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와 세계판화콩쿨 공동 금메달 수상한 천재 판화가 이야기
1959년, 독일 라이프치히에서 세계판화콩쿨이 열렸다. 영애의 금메달은 공동수상이었다. 한명은 누구나 예상하듯 최고 작가의 반열에 오른 피카소. 다른 수상자는 유럽 사람들에게 발음도 어색한 생소한 이름이었다.
경연심사위원이였던 러시아의 미술가는 "판화 <밭갈이>는 내용과 밀착된 세련되고 현대화된 판화적 수법과 비상한 형상력으로 하여 다른 경연작품들을 완전히 압도하였다. 작품은 판화예술의 높은 형상력을 실천을 통하여 과시함으로써 참다운 본보기로 되고 있다."고 찬사를 보냈다.
이 작품을 본 외국의 여러나라 판화전문가들과 판화경연심사위원들은 일치하게 1등상을 주어야한다고 하면서 그 높은 형상력과 독창적인 기술수법은 세계판화예술발전에 커다른 공헌을 하였다고 평가했다. <출처. 조선력대미술가편람>
그 주인공은 26살 유학생 함창연. 그는 판화 <밭갈이>로 피카소와 금메달을 공동수상하며 세계 미술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그의 판화에는 한 폭의 수묵화와 같은 동양의 멋이 잘 드러나 있다. 사실주의 기법의 판화 속에 수묵화에서 쓰는 농담, 원근, 여백의 요소가 조화롭게 담겨있다. 동시에 회화 예술의 현대적 미감을 충분히 살려내고 있다.
한국전쟁 중에 국가 장학생으로 폴란드로 6년 동안 유학을 간 청년.
멀리 조그마한 나라 북조선에서 온 그 유학생 함창연이 졸업하는 날. 바르샤바 미술대학의 학장을 비롯한 여러 교수들은 10년 만에 처음 나온 최고우등생 함창연에게 폴란드에 남아서 교편을 잡을 것을 간곡하게 부탁했다.
하지만 조국에 성실했던 청년 함창연은 북으로 돌아간다.
<출처. 전시 함창연, 폴란드를 가다 中 밀알미술관 학예실장 성현경>
20대 나이에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직까지 제안 받았던 청년 함창연은 어떻게 조국을 선택할 수 있었을까?
함창연은 1933년 자강도 송원군에서 출생했다. 미술에 재능을 보인 그는 생동인민학교, 전천중학교를 졸업하고 평양미술대학 도안학부에 입학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학업을 중단하고 전선에 탄원하여 1952년 11말까지 군사복무를 하며 군공을 세웠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전쟁 이후 폐허가 된 국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과감히 우수한 인재들을 선발해 유학을 보냈다. 함창연도 전선에서 대학으로 소환되어 폴란드 유학생으로 선발된다. 그가 사선에서 같이 싸웠던 전우들을 뒤로하고 외국으로 나가는 심정이 어떠했을까.
함창연은 “외국에 나간다는 사실에 조국에 대한 감사함과 미안함이 가득했다”고 한다. 그는 조국을 떠나던 날 “나는 영광스러운 유학생이니 첫째도 노력, 둘째도 노력이다”라고 작은 수첩에 적었다. 그 다짐처럼 함창연은 피나는 노력으로 하루 3시간의 수면시간만 가지고서 잠들기 전까지 작품에만 몰두했다. <출처. 밀알미술관 학예실장 성현경>
함창연은 1953년 폴란드 우지종합대학(Lodz University in Poland)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1954년 폴란드 바르샤바 미술 아카데미(Warszawa Art Academy)에 입학한다.
폴란드는 뛰어난 판화 기술로 유명했다. 거기서 함창연은 모든 장르의 판화를 습득하게 된다. 고무판화, 목판화, 석판화, 드라이포인트(동판에 바늘로 새기는 기법), 에칭(금속판에 밑그림을 그린 뒤 산으로 부식시키는 기법), 아퀴틴트(금속판에 송진가루를 뿌린 후 부식키는 음영기법) 등 여러 장인들이 나눠서 하는 다양한 판화를 그리고 파고 찍어내는 일을 혼자서 해냈다.
