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시대를 그렸던 신여성 정온녀
우리나라 미술사에서 여성 화가는 드물다. 조선 시대 신사임당을 제외하면 일제 강점기 나혜석, 천경자 정도를 손에 꼽을 수 있다.
일제 강점기 그래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성들이 있었다. 1920~40년대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던 여학생들은 133명에 달했다. 여류 서양화가의 선구자로 이름난 나혜석을 포함해 백남순, 박래현, 천경자 등 유명한 화가들 모두 이른바 동미전 출신이다. <김철효, '구술사(口述史) 프로젝트' 1세대 여성미술:동경여자미술학교 증언 자료집, 한국미술기록보존소, 중앙일보, 2003.02.04.>
동경여자미술학교 출신 중 당대 상당한 명성을 얻고도 우리에게 생소한 화가가 있다. 바로 당시 조선 최고 미녀 화가라고 불리던 정온녀이다. 그가 월북을 선택하고 북으로 간 이후 그 빛나는 흔적은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과거 미스코리아 대회는 미의 기준처럼 통용되었다. 그러나 2020년대 여성을 상품화하고 인위적인 미의 기준을 만든다는 비판에 행사는 축소되었다. 아직도 어디선가 미스코리아를 선발하고 있으나 예전 같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한다. 모든 인간을 동등한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이 확산 되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1940년대 미스조선 대회는 어땠을까. 봉건적인 풍습으로 여성들은 미스조선에 나가는 것 자체를 민망하고 창피한 일로 여겼다. 참가자가 부족한 미스조선 주최 측은 기생들을 독려하여 참가하게 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행사를 성사시켰다.
22살의 도쿄에서 온 정온녀는 <모던일본과 조선>이란 잡지를 내는 모던일본사에서 주최한 ‘미스조선’ 대회에서 2등, 준 미스조선으로 당당히 뽑혔다.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남편 수발 잘하는 것이 최고의 덕목이었던 시절, 미인대회에 나가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담대한 도전이었다. <황정수, [한국 근대미술의 자료 발굴과 새로운 이해 ⑫] 정온녀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사진첩 발굴, 미술세계 2018 Vol.75, pp.150-155>
일본 유학을 마치고 경성일보 기자를 거쳐 용산고등보통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이었으니 요즘 시절에도 심상치 않은 배짱이다. 정온녀의 도전은 근대 조선에서 신여성으로 자신의 개성을 뽐내며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겠다는 하나의 선언이었다.
정온녀가 봉건이라는 굴레를 벗고 자신 있게 자신의 삶을 개척했던 이유는 어린 시절에 있다. 그는 1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병든 어머니가 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집에서 자랐다. 일찍 철들 수밖에 없었던 현실은 자력으로 학비를 벌며 생활하는 강인한 힘을 키워주었다. 어떻게든 보통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진학하며 꿈을 키워나가던 그는 라남고등여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과감히 바다를 건너 일본 유학길을 택한다.
정온녀는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서양화부 고등과에 입학한다. 정온녀는 미술전문학교 교수인 나까자와 히로미츠의 사실주의 화풍에 많은 영향을 받아 탄탄한 데생 실력을 체득할 수 있었다. 당시 인상주의 화풍, 추상파 미술 조류가 화단을 휩쓸고 있어 많은 학생들이 시류를 따라 미술의 기초를 습득하기보다 파격적인 시도에만 몰두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부드러운 필체로 그려내는 사실적인 인물화는 그녀의 대표 장르다. 단단한 인물화의 덩어리감과 달리 흩어지는 정물화의 생동감은 그녀가 작품의 대상과 주제에 따라 양식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창작활동을 해나갔음을 알 수 있게 한다.<박계리, 김일성을 그린 여자 정온녀, 통일한국, 2014 Vol.372, p.70>
정온녀는 미술전문학교 때 1939년 유화 <여인좌상>을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했다. 1940년에는 유화 <춘의 습작>을 출품하여 서양화 부분에서 입선을 했다. 동경의 여성 유학생이 입선했다는 사실은 당시 상당히 화제가 되었다. 졸업 작품으로는 <좌상>(1941)을 그렸다.
정온녀는 해방 후 활발한 미술 활동을 펼쳐간다. 1947년 경향신문 후원으로 열린 서울 화신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은 상당한 화제를 모았다. 당시 경향신문은 “정온녀씨는 서양화가로서 일찍이 동경미술전문 양화 고등과를 졸업하고, 일본대학 예술과에서 미술을 연구한 준 예 규수 화가로 그녀의 작품은 가장 현대적인 모랄이 풍부하다”며 현대적인 미감을 소개했다.
신여성의 현대적 작품에 대중의 반응은 뜨거웠고 다음 해 바로 두 번째 개인전이 동화화랑에서 열렸다. 경향신문은 “출품한 작품은 전부 30점에 달하는데 불란서의 루노왈을 연상시키는 독특한 작품으로 화단의 많은 촉망을 받고 있다”고 작품을 소개했다.
