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8.10.
전국에 며칠째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35도에서 37도까지 지역마다 경쟁하듯 오늘의 최고기온을 보고하고, 강릉은 측정을 시작한 백십몇 년 만에 가장 높은 온도를 기록했다. 나는 뙤약볕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에어컨 바람이 펑펑 쏟아지는 카페를 찾아왔다. 자주 가던 카페에는 빈자리가 없었고 대안으로 찾아간 두 번째 카페도 만원이었다. 아침 산책을 위해 간 호수에도, 사람들이 바글대야 할 먹자골목에도, 카페를 찾아오는 길거리에도 사람 그림자가 드문드문하더니 다들 실내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디를 들어가든 강력한 에어컨 냉기가 땀을 식혀줘 상쾌한 기분이 되지만 금세 한기에 몸을 떤다. 커피숍에 몇 시간 있을 계획이면 긴 옷을 하나 챙겨가야 한다. 활짝 열린 문으로 냉기가 쏟아지는 가게 앞을 지날 때면 나는 이 찌는 듯한 무더위가 마치 그 가게 주인 때문이기라도 한 듯 불쾌한 분노에 휩싸인다. 땅에서 하늘에서 그리고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에 타는 듯하던 나는 시원한 수박주스와 쾌적한 실내온도 때문에 다시 정상을 회복한다. 그러고는 곧 창피해진다. 나는 이 폭염의 명백한 원인이 아닌가.
여름을 처음 나는 것이 아니다. 참기 어려울 만큼 더웠던 여름이 과거에도 분명히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힐 만큼 덥다는 상투적인 표현이 상투성을 얻기 위해 얼마나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웠겠나. 그러니 지금 이 더위가 미증유의 감각으로 새롭게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도 40도에 버금가는 더위 속에 아스팔트에 달걀을 깨 프라이가 되는 모습을 뉴스로 내보내곤 했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으레 뜨거운 여름에 사람들이 죽기도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슬프지만 그건 그냥 있는 일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데 불현듯 마음에 떠오른 예감은 이번 여름을 지나며 확신이 되더니 공포로 그 모습을 바꾸고 있다. 앞으로 이 땅에서 맞이하는 여름은 지금 이 여름보다 더 뜨겁고 불쾌할 거라는 확신이다. 아니, 이 땅의 문제가 아니다. 어디든 그럴 것이다. 이미 상당히 나쁘지만 앞으로 더 나빠질 거라는 확신. 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류가 되돌릴 수 없는 변화를 겪게 되는 가설상의 순간을 기술적 특이점이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이 여름에 인류가 돌이킬 수 없는 지점을 지났음을 분명하게 느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기후 위기는 더 극단으로 치달을 것이고 내가 살아왔던 과거의 날씨를 다시 경험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확실한 예감. 그런 예감이 내부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이미 세계 곳곳에서 수없이 나타나는 징후와 현상들이 뉴스를 통해 보도되어 왔다. 살인적인 더위라는 말은 이제 비유나 상징이 아니다. 정말로 더위는 많은 사람을 죽이고 있다. 이제 돌이킬 수 없다고 경고하던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소리는 모두 외부에서 온 것이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기만 해도 피할 수 있는 외부의 것들. 그러나 내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시할 수 없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낯선 질감의 온도. 그 온도가 경험해 보지 못한 리듬으로 연속되는 날들. 지구 기후가 특이점을 지났음을 나는 이 여름에 확실하게 느낀다. 이제 지구는 무시무시한 캐나다의 산불보다 더 뜨겁게 내 안에서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은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전장에서는 배수의 진을 쳐야 훨씬 강력한 상대와 맞서 싸울 수 있다.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건너온 다리를 끊어 버려야만 한다. 그래야 이야기가 앞으로 나간다.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사건과 마주할 때 우리 인생은 크게 변한다. 변하고 나면 이전의 자신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 어른이 된 후에 다시 아이가 될 수 없다. 앞으로 가야만 한다.
인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고야 말지도 모르겠다. 우주에 거대한 양산을 띄워 태양에서 지구로 쏟아지는 복사열을 줄이는 방법을 찾는다는 뉴스도 봤다. 소시민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뛰어넘는 규모의 대안들은 이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인류는 지구를 식힐 방법을 찾을지도 모른다. 플라스틱을 무해한 성분으로 녹이는 화학적 쾌거를 이룰지도 모른다. 멸종한 동물들의 DNA를 모조리 찾아내 모든 종을 복원하게 될지도 모른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고 맛과 영양 모두 좋은 먹거리를 발명할지도 모른다. 거대한 집진장치를 개발해 온 세상의 공기를 깨끗하게 정화할지도 모른다. 사막에서 자라는 식물종을 배양하고 증식시켜 지구의 녹지를 복원할지도 모른다.
이 헛된 상상들은 그러나 허무하다. 정말 그렇게 되리라고 예상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주체로서 이 문제에 개입하지 못한다.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은 곧 무기력을 자각하는 일이다. 무기력은 포기를 유도한다. 나는 자꾸 포기한다. 인터넷을, 소고기를, 에어컨을 포기하는 대신 이 문제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포기한다. 이 무기력을 가장한 무관심이 지구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건만 어쩔 수 없다는 변명 이외에 다른 길을 걷지 못한다.
미약함을 극복할 수 있는 담대한 희망과 포부를 주소서.
종교가 없지만 신 앞에 잠시 엎드려 본다. 그런 제스처를 취하는 건지도 모른다. 잠시 문제를 잊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래야 다시 일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아름다운 사계절이 있는 한국에 가을이 찾아오면 파랗고 맑은 하늘 아래 잠자리가 날 것이다. 기분 좋게 소풍을 가고 인생을 즐거움으로 채우며 지구의 안녕은 잠시 잊게 될 거다. 그러다 너무 짧은 가을과 어딘가 이상한 겨울이 지나고 예년 같지 않은 봄을 거쳐 여름이 다시 찾아오면 지금 이 공포를 떠올리며 또 이런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을 거다. 이 비관의 말들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비판을 겸허히 수용해도 여전히 그 어둠을 빠져나오기 어렵다.
건너온 다리는 끊어져 버렸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이건 소설도, 특정인의 인생도, 낭만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어느 지점에서 끝나 버린다면 그냥 받아들여야 할 운명이다. 어느 작은 항성에 우연히 생겨난 생명이 스스로 절멸하고 마는 기막힌 스토리를 즐길 존재가 없을 것을 상상하며 무한한 허무의 소용돌이에 빠져버린 무덥고 아름다운 여름이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가장 시원했다고 기억될 폭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