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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삽질 Oct 26. 2020

첫 초상화를 그린 화가, 정관철

보천보의 횃불 작가, 월북작가 정관철

첫 초상화를 그린 화가


해방 후 평양은 들끓었다. 일본군이 물러가고 독립운동가들은 귀국하기 시작했다. 동경미술대학을 졸업하고 1943년 고향으로 돌아온 화가 정관철은 평양공립상업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있었다. 


정관철, 자화상, 52.5x40.5cm, 유화, 1946


조선공산당 평안남도지구위원회 선전부에 소속되었던 그는 주로 선전화나 격문을 그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엄청난 작품을 의뢰받게 된다. 바로 보천보 전투를 통해 국내에 이름이 널리 알려진 김일성 장군의 초상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1945년 10월 14일 평양 모란봉 운동장에서 열릴 <김일성 장군 및 소련군 환영 시민대회> 때 사용할 용도였다. 사진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는 선전화나 초상화를 통해 대중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었다.


30살 화가 정관철에게 운명의 전환점이 온 것이다.


수혈협회 


해방 전까지 궁핍과 가난은 정관철과 늘 함께였다. 그가 15살에 그린 수채화 <빈민굴, 1931>은 죽지 못해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을 바라보며 느끼는 찹찹한 심정과 연민의 정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아직 어린 나이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없다면 빈민굴은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소재다. 


정관철은 고등학교 3학년 때 학생전람회에서 수채화로 입선한다. 부모에게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은 소년은 전문적인 화가를 꿈꾸며 평양에서 서울로 유학을 갔다. 그는 서울의 연탄공장과 먹자골목에서 잡부로 일하며 거의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미술에 대한 열정은 정관철을 유학의 길로 이끌었다. 그는 1937년 일본 동경미술대학에 입학했다. 5년간의 유학 생활은 더 고달팠다. 신문 배달, 우유 배달로 새벽을 시작했고, 광고를 도안하거나 사진업자 밑에서 돈을 벌었다. 그렇게 일해도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휴학과 재입학을 반복해야만 했다. 


정관철은 미술대학에서 다른 학생들처럼 전람회에 출품할 작품을 창작하기보다 유화를 완벽히 배우는데 몰두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비싼 유화 물감, 붓, 종이와 같이 유화를 그리기 위한 재료를 살 돈이 없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유화의 구도와 배치 등 기본적인 자질을 습득하기 위해 유화 대신 수채물감으로 대상을 계속 그려보며 실력을 높여나갔다. 그는 수혈협회를 통해 피까지 팔아가면서 겨우 유화를 그렸다.


보천보의 횃불


첫 초상화로 두각을 드러낸 정관철은 1946년 5월 평양시 미술동맹 위원장으로 선출된다. 미술동맹에서 일하기 시작한 일주일 지났을 때 그는 시 <백두산>의 시인 조기천 등 예술가들과 함께 김일성 주석의 초대를 받았다. 정관철은 여기서 받은 강한 인상을 유화 <보천보의 횃불, 1948>로 승화시켰다. 


<정관철, 보천보의 횃불, 333x248cm, 유화, 1948년 창작, 1955년 개작>


김일성 주석은 예술가들을 만나 항일무장 독립운동에 관한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눴다. 정관철은 준비해왔던 수첩에 빠르게 여러 장의 인물 스케치를 하였다. 이후 그는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면에 있는 보천보 전투 현장으로 답사를 떠났다. 경찰서, 면사무소를 비롯하여 가림천과 시가지 풍경 등을 세밀하게 습작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 창작으로 유화 <보천보의 횃불>은 1948년 제2차 국가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었다. 이 작품은 북한미술에서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작품에는 보천보 전투를 승리로 끝내고 모여든 군중들에게 반일 연설하는 장면이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다. 일본 주재소가 타오르는 불에 반사되는 빛으로 이글거리는 표정들, 열기로 차 넘치는 개성 있는 군중들, 흰 도포로 강조되어 더욱 한눈에 들어오는 연설자의 표정까지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이 작품의 특이점은 1948년 전람회에 제출된 이후 수차의 개작을 거쳐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정관철은 자기 작품에 부족한 점이 있으면 다시 붓을 대는 것을 미술가의 양심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를 북한 조선역대미술가편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창작에서 요구성이 높고 자기 작품에 대한 사회적 합평과 동지적 의견을 귀중히 여기였으며 그것이 자기의 것으로 접수되었을 때는 아무리 많은 공수가 든 것이라 하여도 대담하게 뜯어고치며 처음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진지하고 탐구적인 그의 창작 태도, 이것은 나라의 미술발전을 떠메고 나가려는 참된 주인의 자세와 입장에서 출발 된 것이다.”<조선력대미술가편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리재현 1999 349p>


역사 왜곡


<보천보의 횃불>의 모티브가 된 보천보 전투는 1937년 6월 4일 김일성 주석이 이끈 항일유격대가 국경 수비를 뚫고 국내에 진출한 역사적 사실이다. 독립의 희망이 사라져갔던 1930년대 말, 보천보에서 울려 퍼진 승전 소식은 식민지 조선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다. 


