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칭 단수
[소설] 일인칭 단수.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을 읽다 보면 쓰고 싶어 진다. 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시작되는 건지는 몰라도 한 번 불붙으면 금세 열망이 되어 사로잡힌다. 내가 꾸며낸 이야기를 누군가 귀 기울여 듣는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내밀하고도 조심스러운 작업은 쾌감을 동반한다. 눈을 반짝이며 거짓말을 지어내는 아이가 된다. 상대방이 내 이야기에 푹 빠져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뿐만 아니라 깊은 감동의 눈물까지 흘린다면 어떻겠는가. 거짓말쟁이에게 이보다 짜릿하고 영광스러운 순간은 없으리라.
남을 감쪽같이 속이기가 어디 쉬운가. 소설가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글솜씨도 필요하고 때에 따라선 기술을 갖춰야 한다. 열정과 지구력 같은 에너지는 필수다. 여기에 더해 도덕성과 정치적 올바름과 같은 정신적인 면도 함양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엄청난 스토리텔링 능력과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독재자를 찬양하는 소설 따위를 써선 곤란하니까 말이다. 그런 소설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그만이다.
위에서 말한 모든 걸 다 갖췄어도 하나가 빠지면 소설은 쓰이지 않고 소설가는 탄생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의도,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그것이다. 사실 이 말은 제일 먼저 나왔어야 한다. 의도 없이 쓰이는 소설은 없다. 의도가 없는 소설은 정성스럽게 한 아무 말과 같다. 요즘은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게 놀이 중 하나인지는 몰라도, 그 놀이의 유행이 도달하는 곳은 허무 이외에 아무 데도 아니다. 사실 의도 없는 소설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명제다. 그런 건 쓰이기도 전에 허물어져 버릴 테니까.
결국 독자가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든 작가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소설을 쓰는 거다. 소설뿐 아니다. 시나 산문, 칼럼 등 모든 글쓰기는 의도를 담고 있다. 누군가는 ‘난 아무 의도 없이 재미를 위해 썼다’고 할지도 모른다. 이때 의도는 독자로 하여금 재미를 느끼게 하는 거다. 의도가 반드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나름의 이유를 가지고 쓴다는 거다.
이 뻔한 얘기를 왜 하고 있냐면, 요즘 책을 읽으면서 참 글마다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쓰였구나 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잦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소설뿐 아니라 산문도 좀 읽고 있는데, 그 글들 안에는 작가들이 하고자 하는 얘기들이 가득하다. 어쩜 세상에 대해 이렇게 폭넓게 관심을 가지고 깊이 생각하며 살고들 있는지. 그렇지 못한 나는 그런 글을 만나면 작은 희열을 느낀다. 감탄하고 무릎을 치며 어딘가 같은 하늘 아래에 있을 작가의 글 쓰는 모습을 잠시 떠올린다. 그 진지하고 지난한 작업에 손을 모아 응원을 보내고 싶어 진다.
오랫동안 글을 써온 사람이 계속해서 꾸준히 새로운 글을 써내는 것은 더욱 놀랍다. 새로운 글을 쓸 분명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50년 넘게 변함없이 비슷하고도 새로운 음악을 만드는 롤링스톤즈를 향한 경탄과 비슷한 거다. 그 음악들은 반드시 그들에 의해 만들어져야 할 이유가 있었던 거다. 자기복제와 동어반복의 늪에서 스스로를 구원해야만 다다를 수 있는 경지에 오른 자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중 하나다.
최근에 또 나온 무라카미 하루키 단편집은 서술자 화자가 마치 작가 자신인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래서 쉽게 이런 비판을 하고 싶어 질지 모른다. ‘이거 에세이 아냐?,’ ‘온통 자기 얘기뿐이군’, ‘또 맥주 마시고 여자랑 섹스했던 젊은 시절의 하루키인가’. 물론 정당한 비판이다. 세상 모든 작품은 정당한 비판을 정면으로 돌파해야 한다. 자유로운 해석은 독자의 권리이니까. 그런데 난 이 소설들이 쓰이고 발표되어야 했던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각각의 소설에서 반짝이는 어떤 순간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단편은 그런 순간을 보여주기만 해도 성공이다. 가슴이나 머리를 전류 같은 게 휙 하고 스쳐 지나가는 그런 순간이다. 소설이라는 이야기 형식을 갖추고 반짝이는 순간을 마련해 놓았으므로, 그리고 결정적으로 ‘소설’이라고 발표했으므로 이 책에 실린 글은 모두 소설로 읽으면 된다. 소설로 인식하는 때부터 서술자 화자는 실제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다. 이름이나 직업이 같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그 소설 속에 존재하는 화자다. 그러므로 이 글들은 에세이가 아니다. 설사 모든 내용이 실제 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가 경험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자기’ 얘기가 아니다. 젊은 시절에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게 살았든 아니든 관심 둘 일이 아니다. 실제로 어느 온천에서 말하는 원숭이와 대화를 했든 아니든 전혀 관심 없다.
