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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Oct 23. 2019

사라진 천재 작곡가, 김순남

조선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한 작곡가

“작곡가는 많이 나오지 않는다. 한 나라에서 한 명이 나올까 말까 한다. 핀란드에서는 시벨리우스 한 명, 헝가리에서는 바르토크 한 명이 나왔다. 한국에서는 김순남이 나오려다 말고 죽었다.” 세계적인 비디오아트 예술가 백남준이 한 말이다. <잊혀진 민족 음악가 김순남을 아시나요 2017.12.17. 서울신문>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프로코피에프와 같은 러시아 현대 음악거장들은 김순남의 작품을 검토하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을 갖고 있는 조선의 음악가’로 극찬했다. 미국의 윌터피스톤, 지휘자 크세비츠기, 일본의 작곡가 하라타로 등도 김순남을 조선의 천재 음악가로 평가했다. 


구니다치 대학 유학 시절 김순남(맨 오른쪽)


그는 남북해외의 예술가들 이건우, 백남준, 윤이상 등에 영향을 주었으며, 독일 음악사전 엠게게(MGG)에 소개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은 작곡가다.<조선의 천재 음악가 김순남 노동은 교수 삼성문화재단 문화와 나 2002년 겨울호>


그러나 조선 최고의 작곡가 김순남은 월북 예술인 해금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우리에게 사라진 천재였다.


진정한 해방을 위해


김순남이 널리 알리지게 된 계기는 1946년 대구 10월항쟁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인민항쟁가> 때문이다. 대구 10월항쟁은 미 군정이 친일 관리를 고용해 식량 공출을 강압적으로 시행하며 발생한 사건이었다.


“원수와 더불어 싸워서 죽는 우리의 주검을 슬퍼 말아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당시 유명 시인 임화(林和)의 시에 김순남이 작곡했다. 이 노래가 애국가처럼 널리 불리면서 김순남은 조선 제일의 작곡가가 된다. 


김순남은 미군정이 강점한 현실이 문화 발전에 악영향을 주고 있음을 직시했다.


“우리의 해방이 만일 진정한 것이었더라면 금년이라는 해는 자유로웁고 원대한 기획이 실제화되는 도정에 올랐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적·정치적 혼란과 갈등은 여지없이 그러한 기획성을 파괴하여 왔고 몇몇의 실천은 반동적 정치성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발전이 저해되었을 뿐더러 그의 방향은 비밀주의이며 제국주의적인 역사의 역행을 하고 있기까지에 이르렀다. 남조선의 이러한 현상은 곧 문화의 발전을 억제하여 왔으며 따라서 우리 악단은 이러한 파문 속에서 헤매이고 있다.” <김순남의 악단회고기, 1947년 2월호, 예술전문 잡지 백제> 


미군정의 강점은 음악도 교양악협회와 조선음악가동맹으로 분단시켰다. 교양악협회는 미군정 장관을 명예회장으로 두고 천황을 위해 죽으라던 현제명이 이사장을 맡은 단체였다. 조선음악가동맹은 일본제국주의 잔재 소탕과 진보적 민주주의 민족음악문화를 강령으로 하는 단체였다. 김순남은 이 단체에서 작곡부장을 맡았다. 


김순남의 활동은 작곡에 국한되지 않았다. 분단을 막기 위해 노동자 농민의 편에 섰고, 미군정과 경찰에 직접 항의해 나서기도 했다. 그는 <인민항쟁가> <해방의 노래> <자유의 노래><한라산 빨치산 노래> <독립의 아침> <농민의 노래> <청총가> <여맹가> 등 100곡이 넘는 노래를 작곡해 노동자 농민과 함께 싸웠다.<조선 제일의 작곡가 김순남, 2008.12.30. 주간경향>


<해방의 노래> 작사 임화 작곡 김순남


1. 조선의 대중들아 들어보아라 

우렁차게 들려오는 해방의 날을 

시위자가 울리는 발굽 소리와  

미래를 고하는 아우성 소리


2. 노동자와 농민들은 힘을 다하여 

놈들에게 빼앗겼던 토지와 공장

정의의 손으로 탈환하여라 

제놈들의 힘이야 그 무엇이랴

https://youtu.be/3qGWq_-vDBM

해방의 노래

김순남은 제주도 4.3 이야기를 담은 <산사람>도 작곡했다. 당시 빨치산 노래는 다 김순남이 작곡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의 노래는 유격대 노래가 되었고, 힘없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노래가 되었다. 자주의 노래, 통일의 노래를 작곡한 김순남에게 체포령이 떨어졌다. 그는 당연히 북으로 향했다. 1948년 4월,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열릴 때였다.


