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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Feb 08. 2019

조선화의 새로운 길을 개척한 거장, 청계 정종여

해방 후 동양화는 갈 바를 몰랐다. 새로운 것, 서양화가 들어오고 관념적이며 낡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여겨졌다. 일제 탁류에 물들어 민족색을 잃어갈 뿐이었다. 동양화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당시, 월북화가 청계(靑谿) 정종여는 북한의 동양화, 즉 조선화의 길을 개척하는데 큰 자욱을 남긴 화가다.


예술 건전성 조선적인 회화


정종여는 1912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났다. 가난으로 약국과 병원 소일거리를 전전하던 소년은 꿈을 찾아 일본으로 향했다. 낮에는 전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초상화 학원을 다니며 1935년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일본풍의 회화 양식이나 동양화의 오래된 형식적 교본을 따르는 대신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데 집중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이상범이 운영하는 청전화숙에 적을 두었고 귀국 후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해 작품을 출품하며 두각을 드러냈다.


<바닷가> 1938년 제17회 선전(鮮展) 출품작


<바닷가, 1938년>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한 식민지 사회현실과 가난한 서민의 삶을 그린 작품이다. 바다에서 조개를 캐고 미역을 따며 힘들게 살아가는 여인들의 강인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한글과 하얀옷까지 없애려는 일제시대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굳게 다문 입술은 당시 굳은 의지를 보여주는 듯하다. 당시 출판검열로 비록 식민지 현실을 비판하지는 못했지만 가난한 서민에 대한 주제를 선택한 것은 작가의식의 성장을 보여주는 중요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우시장> 종이에 수묵담채 1940년초


<우시장, 1940년초>은 한복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소들과 함께 풍경처럼 그려져 있다. 우시장의 다채로운 모습을 원근법과 먹의 농담, 섬세한 필체로 표현한 탁월한 작품이다. 마치 멀리서 사진을 찍어놓은 듯 우시장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소의 울퉁불퉁한 근육, 바닥에 자라난 풀잎 등 가까운 거리에는 세밀하고 진하게 자세히 표현했으며, 바구니를 머리에 인 아낙들, 흰 두루마기를 입은 남정네들, 멀리 보이는 산과 집은 연하게 그려 실감나는 작품을 연출했다.


민족 미술에 대한 정종여의 생각은 1946년 박래현의 개인전을 보고 쓴 회화 시평〈예술 건전성(藝術 健全性)〉에 잘 나타나있다.  


“여류화가 박래현(朴來賢)씨 개인전을 보았다. 전체적으로 그 앞날의 건전성이 눈에 띠운다. 오늘 조선의 회화 특히 동양화에 있어서는 그 갈 바를 찾지 못하고 모색과 고민에서 헤매는 것은 누구나 다 알 사실일 게다.(중략)  


박래현 씨의 작품에서 대체적으로 느끼게 된 것은 일본의 자연과 기후를 보던 눈으로 그대는 조선의 모든 것을 보려할 때에 거기에서 커다란 모순이 생긴 것을 알았으리라 하는 것이다. 이곳에서 용감한 노력이 있어야 값싼 일본 냄새를 완전히 쫓아낼 것이다. 자기의 실력으로써 바른 노선에서 완전한 조선이라는 것을 파악하는 때에야 참으로 건전한 조선적인 회화가 성립되리라고 믿는다. 앞으로 더욱더욱 꾸준한 노력을 바란다.”<조선주보>(제2권 제4호 1946. 6. 30) 


민족성이 살아있는 사실주의적 화법 


정종여는 현장에 직접 나가 자연풍경을 수십 번 관찰하고 연구하여 현실감 있는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그는 어디에 가나 늘 속사첩을 들고 다녔다. 이른 아침 이슬을 헤치며 모란꽃을 해부학적으로 파고들어 탐구하였고, 해종일 양어장에서 잉어의 움직임을 관찰하였는가 하면, 닭과 제비를 잡아놓고 털들을 세어보며, 그 생태의 밑바닥까지 놓침 없이 살피고 습작하는 것은 그가 창작에 앞서 반드시 진행한 어길 수 없는 공정이었다.” <운명의 선택3, 김성희, 평양출판사, 2013>(아트인컬처, 2014년 10월호)  


