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레시피와 알고리즘 사이

10살 아들과 함께 발견한 RPA, 코딩, 그리고 AI의 진짜 의미

by 카이
"아빠, 꼭 레시피대로 해야 해? 나는 초콜릿 칩을 더 넣고 싶은데..."

토요일 아침, 아들과 함께 아이스크림을 만들던 중이었다. 유튜브에서 찾은 레시피를 태블릿에 띄워놓고 계량컵으로 재료를 정확히 재고 있었는데, 아들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계량 중이던 우유를 내려놓고 잠시 멈췄다. 이 순간, 나는 회사에서 매일 마주하는 질문과 만났다.


지난 주 경영진 회의에서도 똑같은 논쟁이 있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RPA일까, AI일까? 모두가 자동화를 원했지만, 정작 무엇을 자동화하려는지에 대한 이해는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여기 내 앞에서 10살 아들이 던진 질문이 그 답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었다.


아빠가 회사에서 하는 일을 아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떤 로봇은 이 레시피를 완벽하게 외워서 똑같이 만들 수 있다고. 밀가루 200그램, 우유 250밀리리터, 달걀 2개... 1그램도 틀리지 않고 말이다. 그게 바로 RPA라는 거라고. 실제로 우리 회사의 재무팀은 매일 아침 9시 정각에 전날 매출 보고서를 생성하는 RPA를 운영하고 있다. 정해진 데이터베이스에서 정해진 항목을 추출해서 정해진 양식에 담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공휴일만 아니면 절대 지각하지 않는 완벽한 직원이다.


그런데 문득 지난주 아들이 로봇 코딩 학원에서 보여준 미로 찾기가 떠올랐다. 똑같은 미로인데 반 친구들이 다 다른 코드를 짰다고 했다. 어떤 아이는 20줄로, 어떤 아이는 반복문을 써서 10줄로 같은 목적지에 도달했다. 심지어 한 아이는 뒤로 가는 명령어를 창의적으로 활용해서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정답은 하나가 아니라고, 도착하기만 하면 다 맞는 거라고 하셨단다.

바로 이거였다. 내가 RPA와 AI를 너무 단순하게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규칙을 따른다는 것이 곧 창의성이 없다는 뜻은 아니었다. 오히려 규칙이라는 틀 안에서 얼마나 다양한 해법이 나올 수 있는지를 아들의 코딩 수업이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 냉장고를 열어보니 우유가 예상보다 부족했다. 레시피대로라면 250밀리리터가 필요한데 150밀리리터밖에 없었다. 이때 AI라면 어떻게 할까? 아마 두유를 좀 섞거나, 물을 조금 넣고 대신 바나나를 갈아 넣어서 촉촉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규칙을 참고하되, 아예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내는 것. 로봇 코딩으로 치면, 미로 자체가 없어진 것이다. 네가 직접 목적지를 정하고 길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설명을 하면서 깨달았다. RPA는 악보를 정확히 연주하는 것이고, 로봇 코딩은 같은 곡을 다른 핑거링으로 연주하는 것이며, AI는 즉흥 연주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음악이다.


"아빠는 내가 레시피대로 하길 원해, 아니면 내 방식대로 하길 원해?"

아들의 이 질문에 나는 정말로 멈춰 섰다. 계량스푼을 든 채로. 이것이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이었다. 안전하고 예측 가능한 결과를 원하는 마음과 창의적 도전을 장려하는 마음이 대립하는 게 아니었다. 바흐의 푸가처럼, 엄격한 규칙 속에서도 무한한 변주가 가능하다.


최근 프로젝트에서도 비슷한 깨달음이 있었다. 한 대기업 클라이언트가 완벽한 자동화를 원했다. 처음엔 RPA로 시작했다. 그런데 현장 직원들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RPA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두 개의 RPA를 연결했고, 누군가는 중간에 수동 검증 단계를 넣었다. 규칙을 따르면서도 창의적일 수 있다는 것을 그들이 증명하고 있었다.

이 깨달음이 프로젝트의 방향을 바꿨다. 우리는 RPA를 레고 블록처럼 만들었다. 기본 블록은 정해져 있지만, 조합은 자유롭게. 그리고 정말 예측 불가능한 상황에만 AI를 투입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효율성과 창의성을 동시에 잡을 수 있었다.


우리는 결국 세 가지 방식을 모두 시도했다. 첫 번째 아이스크림은 레시피를 정확히 따라 만들었다. 두 번째는 레시피는 지키되 순서를 바꿔봤다. 세 번째는 아들이 원하는 대로 초콜릿 칩을 듬뿍 넣고, 바닐라 익스트랙 대신 민트 시럽을 넣어봤다.

흥미롭게도 아들은 두 번째를 가장 맛있다고 했다. 완전한 규칙도, 완전한 자유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였다. 마치 로봇 코딩 수업에서 가장 재미있어하는 것처럼.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찾고 있던 답일지도 모른다.


월요일 아침, 나는 다시 회의실에 앉아 있다. 프로젝트 킥오프 미팅이다. 이번엔 내가 먼저 묻는다. 우리가 자동화하려는 게 정답이 하나인 문제입니까, 여러 개인 문제입니까? 회의실에 잠시 정적이 흐른다. 그리고 누군가 말한다. 여러 개인 것 같은데, 모두 안전해야 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화이트보드에 그림을 그린다. 미로와 여러 갈래의 길들. 그럼 먼저 안전한 길들을 다 찾아보고, 그 다음에 새로운 길을 만들어봅시다.


토요일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 주는 아들이 로봇 코딩 학원에서 배운 걸 나에게 가르쳐준다고 한다. 장애물 피하기인데, 선생님이 그러는데 장애물을 피하는 방법이 최소 10가지는 된다고 한다. 그럼 우리가 11번째 방법을 만들어볼까? 그리고 우리는 함께 코딩을 시작한다. 앞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또는 뒤로 갔다가 돌아서, 또는 아예 점프하는 명령어를 만들어서... 실패할 수도 있고, 에러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배움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오히려 더 중요해지는 것은 이런 유연함이다. 언제 규칙을 따를 것인가, 언제 규칙 안에서 창의적일 것인가, 언제 규칙을 벗어날 것인가. 이 스펙트럼을 이해하는 것이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과제이자, 우리 아이들이 이미 배우고 있는 미래의 리터러시다.


"아빠, 오늘은 뭐 만들어볼까?"

오늘도 아들이 묻는다. 나는 대답한다. 네가 로봇 코딩에서 배운 것처럼, 같은 목표를 다른 방법으로 달성해보자. 레시피는 있지만 길은 여러 개다. 그리고 가끔은 새로운 목적지를 정할 자유도 있다. 이것이 우리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진짜 코딩이고, 진짜 인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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