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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Jan 04. 2019

민족 무용의 세계적 거장, 최승희

동양의 진주


세계 순회공연을 앞두고 최승희는 오빠에게 편지를 썼다.

“바다에 떠 있는 큰 군함을 볼 때면 사람의 힘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함상(艦上)에 걸려 있는 대포의 포구는 창공을 향해 기운차게 팔뚝질을 하고 있습니다. 군함은 나라를 위하여 싸웁니다. 그러나 나는 조선의 리듬, 더 크게 말하면 동양의 리듬을 갖고 서양으로 싸우러 건너갑니다. 아, 나는 기쁩니다. 용기백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의심되는 것은 저는 제 자신이 확실히 조선의 호흡 ― 조선의 리듬은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마는 ― 오빠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떤 경우에라도 민족은 망하지 아니하고 그 민족의 예술도 결단코 망하지 않는다고요.” <불꽃 1911~1969, 세기의 춤꾼 최승희 자서전 中>

1936년. 최승희는 스페인 마드리드 세계무용콩쿨에서 1등을 했다. 같은 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 선수와 한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독립운동가 여운형 선생은 자랑스런 민족의 아들, 딸이라며 직접 셔터를 눌렀다.

무용가 최승희는 당대 세계적 거장이었다. 1938년 미국 순회공연 당시 노인과 바다의 작가 헤밍웨이, 찰리 채플린, 로버트 테일러 등 세계적 인사들이 그녀의 춤에 매료되어 찬사를 보냈다. 다음해 유럽에서는 피카소와 마티스, 작가 로맹 롤랑 등이 줄지어 공연을 찾았다.

로버트 테일러는 특히 친밀한 사이였으며, 그녀의 헐리우드 진출을 추진하기도 했다. 피카소는 최승희의 춤에 감동받아 자신의 작품을 선물하기도 했다.

최승희는 프랑스, 이탈리아, 덴마크, 스웨덴, 터키 등 유럽 순회공연에 이어 중남미, 동북아를 돌며 세계적인 무용가로 명성을 떨친다. 1938년 브뤼셀 세계무용콩쿨에서는 마리 비그만, 루돌프 폰 라반 등과 함께 심사위원으로 활약했다.

그녀는 ‘동양의 진주’라 불리며 전 세계적인 찬사와 명성을 얻었다.

화랑무

반도의 무희, 최승희


“봄이 왔네, 봄이 와~” “거기에 맞춰서 최승희가 초립동이 춤추죠. 빨간 옷 싸악. 첫 눈에 반해버려요. 최승희가 무대에 나와서 하는데 이건 뭐 미의 극치에요. 그러니까 하나 끝났는데 징 하고 들어가고 박수를 쳤지요. 야, 춤이라는 게 저렇게 좋은 것일까. 그러고는 돌아와서는 며칠 동안 진짜 잠을 못 잘 정도로...” <2004, 한국 근현대 예술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48, 차범석, 한국 문화 예술 위원회>


최승희는 당대 최고 스타였다. 1936년 댄스영화 ‘반도의 무희’ 히로인으로 활약하며, 광고 모델, 배우로 큰 인기를 누렸다. 세계 무용 콩쿨에서 1등을 하고 영화와 광고, 심지어 음반까지 냈던 최승희는 2010년대 김연아 선수에 버금갔으리라 추측된다.

최승희는 ‘전통 무용의 현대화’를 추구하며 일제 식민지 시절 사라질 위기에 놓인 전통춤을  다시 살려냈다. <에헤라 노아라, 1933>는 한국민속무용의 대가인 한성준으로부터 배운 태평무, 한량춤을 재해석해 만든 작품으로 최승희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이다.

최승희는 지방을 돌아다니며 전통춤으로 배웠다. 춤은 기생이나 춘다는 편견을 깨고 유명하다는 춤꾼을 찾아다니며 우리 춤을 체계화해 나갔다.

최승희 춤의 가장 큰 특징은 민족성과 현대성을 잘 결합했다는 것이다. 안정된 속도와 유순한 흐름으로 서정적이면서도 힘과 기백이 살아있다. 그 속에는 우리 장단의 멋과 흥이 간드러지게 살아있다. 또한 인체의 외적 아름다움이 잘 표현되어 형상이 매우 자연스러우면서, 자세와 표현에서 감정이 흘러넘치게 내면의 아름다움이 하나를 이루고 있다.