함창연은 1957년 모스크바 국제미술 전람회에서 판화 <거제도 연작>으로 계관상을 수상하면서 처음으로 국제무대에 두각을 드러낸다. 이 그림은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도 입상을 했다. 북한에서 이 작품은 <증오>라고 불린다. <증오>라는 명칭이 훨씬 작품의 의도를 명징하게 드러낸다.
미국 제국주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한 판화 <증오>는 4부작으로 거제도 포로학살 사건을 다루고 있다.
1,2,3번째 작품에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끌려가는 사람들의 끝없는 줄, 수용소의 삭막한 정경이 이어져있다. 4번째 작품에는 무참하게 학살된 시신이 앙상하게 마른 가지 주위로 널려있다. 그는 피로 흥건하게 물든 땅, 형체조차 알기 힘든 참혹한 포로들. 거제도의 학살만행을 가슴 절절하게 파내려갔다.
거제도 포로학살 사건의 배경을 알아야 이 작품의 제목이 왜 <증오>인지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다.
한국전쟁이 교착상태로 접어들 무렵 미국은 고전에 고전을 거듭했다. 동시에 세균전 및 화학전에 대한 국제적 비난과 미국 내에서 반전 여론은 커져갔다. 미국은 군사적 패배를 감추기 위해 전쟁포로 문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에 억류된 포로는 13만명에 달했고, 대부분 거제도 수용소에 수용되어있었다.
미국은 북한군 포로들이 송환을 원치않으며 ‘자유세계’로 가고 싶어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의사를 존중하는 것으로 보이는 미국의 주장은 제네바협정 제118조 '포로는 전쟁종결 뒤 즉시 석방되어 본국으로 송환되어야 한다'는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포로문제로 휴전회담을 깨뜨리고, 포로수용소에서 포로들에게 ‘자유세계’를 강요했다. 포로수용소에서의 송환 심사는 사실상 협박과 고문이었다. 휴전회담에 참석한 초대 미국 대표단장인 조이 제독은 그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송환을 원한다고 표명한 사람들은 모두 실컷 얻어맞아 골병이 들거나 또는 살해되었다. 대부분의 포로들은 공포심에 질려 자신의 선택을 정직하게 표현할 수 없었다.”<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미군의 포로송환정책과 학살에 분노한 거제도 포로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미국 포로수용소장 보트나 준장은 저항하는 포로를 대량 학살했다.
함창연의 유학시절 또 하나의 대표작은 <화전민>이다. <화전민>은 1959년 오스트리아 빈 국제미술전람회에서 동메달을 수상했다.
3부작 판화 <화전민>은 판화의 고유한 특성을 살려 주제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화전민은 일제 식민지 시절 고향에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게된 농민들이 고향을 떠나 낮선 고장에서 땅을 일구며 살아가는 모습을 형상했다.
막막한 눈빛으로 응시하는 고된 농군의 표정과 타는 목을 적시기 위해 물을 마시는 여인. 땅을 뚜지는 인물들에 대한 묘사로 어려운 삶을 표현하고 있다.
붓으로 선을 그린듯한 큰 윤곽선은 자연환경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물들이 딛고 서있는 땅과 앞에 서있는 바위, 멀리 바라보이는 산의 능선은 전체적인 큰 하나의 구도를 이룬다.
북한은 <증오> <화전민> <밭갈이> 세 판화를 이 시기 우리나라 판화의 성과작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볼 때에도 우수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작품들은 1961년 이전 소련에서 발행된 사회주의 나라의 현대미술과 대학교과서 미술사에 크게 소개되었다.
민족적 정서가 담긴 작품을 그려오던 그는 1962년 일제시기에 사라질 번한 민족적 판화 기법을 되살려 판화 <리발>을 제작했다. 일제의 민족문화말살과 사대주의, 민족허무주의에 맞서 주체적 생동성을 살려 형식의 발전과 형상의 복원에 성공한 것이었다.