정종여는 전통적인 기법을 활용하면서도 실재 자연을 실감나게 그리려고 시도했다. 그는 그림을 공부하던 시절 신사임당의 〈냇가의 물오리〉를 보고 몹시 감동했다. 호분을 섞어 조색한 저녁노을 비낀 강안에 반사된 물오리의 털색이 현실감을 탁월하게 표현했기 때문이다.<조선의 오늘, 민족성이 살아있는 사실주의적 화법을 창조하려 정종여 편, 2018. 4. 4> 


그는 점차 수묵화의 관념적인 방법에서 과감히 벗어나 현실에 있는 사물과 풍경의 정확한 형태와 색채, 직접 본 시공간 감각을 묘사하기 위해 현장에서 직접 그리는 원칙을 세워나갔다. 또한 전통적인 몰골 기법을 쓰면서 현대적인 색채를 잘 활용하여 공간을 표현했다. 


<어경포대 망만이천봉> 종이에 수묵담채 135 x 350cm(10폭병풍) 1942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풍경화 역시 관념적 산수화가 아닌 현장에서 사실적으로 그렸다. <어경포대 망만이천봉, 경포대 금강산전망>에서 색채를 활용해 자연의 현실미를 조화시켰다. 경포대에서 바라본 금강산전망을 그린 이 작품은 10폭 병풍에 담긴 대작이다. 그럼에도 솔잎과 나무 한그루, 율곡 선생의 비각 표현, 동해안 주변 서민들의 모습까지 자세히 사실적으로 그려냈다.


정종여의 사실주의 예술에 대한 철학은 <나의 그림>이라는 기사에 잘 나와 있다.  


못 본 용은 그려도 본 소는 못 그린다 하는 좋은 말이 있는데 그것이 참 현실적인 말이라는 것을 요즈음 차차 알게 되는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소를 그리지 못하는 화공(畵工)이 용을 그린다 하더라도 얼마나 잘 그릴 것일까? 무지한 인민은 속일 수 있으되 사리를 잘 아는 인민은 속일 수 없다는 말과도 같다. 또 다시 말하자면 회화의 기초공사가 불완전한 것을 경계한 말도 될 것이다. 자기도 확실히 모르는 아지랑이 같은 세계에의 축성을 고집하며 현실적인 인민의 생활생리를 무리(無理)로 눈감아 버리려 하는 예술가들에게 좋은 훈화도 된다고 하겠다. 


(…)그림에 있어 아니 모든 예술에 있어 사실과 사의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요 사실의 준비 없이 사의는 나타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으로 사실은 언제든지 건설적인 것이며, 사실을 망각한 사의만의 세계는 언제든지 태만과 타락이 따른다. 나는 참다운 인간성을 배우려 노력해야 하겠고, 인간의 속으로 깊이 파고 들어가야만 나의 미술도 참다운 것이 될 수 있다고 언제든지 생각한다.” <나의 그림, 조선중앙일보, 1949. 2. 6> 


북행 길에 오른 정종여


정종여는 31살에 해방을 맞았다. 해방 직후 진보적 미술단체인 조선예술동맹 동양화부 위원장을 맡으며 두 번이나 개인전을 갖으며 활발히 활동했다. 동시에 성신여자중학교와 배재중학교에서 후대를 가르치며 후학을 길러냈다.


하지만 미군정과 단선 단정이라는 혼란스럽고 암울한 시대상은 정종여의 의식 전환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5월의데모, 1946년>, <병든서울, 1947년>, <분노한인민, 1947년>, <산사람들, 1948년> 등 항거하는 민중의 삶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민족끼리 연재 기사, 북행길에 오른 사람들 20, 미술가 정종여 편> 


그는 결국 한국전쟁시기 월북을 택한다. 그 후 중앙미술제작소에서 활동하며 전쟁기간 수많은 미술작품을 창작했다. <조선미술사 2권, 사회과학출판사, 1990년>에는 당시 작품 <바다가 보인다, 1953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조선미술전람회 출품>가 소개되어있다. 