장구춤

해방민족의 기수


일본 언론은 순회공연 당시 재미동포들이 최승희 공연장에서 반일 배지를 판 것을 빌미로 삼아 최승희를 반일로 몰았다. 패망이 가까워진 일제는 발악적으로 최승희에게 기모노를 입도록 강요하고, 군부 위문공연과 기금납부를 종용했다. 적극적 친일은 아니었지만 그 혐의를 벗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 다행히 최승희는 일본에서 베이징으로 탈출해 중국에서 생활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이 되자 최승희는 미군정청을 만난다. 그 내용은 1946년 6월 21일 동아일보 ‘무용가 최승희 씨 러치 장관과 회견’ 기사에 담겨있다.

“최근에 중국에서 돌아온 무용가 최승희 씨는 앞으로 조선의 발레 무용을 창작하며 무용연구소를 설치하여 후진 양성에 이바지하기 위하여 준비 중이다. 지난 17일에는 군정청 러치(Archer L. Lerch) 장관과 만나 조선 무용에 대한 설명을 한 다음 군정청의 적극적인 원조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미 군정청은 최승희에게 미국에 건너가 서양 무용을 하라는 권유를 하며 지원을 거부한다. 고민하는 최승희는 자신의 오랜 후원자인 여운형 선생을 만난다. 여운형 선생은 외세에 의한 분단의 비극을 두고 북으로 간 인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최승희에게 월북을 권유한다.

얼마 후인 7월 7일 최승희는 김일성 주석의 편지를 받는다. 김일성 주석은 편지에서 일제의 민족문화말살정책에 맞선 그녀의 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민족문화건설에 참가하여 민족무용을 더욱 발전시켜나갈 것을 권유한다.

결국 최승희는 월북을 선택한다. 최승희의 월북 배경에 대해 먼저 월북한 남편 안막(본명은 안필승, 사회주의 문학평론가)의 영향이라는 둥 친일 논란을 회피하기 위해서였다는 둥 비난은 많다. 그러나 최승희가 월북한 다음 날 발표된 민주일보 기고에는 ‘해방민족의 기수’로 살겠다는 강한 의지가 엿볼 수 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의 정신과 고통, 그리고 우리 민족이나 민족의 형과 선과 색과 음까지도 빼앗아가려 했을 때에 나는 조선의 옷을 입고, 조선 음악으로 조선의 형과 선과 색을 창조하여 그 속에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한줄기 영광을 만들려고 애써 왔다. 이것이 국내에서나 국외에서나 내가 조선의 딸로서 걸어왔던 유일한 길이었다.

오늘 날 일제는 이미 파멸되었고, 우리 민족에 빛나는 발전의 대로가 열려졌다. 따라서 우리는 해방된 조선 예술의 기수의 한 사람으로서 세계 예술사에 찬란한 한 페이지를 차지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주어진 사명으로 생각한다.”<해방민족의 기수로 무용창조, 민주일보, 1946년 7월 21일>

최승희와 남편 안막 그리고 딸

사도성 이야기


북한은 월북한 최승희를 성대희 환영하고 현재 옥류관 자리에 일제시대 요정이었던 건물을 개조하여 <최승희무용연구소>를 세우고 전통무용 발전에 힘을 쏟았다. 최승희는 1946년 조선무용가동맹 중앙위원회위원장을 맡아 첫 사업으로 봉산탈춤보존회를 잘 운영하며, 그 특유의 민족적 특성을 살리면서도 현대적 미감을 보강해나갔다.

최승희는 1948년 한국으로 치면 국회의원에 해당하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된다. 동시에 민족무용창작에 힘써 <농악무> <칼춤> <봄타령> <풍년맞이> 등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 민족장단을 살려 작품을 그리면서도 속도를 조절하고 장구의 장단으로 절정을 이뤄 민족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을 모색했다.