화가 함창연은 "조선에는 겸재와 단원 그리고 함창연이라는 위대한 화가가 있다"고 러시아 미술백과에 소개될 정도로 현대 판화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홍익대 판화과 김승연 교수는 함창연의 작품 활동에 대해 “큰 작품은 작품대로, 작은 작품은 작은 작품대로 혼신의 열정 다 쏟아 그냥 쉽게 한 작품을 보지를 못했다. 그 정성스러움을 지나갈 수가 없더라”면서 “판화에는 16가지 정도의 기법이 있는데 대부분의 작가들은 한 두 개의 기법으로 평생 하는데 반해 함창연 화가는 실크스크린을 제외한 15가지 기법을 자유자재로 종횡무진으로 한다”며 “기법의 장점에 맞춰 작품을 하는 것이 놀랍다”고 분석했다. 때문에 그의 판화 작품이 함창연 한 사람의 작품이 아니라는 감정이 나오기도 한다.
함창연은 뛰어난 판화가를 넘어 뛰어난 예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판화가 아닌 드로잉, 수채화, 유화 등의 작품도 많이 남겼다. 미술교육 연구, 미술사학 집필 등으로 미술 교육에도 이바지했다. 동시에 판화가 가지는 고유한 언어를 살리기 위해 과감히 이전 기법을 버리고 현대적인 조형미의 파격적 구상을 하기도 했다.
1950년대를 풍미한 함창연의 판화 작품을 보면 바로 지금 유투브나 티비 광고에 나와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얼마나 세련된 작품세계인가. 함창연의 <소낙비>는 최신 헐리우드 영화 포스터를 떠올리게 한다. 표현주의적 모노타입 형식의 지붕 판화 역시 현대적 미감에 전혀 뒤떨어지지지 않는다.
함창연은 내용을 집약적으로 전달하여 큰 파급력을 주는 사회주의 선전화 분야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미소 냉전이 마지막 대결을 펼치고 있을 무렵, 함창연은 선전화 <비핵지대, 평화지대>로 1987년 모스크바 국제 정치선전화 경연에서 특별상 수상했다. 모스크바 국제정치 선전화 전람회에는 세계 50여개 나라에서 출판된 5000여 점에 달하는 정치선전화가 전시되는 곳이었다.
그는 1987년 6월 25일 러시아 통신사 타스통신 기자에게 심사위원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며 “오늘 평화옹호투쟁이라는 주제는 매우 절실한 것이다. 조선인민은 전쟁이 어떤 것이며 또 그것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재난을 가져다 주는가를 알고 있다.”고 작품을 설명했다.
함창연은 1959년 평양으로 귀환하면서 아홉 개의 트렁크에 폴란드에서 제작한 판화 작품만을 가득 담아 가져왔다. 그는 얼마 후 결혼할 자신의 약혼녀에게 줄 선물조차 챙기지 않았다고 한다. 오로지 작품에 자신의 영혼을 불살랐고, 조국에 대한 마음을 담아 모든 작품을 조국에 헌납했다. <출처. 월간조선. 양국주의 북한미술 산책①>
함창연은 귀국해 1960년부터 평양미술대학 출판화학부에서 후대를 양성하며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그는 교육과 창작사업의 공로로 1980년 공훈예술가, 1981년 부교수, 1991년 교수, 1987년 이후 평양미술대학 과학부학장이 되었다. 그는 20여년간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한 때 조선미술가동맹 출판화분과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의 작품 <리발>을 비롯한 20여점은 북한의 국보로 선정되어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어있다.
화려한 작가로서의 생활을 뒤로하고 조국으로 향한 함창연. 그의 작품 세계 중심에는 언제나 조국이 있었다. 그는 유럽에서 인정받는 풍족한 생활보다 자신이 배운 것을 바탕으로 조국의 예술 수준을 끌어올리고 후학을 길러내는 데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래서 그는 누구보다 제자들에게 자애로웠고 지식이나 인품으로 최고의 스승이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