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고와 용기에 대하여
새벽 2시, 모니터 앞에서 제안서를 쓰고 있었다. 마감은 이틀 뒤. 요구사항 분석 문서를 옆에 띄워놓고, 사내 레퍼런스를 뒤지고, 경쟁사 자료를 찾아보며 문장을 써내려갔다. 익숙한 작업이었다. 수십 번은 해왔으니까.
그런데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요구사항을 읽고, 우리 역량과 매칭하고, 차별점을 찾아 문장으로 만든다. 이 과정을 나는 거의 자동으로 하고 있었다. 손가락은 키보드 위를 떠다니는데 머리는 어딘가 멀리 가 있는 상태. 몸은 여기 있지만 정신은 출근하지 않은 느낌이랄까.
그 순간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이렇게 패턴화된 작업이라면, 왜 아직도 내가 직접 하고 있지?
"네가 하는 일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자동화할 수 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제안서 쓰는 일을 멈추고, 제안서를 "어떻게" 쓰는지를 적기 시작했다. 요구사항 분석 단계에서는 무엇을 보는지, 어떤 순서로 정보를 찾는지, 각 단계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 내 머릿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던 과정들을 하나하나 언어로 끄집어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글로 적어놓고 보니 패턴이 보였다. 어디서 변형이 필요한지, 어떤 부분이 반복되는지, 무엇이 진짜 판단이고 무엇이 단순 작업인지가 선명해졌다. 10년 넘게 매일 들어갔던 방인데, 처음으로 그 방의 구조를 본 기분이었다. 벽이 어디 있고, 창문이 어디 있고, 문은 어느 쪽으로 열리는지를.
이것이 바로 사고한다는 것의 의미가 아닐까.
우리는 매일 수많은 일을 한다. 하지만 그 일을 "왜" 그렇게 하는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의식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냥 한다. 익숙하니까. 원래 그렇게 해왔으니까. 철학자들이 말하는 "무사유"란 바로 이런 상태다. 생각 없이 흘러가는 것. 관성대로 움직이는 것.
AI 시대가 역설적으로 이 "사고"의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AI는 실행에 탁월하다. 패턴을 학습하고, 지시받은 대로 산출물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AI에게 "제안서를 써줘"라고만 하면 그럴듯하지만 쓸모없는 결과물이 나온다. 왜냐하면 AI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이 제안서가 어떤 맥락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워크플로우를 설계했다. 요구사항 분석, 대응 전략 수립, 제안서 작성, 발표자료 준비. 각 단계에서 어떤 산출물이 나와야 하고, 그것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명확히 정의했다. 그리고 코드 에디터를 열어 바이브 코딩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예전과 달랐다. 모든 걸 AI에게 맡기지 않고, 내가 설계한 프레임 안에서 움직이게 했다. 한 단계씩, 눈으로 확인하며.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물론 AI 모델이 좋아진 것도 있고, 내가 AI를 다루는 경험이 쌓인 것도 있다. 하지만 진짜 결정적이었던 건 두 가지다. 내가 설계한 워크플로우, 그리고 수많은 시도 끝에 얻은 경험. 이 둘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제대로 된 결과물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고는 자신이 하는 일의 지도를 그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AI 시대를 두려워한다. 내 일을 AI가 대체하면 어떡하지? 하지만 내가 경험한 건 조금 달랐다. AI가 대체하는 건 "실행"이지 "사고"가 아니다. 오히려 AI를 제대로 쓰려면 평소보다 더 깊이 사고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의 구조를 파악해야 하고, 각 단계의 의미를 이해해야 하고, 무엇이 핵심이고 무엇이 부수적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일단 해봐야 한다.
처음 바이브 코딩을 시도했을 때 나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화면 가득 빨간 에러 메시지. 돌아가긴 하는데 아무 쓸모 없는 결과물. 그때 포기했다면 지금의 성공은 없었다. 안 될 것 같아도 해보는 것. 실패해도 거기서 배우는 것. 이 자세가 없으면 아무리 좋은 도구가 있어도 소용없다.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코딩? 프롬프트 작성법? 물론 그것도 필요하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건 이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첫째, 자신이 하는 일을 들여다보는 습관. 그냥 하지 말고, 왜 이렇게 하는지 물어보는 것. 책 한 페이지를 읽더라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내 삶에 어떻게 적용되는지, 내가 아는 다른 것들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생각해보는 것. 이런 습관이 쌓이면 어떤 일이든 그 구조를 파악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 구조를 파악한 사람만이 AI를 제대로 부릴 수 있다.
둘째, 일단 해보는 용기. 안 될 것 같아도 시도해보는 것. 실패해도 괜찮다는 것. 아니, 실패해야 배운다는 것. 많은 사람들이 "그건 안 돼"라며 시작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되든 안 되든 시도하면 경험이 쌓인다. 그 경험이 다음 시도를 가능하게 한다. 처음엔 안 되던 것도 경험이 쌓이면 된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이 두 가지는 대체되지 않는다. 자신의 일을 깊이 이해하는 사고력, 그리고 불확실함 속에서도 시도하는 용기. 이것이 AI 시대에 인간에게 남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까만 창에 커서가 깜박이는 입력창을 바라본다. 또 다른 업무를 자동화하기 위해. 그 전에 먼저 할 일이 있다. 이 업무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 왜 그렇게 하는지를 글로 적어보는 것. 사고는 거기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