나는 소설의 화자가 소설가인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 사실은 매우 싫어하는 쪽에 가깝다. 엄밀히 말하면 소설가 화자가 소설을 쓰면서 괴로워하거나 동료 소설가를 만나는 등 그 직업 세계의 일면이 스토리의 중심에 있는 경우를 싫어한다. 영화의 주인공이 영화감독이나 영화배우인 것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직업과 다양한 삶이 있는데 고작 자신이 속한 세계에 대해서밖에 얘기하지 못하나. 물론 그런 직업을 가진 사람도 사람이고 이야기의 정수가 얼마든지 그들 안에 담겨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신부가 신도들에게 신에 대한 성심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표본으로 제시해선 아무런 효과도 없을 거다. 예시가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뜻은 통하리라. 그 효과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도, 혹시 ‘어차피 모든 예술 활동은 자기 얘기’라는 철학이 있는지는 몰라도, 나에겐 그렇게 보여주는 세계가 너무 좀스럽게 느껴진다. 그것마저 의도된 것이라면야, 그건 그것대로 그만이다.
이 소설집에 실린 소설들도 소설가가 화자인 것처럼 보인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화자로 상정하고 읽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야구르트 스왈로스 시집』한 편을 제외하면 딱히 소설가의 세계를 보여주지는 않는다. 소설가 화자가 소설가의 세계와는 크게 관계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거라면 큰 거부감은 없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재밌는 건 모든 소설의 화자가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점이다. 단편으로 나뉜 세계이므로 여덟 편의 화자는 모두 개별적으로 각 소설 세계에 존재한다. 각 세계에 속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들려주는 여덟 개의 이야기다. 소설은 모두 일인칭 시점이므로, 결국 이 소설집은 여덟 명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들려주는 여덟 개의 ‘나의’ 이야기이고, 그 여덟 개의 이야기를 쓴 사람은 실재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다. 각각의 소설은 서로 간섭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일인칭으로 존재한다. 각각의 이유를 가지고서.
아직도 가진 이야기가 이렇게 많다는 것이 놀랍다. 이 사람이 재즈를 좋아해서인가. 끝없이 변주되는 재즈 같다. 거기에 연륜과 여유와 체력까지 갖췄으니, 롤링스톤즈만큼 경탄을 자아낸다. 세계에는 이런 놀라운 작가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난 90년대 이후를 한국에서 살았고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이 청춘의 필독서가 되는 과정을 보았다. 너무 유명하고 다들 좋아하니까 괜히 거부감이 들어서 ‘난 하루키 별로 안 좋아해’라고 해왔지만, 어쩌다 보니 거의 모든 소설을 읽었다. 이쯤 되면 안 좋아한다는 말이 거짓말인지도 모른다.
거의 모든 하루키 소설을 읽은 이유가 나에게는 있었을 거다. 다른 모든 소설을 읽을 때도 그렇다. 소설을 읽는 이유가 나에게는 있다. 나는 의도를 가지고 소설을 읽는다. 그런데 의도를 가지고 읽는다는 말은 다소 위험하게 들린다. 의도를 가지고 읽는다면 읽고 싶은 대로 읽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건 책을 읽는 동기와는 다른 문제다. 기대하는 게 있다고 말하면 어떨까. 바꿔 말하면 소설 한 편을 읽을 때마다 저마다 기대를 가진다는 말이 된다. 이게 가장 적합한 표현인 것 같다.
소설 한 편이 쓰일 때는 이유가 있다(있어야 한다). 읽는 사람도 이유를 가진다. 작가와 독자는 모두 이유를 가지고 만난다. 이유가 상통하면 짜릿한 전기가 흐른다. 사회적으로 유용한 무언가가 만들어질지도 모른다. 바꿔 말하면 작가의 메시지와 독자의 기대가 일치할 때, 책이 매개하는 이 세계의 가슴이나 머리 같은 어딘가에 전류가 휙 하고 스쳐 지나가는 그런 순간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다.
방금 쓴 글을 다시 읽어보니 망상이고 헛소리다. 분명한 건 이거다. 읽는 사람은 저마다의 이유를 가지고 소설을 읽는다. 모든 소설은 이유를 가지고 쓰였다. 나름 최선을 다해 읽고 쓰는 거다. 그렇다면 이유들이 일치하든 아니든 그 최선의 행동들이 도달하는 곳이 허무는 아닐 거라고 믿고 싶다.
(2021.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