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카루소가 군가의 선구자가 되다
“노래는 오락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노래는 전쟁의 무기이며, 혁명의 무기다”
음악가 정율성이 1963년 북경만보에 쓴 글이다. 정율성은 한생을 노래로 항일의 길에 바친 조선인 투사다. 동시에 근대 중국 3대 음악가로 ‘신중국 창건 100명 영웅’이다.
정율성은 전라도 광주 출생이다. 그의 본명은 정부은. 그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일찍 독립운동에 나선 형제들처럼 1933년 중국 남경으로 향했다. 부은을 데리러 온 넷째 형 정의은은 약산 김원봉이 이끈 의열단원이었다. 정율성은 형을 따라 의열단이 세운 ‘조선 정치군사 혁명 간부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정율성은 나이가 어려 바로 간부로 배치받지 못했다. 대신 남경에서 비밀활동에 종사하며 매주 일요일마다 음악 학습을 시작했다. 이때부터 정율성은 혁명 음악가로 성장하게 된다.
정율성은 기차로 10시간 거리의 상해까지 음악 학습을 다녔다. 레닌그라드 교수 출신 음악가 크리노와(Krenowa)는 그에게 성악과 음악이론을 가르쳤다. 크리노와는 정율성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며 “동방의 카루소가 될 것”이라며 이탈리아 유학을 권유했다. 그는 학비를 받지 않아도 되니 생화 한 묶음만 사다 주라며 정율성에게 지극한 관심을 돌렸다.
정율성은 이때 이름을 부은에서 율성(律成)으로 바꿨다. 부인 정설송은 “그는 음악에 몸 바치며, 아름다운 선율로 인민의 목소리를 반영할 것을 결심해 부은을 율성으로 고쳤다”라고 회상했다. <출처. 음악으로 인민을 일으키리라, 주간경향, 2005.8>
1936년 5월, 정율성은 중국 남경지역 청년 문예단체인 ‘5월 문예사’ 창립을 맞아 처음으로 작곡한 ‘5월의 노래’를 불렀다. 그는 5월 문예사가 주최한 강연에서 중국인의 항일투쟁을 호소했다.
“민족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제국주의 예속 하에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면 인민들은 모두 고난을 겪을 수밖에 없다. 중국의 노동자, 농민, 지식인들이 한마음으로 단합하여 일본과 싸워야만 중국을 구원할 수 있으며 조선도 해방될 수 있다. 일본과 싸워야 한다”
5월 문예사 참여로 중국 공산당과 연계를 맺은 율성은 1937년 중국 공산당의 주 무대 연안으로 들어갔다.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일본과 싸워 해방을 앞당기기 위해서였다. 부인 정설송은 “당시 율성 동지는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어깨에 메고 금박을 올린 ‘세계 명곡집’을 지니고 힘 있는 발걸음으로 호호 탕탕한 연안행 대열에 따라섰다”고 회고했다. <출처. 항일음악전사 정율성, 전남일보, 2006.7>
보탑산 봉우리에 노을 불타고
연하강 물결 위에 달빛 흐르네
봄바람 들판으로 솔솔 불어치고
산과 산 철벽 이뤘네
아 연안 장엄하고 웅위한 도시
항전의 노래 곳곳에 울린다
1938년 수천 명이 모여 항일 대회를 진행했다. 심장이 터질 듯 외치는 구호와 힘찬 노랫소리가 연안의 대지에 울려 퍼졌다. 정율성은 항전의 결의를 담아 노신예술학원 문학부 모예의 가사에 곡을 붙였다.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 학생 시절에 정율성은 자신의 대표작을 완성했다.
‘연안을 노래하다’는 얼마 후 연안성 대강당 무대에 올랐다. 모택동을 비롯한 당시 중국의 지도부가 참석한 자리였다. 정율성은 첫 공연을 시작했다. 노래가 끝나고 박수소리는 연안을 뒤흔들었다.
당시 작사가 모예는 “모택동 주석과 중앙의 동지들은 미소를 띠고 귀담아듣다가 노래가 끝나자 매우 기뻐하며 박수를 쳤다. 당시 나는 이 정경을 보고 격동된 나머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고 회상했다. <출처. 항일음악전사 정율성, 전남일보, 2006>
연안송은 거침없이 퍼져나갔다. 연안에서 반일의 전선으로 울려 퍼진 노래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끊이지 않았다.
정율성은 “혁명성지 연안은 항일의 중심지로서 인민들의 숭경과 동경을 받았다. 연안송이 이런 사상 감정을 담았기 때문에 광범위한 지구에 전파되고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밝혔다. <북경만보. 1963>
연안의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서정시와 반일 항전의 행진곡이 어우러진 서정송가 연안송은 지금도 중국인들의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전진,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조국의 토지를 밟으며 민족의 희망을 짊어지고 있는, 우리는 하나의 무적의 역량.
우리는 농민과 노동자의 자제, 우리는 인민의 무장, 두려움 없이, 굴복은 없다.
영특하고 용맹하게 전투해서 반동파를 깨끗이 소멸할 때까지,
마오쩌둥의 기치는 높이높이 휘날린다.
들어라! 바람이 외치고 신호나팔 소리가 울려온다.
들어라! 혁명의 노랫소리 얼마나 우렁찬가!