또한 “날마다 회장은 초만원의 성황을 이루고 있으며 여류 작가가 희귀한 조선화단에서 상당히 장래가 기대되는 여사의 아담한 작품에 벌써부터 전문가들 사이에는 호평의 화제가 떠돌고 있다.”는 뜨거운 반응을 전했다. <황정수, [한국 근대미술의 자료 발굴과 새로운 이해 ⑫] 정온녀의 여자미술전문학교 졸업사진첩 발굴, 미술세계 2018 Vol.75, pp.150-155>
1949년 7월에는 정온녀, 이현옥, 배정례, 박래현, 천경자까지 5명의 여류 작가가 뭉쳐 5인전을 개최하였다. 이 기간에 정온녀는 서울 뿐 아니라 수원, 광주, 목포, 군산 등에서 수차례 개인전을 이어갔다.
정온녀는 새로운 선진 사조를 접하며 좌익적인 문학예술운동에 참가했다. 강원도에서 태어나 함경북도에서 자란 그는 북의 토지개혁이나 예술가들에 대한 지원 소식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국립미술제작소 초상화반에 들어가 김일성 주석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는 인민군이 서울에서 후퇴하면서 동료 미술가들과 함께 북행길에 올랐다. 정온녀를 비롯해 이석호, 정종여, 임군홍, 정현웅 등의 미술가들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험한 길을 걸었다.
정온녀는 1951년부터 내각사무국 전속미술가로 있으며 최고사령부에서 김일성 주석 가까이에서 초상화를 창작하였다. 이때 내각사무국의 회의실, 응접실 등과 각 사무국의 부서에 걸린 김일성 주석의 초상과 최고사령부에 걸린 풍경화는 모두 그의 작품이었다. 그는 1952년초 미술가동맹으로 소환되어 전문적인 사회주의 화가의 길을 걷는다.
전후 시기 그는 전후복구를 위한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작품을 많이 창작하였다. 유화 <새 결의>(1964), 선전화 <모두 다 모내기에로!>(1968)는 국가미술 전람회에서 3등에 입상하였고, 많은 작품들이 전람회에 입선하여 조선미술박물관에 소장되었다.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391p>
정온녀의 사회주의 인물 주제화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작품은 바로 <아버지, 오늘의 생산성과는?>(1958)이다. 조선력대미술가편람에 소개된 이 작품은 전후복구 운동인 천리마 운동이 한창 펼쳐질 당시의 북한 주민들의 사회상을 생동감 있게 반영하고 있다.
그림의 주인공인 아버지는 오늘 계획을 얼마나 달성했는지 묻는 딸의 질문에 떳떳하게 답변하지 못해 당황해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있다. 노동으로 단련되어 보이는 가무잡잡한 건실한 여학생이 웃으며 아버지에게 묻고 있다. 뒤에서 어머니는 안타까운 듯 남편을 바라보고 있다. 온 사회가 전후복구를 위해 협동하고 있을 때 딸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인 아버지의 자책과 명랑하게 시대적 요구를 받아안은 딸의 대조적인 모습이 인상적이다.
당시 정온녀는 희천공작기계공장에 나가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며 선반기술도 배우고 기계부품도 깎아가며 생활 소재를 찾고 있었다. 이 그림은은 같이 일하던 여성 동료의 집에서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소재로 삼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이야기를 듣는 즉시 그 가정에 찾아가 주인공들을 습작하고 작품을 그렸다.
정온녀의 인물 주제화 중 우수한 다른 작품은 <남녘의 딸들>(1966)이다. 이 그림은 작가의 안타까운 사연이 깃든 작품이다. 그는 월북 때 서울로 일주일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해서 4살 난 딸을 서울에 두고 왔다. 4살 난 딸 김주경과는 그것이 마지막 생이별이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딸을 생각하며 딸이 살고있는 남녘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작품은 민주주의와 자주권, 학원의 자유를 위해 거리에서 항쟁하는 남녘의 여학생들의 투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을 창작할 당시 그의 딸은 19~20살이었다. 정온녀는 암울한 독재 시절 분단을 가져온 외세에 대한 대학생들의 저항에 자신의 딸도 함께하고 있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여학생들을 그렸다. <리재현, 조선력대미술가편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1999, 392p>
정온녀는 풍경화에도 특기를 가지고 있다. <묘향산박물관풍경>(1961)은 가을의 경치를 활달한 필치로 그려놓은 대표작이다. 그가 그린 풍경화 작품 숫자는 상당히 많다. 그는 1968년 이후 자강도 강계미술제작소에서 미술가로 활동하며 꾸준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정온녀는 1994년 국제문화회관에서 개인미술전람회를 가졌다. 전람회에는 국보로 등록된 작품 8점과 그 습작들, 풍경화 70여점이 전시되었다. 전람회는 로동신문, 평양신문, 중앙텔레비젼 등 언론과 잡지에도 비중 있게 보도되었다.
정온녀는 근대미술사에서 상당히 비중 있게 평가해야 할 화가지만 우리는 그의 작품을 확인조차 할 수가 없다. 북한 사회의 살아있는 인물들을 그려낸 영향력 있는 예술가인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통일을 그리며 붓을 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