“조선화 화가들은 낡은 창작태도에서 벗어나 전시의 준엄한 현실 속에 대담하게 뛰어 들어 전선에서 싸우는 인민군용사들과 후방인민들의 영웅적 투쟁을 주제로 한 조선화 작품들을 연이어 내놓았다. 조선화 <바다가 보인다>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의 하나이다.(중략)”


“작품에 창조된 인간과 자연형상들은 선묘법과 몰골법을 배합한 현대조선화의 풍부한 표현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인물의 성격적 모습과 남해의 고유한 자연미를 선명하고 힘있게 그려낸 것은 해방직후에 전통적인 조선화 화법을 우리 인민의 현대적미감에 맞게 발전시키는데서 이룩한 귀중한 성과로 된다.”


전쟁 후 1960년 정종여는 남쪽에 있는 동료(화가 고암 이응노로 추정됨)에게 편지를 쓴다. 4.19 혁명이 발발한 시국에서 월북 후 10년 동안 확립된 그의 예술관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잊을 수 없는 리형!

형은 우리나라가 일제 기반에서 해방된 초기 형과 운포와 나 셋이 종로 5가 어느 2층 집에서 긴긴 밤을 새우며 열렬하게 토론하던 그때 일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때 우리는 해방의 기쁨과 함께 우리 조선화를 발전시킬 데 대하여, 그 조직에 대하여 밤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번 남반부 인민들이 미국 놈과 그 주구들을 반대하여 피를 흘리면서 항쟁하는 소식을 들을 때, 나의 가슴은 진정할 수 없이 뛰었습니다. “장한 일이다!” 하고 나는 큰 소리를 외치고 싶었고, 그곳으로 막 달려가 함께 싸우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형, 형은 이 항쟁의 불길을 어떻게 대하셨습니까. 애국적이며 영웅적인 남조선 인민들의 기세 찬 항거의 불길을 보며 형은 무엇을 생각하셨습니까?


인민을 위하여 살며 인민을 위해 자기의 모든 재능을 바쳐야 함이 예술가의 사명이거늘 어찌 입에 풀칠하기 위하여 인민을 배반하며 양심을 저버리고 놈들에게 굴종하여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역대 선배 화가들도 그러했습니다. 조국에 대한 불타는 사랑으로 일관된 겸재 정선, 근대 인민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근로정신, 근면, 낙천주의, 소박성을 그려낸 단원 김홍도, 특권 계급의 생활 모습을 폭로한 혜원 신윤복, 또 권세에 아첨 아부하지 않고 자기의 궁한 생활과 싸우면서 일생을 그림에 바친 오원 장승업 등 과거 우리나라의 훌륭한 화가들은 모두 조국과 인민을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자기들의 붓을 들었으며 절개를 굽히지 않았습니다.


형. 우리가 창작하는 작품은 영원토록 인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인민을 교양하며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작품이어야 할 것입니다. 

<정종여, 조선미술가동맹 중앙위원회 기관지 조선미술, 1960년 8월호「리형에게 드리는 편지」발췌 수록. 월북화가 발굴 시리즈 정현웅 편(월간미술, 김복기, 1990. 7.) 中>


조선화 위에 남겨진 발자취


정종여는 평양미술학교 조선화 강좌장, 조선미술가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북한 미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화 창작과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그 공로로 그는 1974년에 공훈예술가, 1982년에 인민예술가 칭호를 받았다. 