동지들 발맞춰 해방의 전쟁터로 달려가자, 동지들 발맞춰 조국의 변강으로 달려가자,
전진, 전진! 우리의 대오는 태양을 향하고,
마지막 승리를 향하고, 전국의 해방을 향한다!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인민해방군의 뜨거운 피를 끓게 한 진군의 노래, 중국인민해방군가
이 노래는 정율성이 1939년 작곡한 ‘팔로군 행진곡'이다. 팔로군은 1947년 인민해방군이 되었다. 1949년 10월 1일 인민해방군이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할 때 장엄하게 불렀던 노래다.
지금도 중국의 모든 군대 공식 의전행사에 울려 퍼지고 있을 만큼 중국에서는 국가(國歌)와 버금가는 위상을 가지고 있는 노래다. 팔로군 행진곡은 연안 시절 정율성이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 교수로 재직 당시 작곡했다.
“긴 구절과 짧은 구절을 섞어 엮고, 음률이 조화되고 절주가 강하돼 중간에 네 글자로 된 구절을 3개 만들어 넣을 것”
정율성은 이와 같이 작사가 공목에게 구상한 곡에 맞게 가사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긍지와 자부심, 애국심을 한 껏 고취시키는 팔로군 행진곡은 중국 혁명 승리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정율성은 “팔로군 행진곡은 연안 시기에 사람마다 항일 할 것을 요구하고 팔로군은 항일의 주력이었기 때문에 감정이 끓어올라 쓰게 된 것”이라며 “창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이런 열정과 격정이 있어야만 작품을 창작해 낼 수 있다”고 말했다.<노동인민문화궁 음악 강연에서 연설, 딸 정소제 기록, 1974.8>
뛰어난 음악창작 활동으로 빛나던 정율성. 하지만 그는 창작에 더 집중할 수 없었다. 그는 1942년 죽더라도 태항산에서 죽겠다는 결심으로 폐결핵에 걸린 몸으로 반일군사항전에 뛰어든다. 그는 화북지방 태항산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치열한 조선의용군 활동을 맹렬히 펼쳤다. 8년간 사투 끝에 정율성은 다시 연안으로 내려와 해방을 맞는다.
우리는 강철 같은 조선의 인민군
정의와 평화 위해 싸우는 전사
불의의 원쑤들을 다 물리치고
조국의 완전 독립 쟁취하리라
인민의 자유 행복 생명을 삼고
규율과 훈련으로 다진 몸이니
온 세계 앞서 나갈 조선의 인민군
나가자 용감하게 싸워 이기자
정율성은 1945년 12월 드디어 그리던 조국에 12년 만에 돌아왔다. 황해도당 위원회 선전부장으로 취임한 그는 해주에 음악전문학교를 개교해 음악 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김일성 주석은 해주 현지지도에서 정율성을 만나 “어디서 싸우든지 간에 왜놈들과 싸운 건 조국에 세운 공이다. 제 나라의 군복을 입고 협주단에 가서 민족예술을 마음껏 꽃 피워보라”라고 격려했다.
정율성은 1947년 평양에서 ‘조선인민군 구락부 부장’을 맡아 인민군 협주단을 창설해 단장으로 200회 이상 공연을 진행해 ‘모범근로자’ 칭호를 받는다. 1949년부터는 평양음악대학 작곡부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정율성은 월북 시인 박세영의 시에 곡을 붙여 <조선인민군행진곡>을 작곡했다. 이곡은 나중에 조선인민군가가 된다. 그 외에도 <해방행진곡>, <조선인민군행진곡>, <조중친선>, <동해어부>, <도문강> 등 많은 작품을 작곡했다.
1950년 전쟁이 발발하자 정율성은 <조선인민유격대전가>, <공화국 기치 휘날린다>, <우리는 땅크부대> 등을 작곡했다. 그는 주은래의 요청으로 그해 10월 고령의 어머니를 모시고 중국에 다시 돌아갔다가 다시 12월에 중국인민지원군 창작조와 함께 4개월 동안 참전했다. 당시에도 <중국인민지원군행진곡>, <지원군 찬가>, <사랑스런 군대 사랑스런 사람>, <백운산을 노래 하노라> 등을 창작했다. <출처, 중국 중앙인민방송국, 2010.10.12>
정율성은 전쟁 후 북경인민예술극원, 중앙가무단, 중국음악가협회창작조, 중앙악단 등 중국의 최고 음악단체에서 활동하며 여생을 보냈다. 이후 북한은 정율성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음악가 정률성, 1991>을 제작해 조국에서 그의 업적을 기렸다.
두 나라의 군가를 작곡한 작곡가. 정율성, 그는 군가의 선구자였다.
“그의 음악에는 전투적으로 내모는 음악적 힘이 있고, 그의 군가에는 화약 냄새가 풍깁니다. 정율성 군가의 음악적 특징은 8도 조약(8도가 떨어짐)에 있는데, 높게 치솟았다가 확 떨어지는 곡에 매력이 넘칩니다” <항일 음악전사 정율성, 전남일보, 최삼명 중국 국가1급 작곡가 인터뷰, 2006.10>
그의 군가가 살아 숨 쉬는 이유는 창작 자체가 전투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는 50대 후반까지 매일 피아노 연습, 작곡, 청각 연습 계획을 세우고 철저히 시간표에 표시할 만큼 강한 창작의지를 지녔다고 한다.
‘모든 정력을 집중하여 돌격적으로 학습하고 창작하자’는 그의 글 속에 아직도 항일의 열정과 창작 의지를 불태우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