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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Mar 06. 2019

꽃과 새를 사랑한 화가 일관 리석호

큰 키에 과묵한 유도3단 유단자 화가의 이야기

조선 백화첩을 만들고 싶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작은 것도 잘 보인다. 사랑하는 이의 손톱 모양, 손가락의 구부러짐, 자주하는 손의 모양까지 자세히 기억하게 된다.


그저 스쳐 지나갈지 모르는 풀 한포기, 이름 모를 들꽃, 작은 새를 사랑한 화가가 있다. 화조화의 대가 일관 리석호(一觀 李碩鎬, 1904~1971)는 조국에 나서 자라는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겼다. 그는 일제에 빼앗긴 아름다운 조국에 대한 깨끗한 마음을 그대로 화폭에 담았다.


작업실에서 부인과 함께 한 리석호


“나는 우리 조국의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 꽃 한 송이에 스며있는 조선의 정신과 기백을 화폭으로 형상한다는 긍지로 하여 조선에서 태어난 것을 무한한 행복으로 생각한다. 조국의 진달래를 비롯한 가지가지 오색찬란한 꽃을 빠짐없이 다 그려보려 한다. 조선 백화첩을 만들고 싶다” <조선미술> 1965년 10월호 중 수기 ‘그림을 인민들 속으로 보내야 한다’


리석호는 그가 직접 보고 느낀 감동적인 다양한 현실의 소재를 그려냈다. 시적 정서를 담은 그의 그림은 함축적으로 조선의 정신을 표현했다. 소나무를 통해 강한 기상을 담았으며, 매화를 통해 신비하면서 깊은 지조를 그렸다.

그는 성실한 화가였다. 한번 그린 대상의 표현 기법을 반복하지 않고 끊임없는 탐구로 새로운 묘사방법을 연구해 개성있는 몰골법 화풍을 창조했다.


고집스럽게 지킨 전통 미술


리석호는 서자 출신이었다. 봉건적인 아버지는 서자라는 이유로 그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20살까지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는 큰 키에 호방한 성격에 유도 3단인 유단자였다. 외모와는 달리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이석호는 미술에 뜻을 품고 21살에 서울로 향했다.


그는 유행처럼 가는 일본유학 대신 서화협회에 들어갔다. 민족미술 발전을 위해 심전 안중식(心田 安仲植)과 춘곡 고희동(春谷 高熙東)이 설립한 곳이었다. 서화협회에는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 부분의 유일한 조선인 심사 위원이었던 김은호, 이상범 등 당대 거장들이 활동했다. 리석호는 북촌 지역에서 활동하던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의 화숙인 낙청헌(絡靑軒)에서 미술수업을 받으며 동양화의 전통적 기법을 습득했다.


당시 1920년대 많은 미술가들은 서양화를 그리던 시대적 추세를 따라 유화를 그리거나 애매한 기법이 뒤섞인 동양화를 그렸다. 그러나 리석호는 고유한 전통 조선화를 그렸으며 민족미술형식을 고집스럽게 지켰다.


“리석호의 창작활동과 그의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미술사적 위치는 무엇보다도 조선화를 고수하고 그 우수한 화법을 발전시켜나가기 위한데 바쳐진 것으로 하여 중요한 자리에 놓여있다. 그는 자기의 그림에서 완고하다고 할만치 선행 조선화 화가들이 이룩한 전통과 유산에 충실하였다” <평양 문학예술 종합출판사. 조선력대미술가편람. 1999년 판. 리석호 편>


민족 사회주의자 리석호


리석호의 작품 소재는 주로 산수, 화조다. 때문에 직접적 주제 의식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는 민족성이 강했던 만큼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의식도 강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정신이 드러난 초창기 대표작으로 <노호, 1928>를 들 수 있다. 바위를 삼키듯이 달려드는 성난 파도를 표현하면서 일제에 대항하는 민족의 생명력을 잘 형상하였다.