민족과 음악은 하나다


김순남은 늘 민족과 음악은 하나라고 말했다. 


“우리는 사상과 음악을, 민족과 음악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우리의 음악은 생활의 현실을 진실하게 파악하는 데서 출발한다. 민족과 음악은 하나이다.” <김순남 ‘음악’ 1945.12 <민심> 창간호>


김순남은 일본에게 빼앗긴 우리 음악을 되찾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한 작곡가다. 그는 민족음악의 기틀을 마련하기위해 민속음악을 현대 음악적 기법으로 재창조했다. 우리나라 전통 음계를 현대음악의 화성과 체계에 맞춰 한국 가곡의 기틀을 잡은 것도 바로 김순남이다. 


그는 “민족적 양심에 바탕을 둔 자기 반성과 진실한 비판, 과학적인 판단을 통하여 창작과 연주 활동을 전개하여야 참다운 민족음악을 수행”할 수 있다는 소신을 가지고 해방 공간에서 음악을 통해 민족을 노래했다.<김순남의 악단회고기, 1947년 2월호, 예술전문 잡지 백제> 


1948년 음악평론가 박용구는 ‘조선가곡의 위치’라는 글에서 작가적 개성을 지닌 김순남의 등장으로 비로소 조선가곡이 국제적 수준에 이르게 되었음에 열광했다고 한다.<[문화와 삶]작곡가 김순남을 기억하며, 이희경 음악학자 한예종 강사, 2017.05.17 경향신문>


김순남 첫번째 가곡집 산유화 1947


김순남이 정체성을 확립한 대표적인 한국 가곡은 <산유화> <자장가1,2,3> <탱자> <진달래꽃> <바다> 등이다. 그는 김소월의 시에 곡을 붙이는 등 시의 언어를 음악에 입혔다. 


https://youtu.be/yAtmHeBNZy0

가곡 <산유화> 김소월 시 김순남 작곡 조수미 소프라노


한국가곡연구소 최영식 소장은 “1920년대에 국내에 소개된 가곡은 1940년대까지 서양 가곡의 형식을 모방한 형태에 불과했다. 하지만 김순남은 한국 고유의 민족음악을 확립하고자 독자적인 창작어법을 구체화했다”고 말했다.


최 소장은 “초기 가곡은 서양음악의 형식을 가져오다 보니 시의 언어를 살리지 못했고, 반주도 단순했다. 하지만 김순남은 우리나라의 전통음악 요소를 도입해 우리 가곡의 매력을 살렸다”고 설명했다.  <“한국가곡 꽃피운 김순남과의 만남” 2017.02.20. 동아일보>


나, 내일 이북간다


김순남은 1948년 “나, 내일 이북간다”며 가족을 남겨두고 훌쩍 북으로 향했다. 그는 박헌영과 함께 해주에 머물며 해주음악전문학교 작곡교수를 하다가 8월말 평양으로 갔다. 평양에서 김순남은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헌법위원회 위원, 평양 국립음악학교 작곡학부 학부장, 조선음악동맹 부위원장을 역임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1949년 9월, 그는 소련을 방문하여 쇼스타코비치를 만나게 된다. 소련 10월 혁명 기념행사에 참가차 소련으로 갔던 김순남은 당시 현대음악을 이끌던 쇼스타코비치, 하차투리안 등을 만나 그의 작품을 소개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김순남은 전쟁 중인 1952년 모스크바 차이코프스키음악원에 유학을 가게 된다. 그의 담당 교수였던 현대무용음악 <스파르타쿠스>를 작곡한 하차투리안은 김순남의 작품 <빨치산의 노래>를 새롭게 편곡해 <조선파르티잔의 노래>라는 곡으로 발표하기도 할 정도로 그를 높이 평가했다.<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조영복 돌베게>


https://youtu.be/gbf0KjetxE4

하차투리안-김순남: 조선의 파르티잔의 노래 플루트-임경진 피아노-이인숙


그러나 김순남은 미국 CIC 간첩으로 밝혀진 박헌영과의 악연으로 평양으로 귀환하고 공적지위를 내려놓는다. 하지만 그는 가까이하던 노동자들 속에서 창작활동의 열의를 다시 불태운다.


