야. 사실 나도 이해하기 힘들어. 붙잡으려고 이러는 것도 아니야.
아직 돌아오지도 않은 너를 받아들일지 말지 벌써 고민하는 건 어려운 일이야. 우선은, 그래, 헤어지자."



누가 누구에게 이별을 고한건지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녀의 코 끝을 보며 말했다.



"돌아가지 않을거야. 기다리지마."

"너 기다리겠다는 말 아니야. 지금 헤어져도 넌 내게 돌아오겠지만, 내가 네게 돌아갈지는 알 수가 없어."



후회하는 건 내가 아니라 너야, 라고 그녀는 눈빛으로 그에게 말했다.

그가 제대로 그 눈빛을 읽어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벽에 걸린 명화를 감상하듯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녀는 원래 이런 차분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은 그였다.
그녀의 눈앞에서 두 손을 깍지끼고 손톱을 물어뜯고 있는 그.
어떻게 해도 고쳐지지 않던 그의 버릇을 다시 지켜보면서 그녀는 살짝 미소지었다.



"그만 갈게. 할 말은 다 한것 같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빠져나갔고, 그는 덩그러니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아니, 카페 벽화의 일부가 된 사람처럼 덩그러니 그 자리에 박혀있었다.



사랑.
그렇게 하나의 사랑이 끝이 났다.
한번의 사랑이 끝날 때마다 그녀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눈물이 나오는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것은 그녀가 침착하게 변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직감적으로 그가 돌아올 것을 느끼고 있었다.
알 수 없는 그 기분이 이상하리만큼 그녀의 마음을 안정적으로 받쳐주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해할 필요가 없었다.



달이 아주 밝은 저녁이었다.







2010년 8월 23일에 다른 블로그에 적어두었던 글을 옮겨왔습니다.

실화 바탕의 픽션 에세이입니다.



커버 이미지 출처: UnsplashFabien Maur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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