리석호 노호 1928년 80호


조선총독부는 1939년말부터 전시체제를 강화하여 노골적으로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작품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얼마후인 1940년대 초, 리석호는 과감히 화단을 떠났다. 서울을 떠나 안성군 석정리에 은신하며 농사를 지으며 해방을 기다렸다. 일제에 복무할 수 없었던 그가 할 수 있는 작은 저항이었다.


리석호는 친일 행각으로 얼룩진 스승 이당 김은호와 절교를 했다. 김은호는 쓰루야마 마사시노기(鶴山殷鎬)로 창씨개명을 하고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했다. 김은호가 1937년 그린 <금차봉납도>는 전시 총동원체제 친일작품의 물꼬를 튼 작품으로 금비녀(금차) 11개, 금반지와 금귀이개 2개, 은비녀 1개, 현금 889원 등을 모아 국방헌금으로 납부한 것을 찬양한 작품이다. <붓으로 화폭으로 진충보국하라, 한겨레 2004.10.01>


해방을 맞이한 리석호는 확고히 사회주의를 지향하며 1948년 정종여와 7인 전, 1949년 이응노와 2인 전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그 중 1948년 작품 <조음>은 거친 조수의 물결을 통해 당시 이승만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민중들의 거세찬 투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작품이다.


그는 결국 이승만 정부의 탄압의 표적이 되어 경기도 수원에 1년 이상 피신 생활을 했다. 한국전쟁이 터지고 인민군대가 내려오자 그는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물조사접수사업에 착수했다. 그는 간송 전형필이 수집한 골동품과 고서화 등을 전통유물을 북으로 가져가 보존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자신의 예술관을 다음과 같이 담담히 표현했다.   

“예술은 인민에게 복무하는 것이며 인민을 떠나서는 예술이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 만큼 만일 인민의 감정, 기호에 맞는 작품을 내지 못한다면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와는 달리 풍경, 화조화가 한갓 감상용, 장식용에 그칠 수 없다... 때문에 나는 자기의 창작세계를 더 깊이 더 넓게 할 결의에 충만되여 있다” <평양 문학예술 종합출판사. 조선력대미술가편람. 1999년 판. 리석호 편>


몰골법의 대가


리석호는 전통적인 몰골법(沒骨法)을 계승 발전시킨 조선화의 거장이다. 몰골법은 물상의 뼈(骨)인 윤곽필선이 ‘빠져 있다(沒)’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는 채색법의 일종으로 구륵법(鉤勒法)과 반대되는 수법이었으나, 수묵화가 보편화되면서 색채뿐 아니라 수묵으로도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고 농담(濃淡)만으로 형태를 나타내는 경우 몰골법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리석호는 생략, 함축, 집약을 생명으로 하는 몰골법을 독창적으로 발전시켰다. 과거 고려, 조선시대 몰골화는 수백년간 매난국죽 4군자와 제한된 사물만 그려왔다. 리석호는 몰골화의 제한적인 주제영역을 확장시키고 미적 가치를 자연의 모든 분야로 확장시켰다.


그는 몰골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세밀한 묘사를 즐기지 않았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적 특성을 예리하게 파악하여 그려냈기 때문에 그의 그림을 보면 정밀화와 또 다른 깊은 인상을 받는다.


“그의 몰골화들이 사람들을 깊은 사색의 세계에 잠기게 하는 것은 심리적 충동과 정서적 감정의 심오한 추구에 있다. 화면에 그어진 한획, 한점의 필치는 창작적의도를 대변하지 않는 무의미한 것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그는 하나의 점, 한번의 붓질을 위해 몇시간 지어 며칠 동안 깊은 사색을 거듭한 적이 여러번 있었다고 회상자들은 말한다.” <평양 문학예술 종합출판사. 조선력대미술가편람. 1999년 판. 리석호 편>


뜻을 그리는 그림


리석호는 동양화적 채색의 기본이 탄탄히 다져진 화가였기 때문에 월북 후 두각을 드러냈다.


