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많아질수록 확률은 올라가는가

AI 시대, 에너지를 어디에 쏟을 것인가

by 카이
하루에도 수십 개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돌아간다.


어떤 건 미팅 한 번으로 끝나고, 어떤 건 계약서 직전에서 흐지부지된다. POC(proof of concept), 즉 실현 가능성 검증 단계조차 못 가보고 끝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게 반복되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런 질문이 생긴다. 왜 생각보다 일이 잘 안 풀리는 걸까.

처음엔 타이밍 문제라고 생각했다. 혹은 우리 솔루션의 문제거나, 상대 회사의 예산 문제거나. 그런데 오늘 한 고객사에 메일을 쓰다가 문득 멈췄다. 이 사람을 몇 번이나 만났더라. 한 번. 딱 한 번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과거의 영업 방식은 달랐다. AI도 없었고, 정보도 부족했고, 한 번에 여러 곳을 동시에 공략할 수단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두 개의 거래처에 집중했다. 만남이 쌓이면서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맥락에서 결정을 내리는지, 누가 실질적인 권한을 가졌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관계의 밀도가 곧 사업의 밀도였다.

지금은 다르다. 정보는 넘치고, 도구는 강력하고, 하루 안에 수십 곳에 맞춤형 제안서를 보낼 수 있다. 접촉 가능한 기회의 수는 비약적으로 늘었다. 이것이 나쁜 건 아니다. 사업이란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것이고, 씨앗을 많이 뿌릴수록 어딘가는 싹이 트기 마련이다. 넓이의 확률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논리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되는 것이 있다. 깊이의 확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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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거래에는 표면 아래 층위가 있다. 공식적인 요구사항이라고 불리는 RFP(request for proposal) 문서에는 드러나지 않는 맥락들, 담당자가 조직 내에서 어떤 압박을 받고 있는지, 이 프로젝트가 성공해야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의사결정 구조의 어느 지점에서 실제로 잠기고 있는지. 이런 것들은 한 번의 만남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만나면서 조금씩 드러난다. 관계의 밀도가 정보의 밀도를 만들고, 그 정보가 결국 성사의 확률을 높인다.



문제는 지금의 환경이 넓이의 확률을 선택하도록 구조적으로 유인한다는 것이다. 온도가 조금만 식어도 금방 다른 곳을 알아볼 수 있다. 대체재가 항상 존재하고, 그걸 찾는 데 드는 비용이 거의 없다. 그러니 한 관계를 깊게 파고드는 것보다 새 관계를 만드는 것이 더 효율적으로 느껴진다. AI와 도구가 이 느낌을 더욱 강화한다.


역설이 여기서 생긴다. 기회가 많아질수록, 기회 하나하나의 깊이는 얕아진다.


그렇다고 지금 시대에 소수에 올인하라는 말이 아니다. 넓이의 확률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다. 핵심은 판단력이다. 수십 개의 프로젝트를 동시에 굴리면서도, 어느 순간 한 발 물러서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관계에 더 투자할 가치가 있는가. 지금 내 에너지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넓이와 깊이 사이에서 내가 지금 올바른 선택을 하고 있는가.



이 판단을 내리는 능력. 이것이 AI가 대신해줄 수 없는 영역이다. AI는 수십 개의 메일을 동시에 쓰게 해줄 수 있지만, 어느 한 사람에게 두 번째 커피를 사야 한다는 것은 알려주지 않는다.



아이들을 생각하면 이 문제가 더 선명하게 보인다. AI를 통해 정보력과 생산성을 높이는 것, 그건 이미 주어진 환경이다. 우리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안에 있을 것이다. 문제는 그 능력을 언제, 어디에, 얼마나 쓸지를 판단하는 힘이다. 그 힘은 바쁘게 움직이는 것만으로는 길러지지 않는다. 잠깐 멈추고, 돌아보고, 지금 내가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를 스스로 물을 수 있는 시간에서 자란다.



그러려면 아이에게 멈추는 연습을 시켜야 한다. 바쁘게 사는 법이 아니라, 바쁜 와중에 잠깐 서는 법. 오늘 뭘 했는지가 아니라 오늘 왜 그걸 했는지를 스스로 물어보는 습관. 하루를 마치며 "오늘 내 에너지는 어디로 갔지?"라고 묻는 것, 그게 시작이다. 거창한 철학 교육이 아니다. 저녁 식탁에서 아이와 나누는 짧은 대화로도 충분하다. "오늘 제일 집중했던 게 뭐야? 그게 정말 중요한 거였어?"



AI는 아이에게 무한한 선택지를 줄 것이다. 검색하지 않아도 답이 오고, 고민하지 않아도 옵션이 펼쳐진다. 그 환경에서 가장 위험한 건 나쁜 선택이 아니다. 선택을 생각 없이 하는 것이다. 깊이 없이 넓기만 한 삶. 많은 것을 하지만 아무것도 제대로 남지 않는 삶.




기회는 많아졌다. 그래서 더, 어디에 깊어질지를 골라야 한다. 그 선택을 스스로 할 수 있는 아이로 키우는 것. 그게 AI 시대의 부모가 해야 할 가장 본질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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