그녀의 작품 세계는 1954년 발표한 무용극 <사도성 이야기>에서 가장 꽃펴났다. 50분에 달하는 이 무용극은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운 신라인의 영웅적 투쟁을 그렸다. 경주 동해안에 있는 사도성을 배경으로 주인공인 사도성주의 딸 금희와 어부출신 무사 순지와의 사랑, 애국심을 잘 그리고 있다.

사도성 이야기는 한국전쟁 후 북한의 첫 컬러TV영화로 개봉된다. 조선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했고, 전통기악의 명인 최옥삼이 작곡을 담당했다. 연주는 국립최승희무용연구소와 국립음악대학의 민족관현악단이 맡았다. 당시 최고 수준의 예술가와 기술진이 만든 수준 높은 무용영화였다.

최승희는 전통무용을 체계화하여 집필하는데도 큰 심혈을 기울였다. 1957년 발표한 <조선민족무용기본1,2>은 민족무용을 발굴하고 체계화하기 위해 방방곡곡을 찾아다니며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춤가락을 하나하나 찾아서 정리한 현대민족무용의 종합체였다. 이 책에는 민족무용의 기초 동작은 물론 평범한 서민들이 즐겨 추던 춤 종류의 기본 동작과 각 춤에 대한 반주곡까지 다 기록되어있다.

김일성 주석은 “정말 대단합니다. 우리 인민의 자랑할 만한 훌륭한 국보 마련하였습니다. 세상에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지만 자기의 무용기본을 가지고 있는 나라나 민족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며 민족무용에 바친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


최승희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64년 <조선아동무용기본1,2> <무용극 대본집> <무용극 원본강좌>과 1966년 논문 <조선무용동작과 그 기번의 우수성 및 민족적 특색>을 집필하여 민족무용을 집대성 하는데 이른다.

학춤


북한 애국 열사릉에 안치된 최승희

최승희는 북한의 애국인사들이 안장되어있는 애국열사릉에 잠들어있다. 그녀에 대한 북한의 평가는 김일성 주석의 회고록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외세의 외풍의 탁류 속에서 시들어가는 민족성을 고취하고 민족적인 것을 발전시키려는 강렬한 모대김이 여러 분야에서 분수처럼 솟구쳐 오를 때였다. 바로 이 시대에 최승희는 조선의 민족 무용을 현대화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민간 무용, 승무, 무당춤, 궁중무용, 기생춤 등의 무용들을 깊이 파고들어 거기에서 민족적 정서가 강하고 우아한 춤가락 등을 하나하나 찾아내며 현대 조선 민족 무용 발전의 기초를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그 당시 까지만 해도 우리의 민족 무용은 무대화의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극장 무대에 성악 작품, 기악 작품, 학술 작품이 오르는 예는 있어도 무용 작품이 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최승희가 춤가락을 완성하고 그에 기초하여 현대인들의 감정에 맞는 무용 작품들을 창작해 내면서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무용도 다른 자매 예술과 함께 무대에 당당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최승희의 무용은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문명을 자랑하는 프랑스, 독일 등에서도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10년 11월 25일 평양무용대학 현지지도에서 "최승희 선생은 우리나라 민족무용발전에 공로가 있는 선생"이라며 언급했다. <통일신보>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생애의 마지막 시기인 2011년 12월 초에도 최승희 선생이 창작한 무용의 기본 동작들을 우리 인민들과 해외동포들에게 널리 보급할 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었다”고 보도했다.

2003년 북한 내각기관지 <민주조선>은 최승희를 ‘세계 10대 무용가’라고 평했다. 2011년 <노동신문>은 기사에서 그녀를 “조선무용예술의 1번수였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단연 1번수였으며 조선의 3대 여걸중의 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은 2011년 11월 24일부터 26일까지 최승희 탄생 100돌 기념행사를 성대히 개최했다. 도서 <태양의 품에서 영생하는 무용가>를 출판하고, 그의 예술 활동과 특징에 대한 토론회도 진행되었다. 무용극 <사도성 이야기>가 현대적 미감에 맞게 개작 완성되어 평양대극장에서 성황리에 공연되기도 했다.

최승희는 남과 북을 넘어 민족 무용의 가치와 함께 영원히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 곁에 기억되는 존재다. 그의 춤이 오늘도 우리 곁에서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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