그는 1950년대 조선미술가동맹에서 활동하면서 조선문화대표단으로 베트남과 소련을 방문했다. 1957년에는 김일성 주석 표창장을 수여받고, 평양에서 개인전을 진행하기도 했다. 그 이후 평양미술대학 조선화과 교원과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몰골법은 일부에게 봉건주의, 형식주의라고 비판을 받게 된다. 사물의 형태를 함축적으로 그려 내면적 뜻을 담기보다는 사실적이며 섬세하게 묘사하는 방향으로 초기 북한 미술계의 논의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술계 흐름을 반영한 작품이 <소나무>다. 그는 소나무를 그리는 전통 기법을 다채롭게 사용해 소나무를 세밀하게 묘사했다. 이석호는 당시 소나무를 구상하며 창작수기에 시를 한편 남긴다.


억센 의지마냥 사시장철 푸른 소나무

엄동설한 맵짠 바람에도 어이 변함없이 청청한가!

조선혁명의 참넋이 깃들어 그처럼 절개 곧으냐

지원의 높은 뜻 새겨안아 영원한 것이냐

이 용맹, 그 절개, 그 넋을

내 기어이 살려내리라 보여주리라 화필로!

그리고 내 너처럼 살리라!

<평양 문학예술 종합출판사. 조선력대미술가편람. 1999년 판. 리석호 편>


리석호 소나무 253x131cm 1968 조선화

그러나 몰골법은 김정일 위원장에 의해 다시 재평가된다. 김정일 위원장은 ‘사회주의 풍경화에서는 무엇보다도 뜻이 있어야 한다’며 작가의 사상성과 작품에 담긴 뜻을 중시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즉 인간의 사상의식을 중심하는 북한의 철학을 반영한 미술관인 셈이다.


“몰골기법에 의해 창조되는 몰골화는 사의(寫意) 즉 뜻을 그리는 것을 중시한다. 사의적 형상 방법은 현실의 본질적 측면을, 인식된 미술가의 사상 정서적 감정으로 그린다는데 특징이 있는 것만큼 형사(形似)와 일정한 차이점을 가진다...


사실주의 미술에서 형사가 중요하지만 사의를 무시할 수도 없다. 그러나 지난 시기 일부 편협한 사람들은 뜻을 그리는 사의는 사실주의 창작 방법과 모순된다고 생각하면서 복고주의, 형식주의라고 하였고, 극단적인 이론가들은 사의를 사의적 추상이라고까지 하였다.


그리하여… 1천 여 년의 발전 역사를 가지고 있었으며 일본 등 다른 나라에 몰골기법을 전파시켰던 우리나라에서 한때 몰골화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북한 학자 리재현, 조인규의 글. 아트인컬쳐. 북한미술의 어제와 오늘 #1. 김정일 시대의 미술론을 말한다 박계리 한국미술연구소 선임연구원>


김정일 위원장은 1961년 “선조들이 이룩해 놓은 문화적재부를 귀중히 여겨야 한다” “조선화는 우리 인민의 전통적인 미술형식이다” 등의 담화를 통해 고려자기의 우수성과 과거 조선화 작품을 재평가하며 전통 미술에 대한 견해를 바로잡는다.


북한의 미술은 결국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시작으로 전통에 기반한 민족적 조선화 기법을 확립하면서 주체미학으로 정식화된다. 이는 1992년 <김정일 미술론>으로 정식화된다.


몰골화가 부상하면서 리석호는 사후인 1988년 리석호·우치선의 2인전, 1989년 리석호 개인전으로 화려하게 꽃핀다. 북한은 그를 조선화의 최고 거장이며, 몰골화, 서예에서 가장 특출한 업적을 보여주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 30여점은 북한 국보로 지정되어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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