<5월의 농촌> 195x120cm 1956 평양조선미술박물관 소장  


조선화의 발전 방향을 모색하던 당시 김일성 주석은 전통 회화를 발전시키자면 채색화 방향으로 나가야한다고 강조했다. 정종여가 그린 조선화 <5월의 농촌, 1956년>은 이런 고민에서 창작된 대표작으로 당시 채색화들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정종여가 채색에 이어 조선화 발전에 남긴 또 다른 공로는 적극적인 인물 주제 형상으로 조선화를 새롭게 창조한 것이다. 그는 인물화로는 동양화가 서양화를 따르지 못한다는 편견을 깨고 1958년 모스코바 사회주의국가 조형예술전람회에 〈고성인민의 전선원호, 1958>를 출품해 금메달을 받았다.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  145 X 523 cm 1958년 또는 1961년 평양 조선미술박물관


“창작가는 주인공을 비롯한 인물들의 성격을 긴장한 정황의 설정으로 더욱 부각시키는데 힘을 넣었다. 여기서 놀라 머리를 높이 쳐든 말과 고삐를 잡아채는 인민군 전사의 다급한 행동은 전선이 매우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세부처리로 인상 깊게 밝혀내었는바 이는 모든 인물들의 형상을 관통하고 있는 불굴의 투지와 대중적 영웅주의를 밝혀내는 데 적극 기여하고 있다.”<조선력대미술가편람 증보판, 리재현 지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308~312쪽>  


그는 작품 활동 뿐만 아니라 연구 사업도 적극 벌렸다. <채색화에 대하여>, <묵화에 대하여>, <채묵화에 대하여>, <조선화재료에 대한 사용법>는 그가 만든 조선화 실기기초를 위한 강의 자료다. 또한 <혁명적인 채색화를 힘차게 발전시키자>, <조선화분야에서 채색화발전을 위한 몇가지 의견>과 같은 논문도 집필했다.


정종여가 1984년 12월 사망하자 북한 신문 <민주조선>과 <평양신문>에 부고가 실렸다. 그가 사망한지 2주기가 되는 1986년에는 정관철, 정종여 2인 전람회를 김정일 국방위원장 주도로 개최하기도 했다.


휴전선으로 갈린 참새들


정종여의 선택은 조선화의 새로운 탄생을 낳았지만 민족분단의 비극은 가족의 애끓는 아픔으로 남았다.


남쪽에 남겨진 정종여의 둘째딸 화가 정혜옥은 분단으로 단절되어버린 가족의 상봉을 그리며 아버지에 대한 추억을 회상했다.


“아버지를 만난 적이 있다. 1960년대 후반, 내가 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어머니와 정종여의 혈육 1남3녀는 북한에 계신 아버지와 육성 상봉의 시간을 가졌다. 남동생 상진의 친구가 아마추어 무선통신으로 북한 방송을 듣던 중, 아버지가 라디오에 출연한다는 소식을 우리 가족에게 알려줬다. 우리는 밤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북한방송을 몰래 들었다. 


큰 국가미술전람회를 마치고 여러 화가들이 모인 좌담회가 열렸는데, 이 자리에 아버지가 출연한 것이다. 지금도 50대 아버지의 힘찬 목소리가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버지는 이런 말씀을 내놓으셨다. “북의 백두산에서 남쪽 제주도의 한라산에 이르기까지 조국의 산하를 그리겠다! (…)다도해의 절경을 바라보며 더덕 먹던 시절이 그립다. 거창 고향집 감나무를 다시 그리고 싶다.” [정혜옥, <아버지의 빈자리를 그리며>, 아트인컬처 2014년 3월호]

<참새> 92 X 26cm 1976년 서울 밀알미술관 소장
<참새> 31 X 21cm 1982년 서울 밀알미술관 소장

정종여 기념사업회를 운영하는 손자 정단일은 남북교류사업을 통해 남쪽으로 내려온 정종여의 작품 <참새>를 두고 ‘북에 있는 자신과 남한에 있는 5명의 가족들, 그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철책선, 가족들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 미안함을 참새들과 나무 울타리를 통해 표현하였다’고 설명했다.


휴전선을 넘어 참새들이 다 같이 모여 함께 울고 웃을 통일의 그날, 정종여의 작품과 가족에게 진정한 해방이 오길 기원한다.


[사진출처] 청계정종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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