보천보 전투에 대해서는 대한민국 역사 교과서에서도 기술하고 있다. “보천보 전투는 당시 국내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었고, 이 작전을 성공시킨 김일성의 이름도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두산동아 한국사 교과서 p.247> 8종의 한국사 교과서 중 7종의 교과서에 수록될 정도로 역사학계에서도 사실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고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 주요 가이드라인이 제시되면서 보천보 전투에 대한 역사적 서술을 삭제하거나 평가절하하기 시작했다. 교과서 가이드라인 중 민족 독립운동의 전개 부분의 지침을 보면 “1920-30년대 무장투쟁을 특정 이념에 편향되지 않게 서술하라”라고 지적하고 있다. 결국, 교육부는 2013년 보천보 전투를 서술한 7종의 교과서에 삭제 권고를 내렸다. 


이런 방침은 정관철의 대표작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사실주의


정관철이 작품을 그려나가는 과정을 엿볼 수 있는 자필 편지가 있다. 편지에서 인물의 포즈와 구도, 배경에 집중하며 사실적 묘사를 위해 진지하게 노력하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다.


“꼼뽀지재야를 곤치게 되고 모두 좋다고 하였습니다. 저의 것도 무사히 통과되었읍니다. 꼼뽀지아는 대개 이렇습니다. 아직 김일성 원수의 뽀자가 아직 저의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앞으로 더 예쮸드를 써서 고칠 생각입니다.

그림 내용은 1935년 11월에 김일성 원수가 박달, 박금찬 동지를 접견하시고 국내 공작을 지시하시는 장면인데, 때는 겨울 눈이 많이 온 빨찌산 근거지입니다. 인물이 셋이기 때문에 나뜨라를 충분히 써서 힘껏 그려보겠습니다.” <배진영, 전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상진-현대사 증언, 월간조선, 2007년 8월호>


전 북한 문화선전성 제1부상 정상진-현대사 증언 ⓒ월간조선


화가로서 정관철의 특징의 하나는 현실에 충실하고 묘사에서 겸손한 점이다. 그 성품은 화풍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소묘 연습을 통해 사실주의 묘사력의 기초를 다졌다. 아무리 색채가 인상적이고 재치있어도 소묘의 기초가 튼튼하지 않으면 생동감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그는 형태를 정확하게 그리며 명암의 흐름과 입체적 묘사를 통해 사실주의를 확고히 지향하는 유화 기법을 쓰고 있다.


그는 현실의 아름다움에 머리를 숙일 줄 알았다. 좋은 풍경화를 위해 사람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은 산과 강을 걷고 또 걸었고, 동트는 새벽과 해지는 저녁을 생동하게 그리기 위해 무수한 시간을 투자했다. 특히 주제화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성을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을 통해 그려 인물마다 특징을 살려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감상할 때는 군중 속의 세부 인물을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붉은 화필


정관철은 그의 신념대로 붉은 화필을 통해 북한미술을 이끌었다. 그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주제로 한 조선화 <조선아 너를 빛내리>를 그리며 50년간 창작 생활을 결산하였다. 1985년 3월 15일 북한 로동신문 기사 <한 미술가의 화첩>에서는 그의 창작 과정을 소개했다.


"그는 병실의 흰 벽을 화판으로 삼고 작품의 구도를 수십 수백 번씩 고쳐나갔으며 의사와 동지들의 부축을 받으며 동트는 이른 새벽이면 병실의 로대에 나가 밝아오는 평양의 이른 아침의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조를 관찰하고 또 관찰하였다. 그때 그는 자신이 그 작품을 끝까지 완성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심장의 마지막 고동까지 작품의 완성에 다 바칠 뜨거운 마음으로 피타는 노력을 기울이였다" <조선력대미술가편람 문학예술종합출판사 리재현 1999 348p>


그는 <조선아 너를 빛내리>를 완성하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정관철의 아들 정유성은 아버지가 남긴 초안과 습작을 이어받아 1984년 2월 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정관철은 북한미술의 상징과 같은 인물로 남아있다. 그는 1949년 북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약 35년간 조선미술가동맹위원장으로 활동했다. 그 결과 북한 최고 권위의 <김일성상>과 <인민상>을 수여 받았으며 미술 부문에서 첫 공훈예술가, 인민예술가가 되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그의 3주기에 조선미술박물관에서 정관철, 정종여 2인 미술전람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현재 그의 주요 작품들은 조선미술박물관, 조선혁명박물관, 조선력사박물관에 국보로 소장되어 있다. 


그의 작품은 우리에게 사회주의 북한 사회에 대한 이해와 직접 가서 볼 수 없는 북녘의 아름다운 산천을 선물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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