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지만 당당했던 신여성의 월북 이야기
삼천만의 연인. 은막의 여신. 1930년대 최고 스타 문예봉(文藝峰, 1917~1999)을 수식하는 말이다. 그가 춘향전으로 톱스타가 된 후부터 해방 전까지 당시 조선 영화는 딱 두 종류가 있었다. 문예봉이 나오는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
한상언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은 "이 시기 영화는 문예봉이 주연인 영화가 절반, 아닌 영화가 절반"이라며 "나머지 절반도 문예봉을 캐스팅하고 싶었지만 못한 영화다. 그 기간에 아이 셋을 더 낳았다. 아이를 안 낳았으면 더 출연했을 것"이라고 전했다. <신상미, '북으로 간 영화인들' 한상언 소장 강연 中, 오마이뉴스, 2019.05.24>
문예봉은 일찍이 유랑극단 단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5살 때부터 아역 배우를 했다. 아버지의 막역한 친구이자 영화 <아리랑>의 감독으로 유명한 나운규는 16살의 문예봉을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주인공으로 발탁한다. 이 영화로 문예봉은 스타덤에 오른다.
조선의 미를 간직한 가련한 여인의 이미지는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했다. 당시는 무성영화에서 발성영화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변사의 해설이 아닌 배우의 목소리가 전해지는 발성영화의 파장은 대단했다. 식민지 조선의 첫 발성영화 ‘춘향전’(1935)은 대대적인 흥행 열풍을 달렸다. 문예봉은 조선을 대표하는 배우로 화려하게 그 전성기를 펼쳐갔다.
춘향전의 하이라이트는 변학도의 수청을 거절하는 장면이다. 문예봉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품성으로 춘향의 외유내강한 내면을 실감나게 연기했다. 감쪽같은 연기에 동료 배우들은 ‘어떻게 그렇게 진실되게 연기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연기에 들어가니 그 변학도가 꼭 왜놈 같더군요’라고 답했다. <리경수, 운명의 선택 2, 평양출판사, 2012>
진실한 연기의 비결은 여기 있었다. 당시 일제가 우리말과 이름까지 빼앗아갔던 시절, 문예봉의 연기는 우리 것에 대한 호응으로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문예봉은 17살의 나이로 극작가 임선규와 결혼을 한다. 임선규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쓴 전도유망한 작가였지만 폐결핵 환자였다. 폐결핵 환자에게 선뜻 신혼집 세를 주는 집주인은 잘 없었다. 임선규는 시골 고향으로 요양을 가고 문예봉은 비참한 신혼생활을 홀로 보냈다.
문예봉이 영화 촬영을 하느라 며칠씩 집을 비우게 되면 한 살배기 아들은 줄에 묶여 있어야 했다. 폐병으로 운신이 어렵던 임선규였기에 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 아이는 배가 고파 자신의 똥을 집어먹곤 했다. <조영복, 월북예술가 오래 잊혀진 그들, 돌베게, 2002, 201p>
그는 영화촬영이 새벽에 끝나면 빈방에 홀로 있을 아이를 생각에 애타게 문을 두드렸다. 잠에선 깬 주인의 날 선 핀잔에 어떤 때는 이른 아침 닭이 울 때까지 기다려야만했다. 아이는 찬 바닥에 끈이 묶인 채로 울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당시 여배우들에게 육아는 도저히 혼자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문예봉은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촬영장으로 나왔다. 촬영장 숙소에서 아이와 함께 자고 먹으며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로 지냈다.
“예봉씨가 어린애를 안고 극장에나 거리를 부끄럼 없이 다닌다고 칭찬하는 이도 있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묻자 그녀는 당당하게 답했다. “안 데리고 다니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혼자 두고 다닐 수도 없지 않아요?” (‘문예봉 방문기’, 조광, 1936.3)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배우 문예봉, 중앙일보, 2012.07.02>
전성기를 이어가던 문예봉은 검질긴 일본 당국에 시달려 1944년 은퇴를 선언한다. 그는 조선일보에 ‘나는 영화계를 은퇴한다’는 성명을 내고 시골로 내려갔다. 거기서 남편과 함께 해방을 맞이한다.