김순남은 <조선음악> 1964년 4월호에 실린 <현실 속에서 배운 것>라는 글에서 “위대한 로동계급 속에서 배우며 생활하며 창작하는” 행복을 언급했다. 그는 곡을 쓸 때면 노동자들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고, 그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그 어떤 전문가도 생각지 못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았다고 했다. 그 때 창작한 곡이 <돌아라 사랑하는 기대야>이다. 


김순남은 글의 마지막에 “오직 조국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기에 그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조국의 대지를 밟았을 것”이라는 조난당한 선원의 예를 들며 노동자들과 함께 영원히 살고자 하는 결의를 밝혔다.


김순남은 함경남도에 머물며 <김매는 소리>, <나무베는 소리>, <망치질 소리>, <베틀소리>, <배를 무어낼 때 소리> 등 11곡을 채보하여 <조선민요곡집> 3집을 발표했다. 이어 1965년 관현악과 합창 <남녘의 원한을 잊지 말아라>와 1966년 바이올린 독주곡 <이른 봄>을 발표하여 “우수한 작품”으로 다시 우뚝 서게 된다.


이후 김순남은 안타깝게도 전염성 폐결핵으로 1960년대 말부터 투병을 하다 1980년대초 생을 마치게 된다.


사랑하는 딸에게 남긴 자장가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 김세원씨는 한국에서 성우로 활동했다. 김세원씨는 소련과 미국을 찾아다니며 찾을 수 없는 아버지의 흔적을 모았다. 


“워싱턴 국회도서관이 있죠, 거기 가서도 아버지 작품을 찾았어요. 악보를요. 바이올린곡, 합창곡도 있었고. 또 보스턴 옌칭 도서관에서 아버지 수필을 찾았고, 그렇게 찾았다니까요.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미완성이예요. 이북 가서 완성시키신 것 같아요. 일악장하고 이악장 첫 소절까지만 작곡을 하셨는데...”<아버지 김순남의 음악과 인생(남한 인기 성우 김세원) 2007.08.08. 자유아시아방송>


https://youtu.be/h4P1x3N20-4

김순남 - 피아노 협주곡 (1악장, 투 피아노 리덕션)


김순남은 1945년 해방과 함께 태어난 딸을 무척 아꼈다. 그는 1948년 가곡집 <자장가> 중 2편을 딸 세원을 위해 직접 시를 써서 곡을 붙였다. 


잘 자거라 우리 아기 귀여운 아기 

엄마 품에 고이 안겨 어서 잘자라

사나운 가마귀떼 모진 바람 몰아다 너를 울린다 

너 자라서 이 겨레의 햇빛이 되어 

엄마의 이 눈물을 씻어주렴아 


그의 딸에 대한 애틋함을 달래기 위해서였는지. 북한 조선 국립교향악단은 2000년 8월 남북 최초 클래식 합동음악회 환영만찬에 딸 김세원씨 부부를 특별초청했다. 조선국립교향악단 환영만찬에서는 김세원씨 부부와 허이복 북측 단장, 김병화 상임지휘자 등이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았다.  


KBS 관계자는 "이번 환영만찬에는 남측 정부 관계자와 국회의원, 문화 예술계 인사 등이 초청됐지만 김세원씨 부부의 경우 북측에서 직접 ‘만나고 싶다’는 뜻을 전해와 초청이 이뤄졌다"고 설명했다. <북 교향악단, 방송인 김세원씨 부부 특별초청 2000.08.18. 연합뉴스>


50여 년 동안 헤어져 못 만난 외동딸의 모습을 대신해서라도 만나보고 싶은 아버지 심정이었을까. 분단이 끝나고 딸이 아버지 묘에 성묘라도 할 수 있을 날이 어서 오길 바란다. 그 때 쯤이면 민족의 해방을 노래한 조선의 천재 작곡가를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김준성. 본 연재의 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습니다. 인용은 출처를 밝혀주시고 무단 전재나 아이디어 차용은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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