문예봉은 해방이 되자 서울로 올라와 민족영화 발전을 위해 활동했다. 그는 배우들과 함께 거리와 공장, 마을을 다니며 집회 현장에서 민주주의적 민족문화를 발전시키자는 연설을 종종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1947년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일체 금지시키며 이를 빌미로 문예봉에 대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현상금이 걸린 전단이 거리마다 나붙고 도피생활은 시작됐다.
함께 남로당에 가입한 남편 임선규는 얼굴이 알려져 활동이 어려워진 문예봉에게 월북을 권유한다. 그는 입안에 솜뭉치를 넣어 얼굴형을 바꾸고 부유한 늙은 가정부로 변장을 한 채 1948년 3월 가족과 함께 북행길 기차에 올랐다.
평양에 도착한 문예봉은 조선국립예술영화촬영소에 들어갔다. 1948년 8월, 문예봉은 김일성 주석을 만나고 첫 예술영화 ‘내 고향’(1949)의 여주인공을 맡게 된다. 김일성 주석은 영화를 보고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셨오. 처음으로 만든 예술 영화인데 이만하면 대단하오.”라며 크게 칭찬을 했다. <홍정자, 내가 만난 북녘사람들, 코리아미디어, 2005>
문예봉은 한국전쟁 시기 북측 예술인들이 만든 영화 ‘소년빨치산’(1951)에 출연했다. ‘소년빨치산’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진행된 국제영화축전에서 <자유를 위한 투쟁상>을 수상했다. 그 공로로 그는 1952년 최초로 공훈배우 칭호 및 국기훈장 제3급을 수훈받았다. 그는 1961년에는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중앙위원으로 정치가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유영호, 북한영화 바로보기 연구자들의 왜곡 ⑭, 통일뉴스, 2009.04.11>
문예봉은 일제강점기 화려했던 스타 배우였지만 30대에 월북하여 처녀 여주인공 역할을 더 맡을 수가 없었다. 40대가 지나자 슬슬 노인 배역을 맡기 시작한 문예봉은 어느 날 연회장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는다.
1960년, 연회장에서 김일성 주석은 “문예봉 동무! 축배잔을 드시오. 동무는 아직 젊었는데 왜 로인 역을 하는가?” “동무에게는 지금이 한창때인데 벌써부터 로인 역을 하기 시작하면 진짜 늙어버리고 만다.”며 젊은 배역을 맡게 고무해주었다고 한다. <리경수, 운명의 선택 2, 평양출판사, 2012>
문예봉은 ‘빨치산 처녀’(1954), ‘다시 찾은 이름’(1963), ‘성장의 길에서’(1966), ‘금강산처녀’(1969) 등 6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북한의 대배우 반열에 오른다. 그는 북한이 만든 역사예술영화 ‘춘향전’(1980)을 창작하는 과정에도 참가하였으며, 1982년 북한 최고의 배우를 상징하는 ‘인민배우’ 칭호와 국기 훈장 제1급을 수여받았다.
문예봉은 칠순이 넘어서도 연기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영화 ‘먼 훗날의 나의 모습’(1997)년에 출연하였다. 이 영화는 그의 연기인생 70년을 돌아보게 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문예봉은 1999년 3월 82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유해는 애국 열사릉에 안치되었다. 조선예술영화촬영소 명의로 된 부고는 '생명의 마지막 순간까지 당과 수령에게 무한히 충직하였으며 우리당의 문예정책 관철을 위해 모든 것을 다하였다'고 그를 기렸다. <조영복, 월북 지식인들의 행로<6> 임선규, 조선일보, 2001.02.04>
1930년대 ‘조선의 미’를 대표하는 배우 문예봉. 가련한 식민지 여성은 해방 후 투사로 어머니로 자기의 연기 인생을 마무리 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출연한 작품이나 그의 생을 굴곡 없이 접할 수는 없다. 하지만 70년 연기 인생 동안, 가난해도 당찬 여성으로 산 그 모습 그 열정은 그대로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