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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 Dec 10. 2020

콘텐츠 기획자가 하는 일

어떤 마음으로 일할 것인가

대학 시절 연극 동아리에서 '기획'이라는 역할이 있었다. 연출자, 배우, 조명&음향 감독 및 스태프, 다 뭐하는 사람인지 알겠는데, 기획은 대체 뭐지?라는 생각을 했다. 동아리 친구들 모두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엄마' 같은 사람이라는 컨센서스는 있었다. 그냥 엄마는 아니고 돈 있는 엄마. 부자라는 건 아니고, 돈을 관리하고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의미에서.


연극 만드는 아이들이 지쳐있을 때 과자를 잔뜩 들고와 당충전을 시켜주기도 하고, 돈 문제는 다 관리해주고, 홍보를 어디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하고 챙겨줬다. 당장 공연도 하고 연습도 해야 하는데 뭔가 있어야 할 게 없다, 하면 기획자에게 쪼르르 달려가 해결해달라 말했다. 나머지 우리는 그냥 연극만 잘 만들면 됐다.


이렇게 연극 동아리의 '기획'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했으면서, 직업을 선택할 때는 어쩐지 콘텐츠 기획 일이 매력적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뭔가 아이디어도 팡팡 터지고 창의력 뿜뿜 하면서 신선한 기획도 하고 막 엄청 크리에이티브하고 그럴줄 알았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고등학교때 정해버린 아주 확고한 직업 선택 기준이 있었는데, 바로 불편한 옷을 입지 않는 직업을 갖는 것이었다. 어쩐지 콘텐츠 기획 일은 바로 그런 일인 것 같았다. 그리하여 여차저차, 콘텐츠를 기획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 정확한 직업명은 편집자니 에디터니 뭐니 매번 바뀌었지만.


그래서 콘텐츠 기획자가 크리에이티브한 직업이었는가?! 물론 그런 면이 있긴 하지만, 일을 하면서 더 중요한 건 다른 데 있다는 걸 깨달아갔다. 그리고 그 대목에서 바로, '돈 있는 엄마'의 이미지가 소환된다.


콘텐츠 기획자는 아이디어도 중요하기는 하지만 예산과 비용의 지출 관리부터 콘셉트 도출, 대중 접점을 찾는 일까지 프로젝트의 전반을 다 챙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크리에이터보다는 프로젝트 매니저에 가깝다. 1.어떤 콘텐츠를 2.누구에게 3.어떻게 전달해 4.수익을 창출할지의 모든 과정을 매니징하는 사람이다. 어느 조직에 있는지에 따라 약간씩 달라지겠지만 나는 이런 태도로 내 일에 임했다.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 어깨너머로 배운 바는 이렇다.


그렇다면 해야 하는 일은 이런 거다. 프로젝트가 언제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할 때 가장 효과적일지를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목적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방해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프로젝트의 목표를 벗어나지 않도록 다독이고, 계약이나 리스크 관리도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필요한 커뮤니케이션 스킬은 다양하다. 어떤 기획자는 화를 내거나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묵살하면서라도 프로젝트를 끝낼 거고, 어떤 기획자는 두루두루 살피며 시너지를 내고자 할 수도 있다.


편집자가 때로는 책에 도장 찍는 일이나 책 포장에 시간을 쓰는 것, 에디터가 가위질도 하고 칼질도 하고 글을 열 번 고치거나 파트너의 컴플레인을 감당하거나 밥을 사먹이거나 온갖 사소하고 짜친 일을 다 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거다. 결코 아이디어만 쓱 내고 내 아이디어에 심취해 박수 받는 사람이 아니란 것.  


내가 오늘 구구절절 이렇게 내 일에 대해 떠드는 이유는 얼마 전 <기획은 패턴이다>의 한 구절을 읽고 생각한 게 있기 때문이다.


경험칙이 개인 안에 갇혀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는 다양합니다. 그중 하나는 이미 누군가가 알아낸 요령이 공유되지 않는 바람에 각자 오랜 시간을 들여 처음부터 다시 알아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피할 수도 있었던 실패를 경험합니다. 그뿐 아니라 사람마다 경험칙이 다르면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할 때 효과적인 협업이 이루어지기도 어렵습니다. p.24


이 분야도 사람마다 경험칙이 매우 다른 분야다. 직업 자체를 정의하거나 업무 범위를 정의하기도 쉽지 않다. 콘텐츠 기획자의 활동 영역은 매우 넓으며, 각 분야에 다양한 이름으로 포진해있다.


그러다 보니 노하우나 일하는 방식이 쉽게 공유되지 않는다. 직업관이나 일에 대한 태도가 공유되지 않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보통 내 일에 대해 글로 쓰는 걸 쉽지 않게 생각한다. 쑥스럽기도 하고 특별히 이야기할 만한 것도 없는 것 같고. 그런데 <기획은 패턴이다>를 읽고, 작은 경험이라도 공유되면 누군가에겐 도움이 될 수도, 나 또한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 일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고, 대학시절 물음표로 품었으나 이미지로는 확실히 알 수 있었던 그 '기획'의 역할에 가닿았다.


기획 일을 시작한 뒤 수없이 밀려드는 작은 민원과 '내가 이런 일까지 해야 하나' 싶은 일에 회의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그게 다 기획자의 일이다. 기획이 제대로 잘 진행될 수 있도록 모든 국면을 세심하게 보살피고 케어하는 사람. 관련된 비용과 사람을 두루 살피는 사람. 그때 그 돈 있는 엄마ㅎㅎ


이건 그냥 나만의 직업관일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는 것. 그런데 여러 콘텐츠 기획자들을 만나다 보면, 이 직업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일할 때 기분이 좋았다.


일함에 있어 실무적 스킬보다는 직업관이나 업의 태도가 훨씬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마음으로 일해야 하는가'가 일의 과정과 주변 사람들, 결국엔 장기적 퍼포먼스와 직업적 생존에도 영향을 준다고 생각한다. 업무 방법이나 커뮤니케이션 방식은 일하는 마음에 따라 자연스레 정해진다. 내가 박수받기 위해서만 일한다면, 작업 과정 전반에 있는 사람들을 두루 살피고 다독이기보다 내 성취를 위한 도구처럼 대하게 될 것이며, 상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내 말만을 앞세울 것이다.


어느 방법으로 일할지는 자신의 선택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적어도 함께 성장하겠다는 마음으로 일하고 싶다. 함께하는 이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내 생각을 잘 전달하며 우리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를 내도록. 결국 함께하는 사람들과 같이 성장할 수 있도록. 나는 그렇게 일하고 싶다.


그래서 결국 내가 생각하는 콘텐츠 기획자의 일이란, 연극 동아리 시절 그때 그 '돈 있는 엄마'의 일이다. 하나의 프로젝트를 달성하기 위해 관계 맺은 이들을 때로는 도와주거나 보호하고 때로는 등떠밀어주며, 그걸 위해 필요한 시간과 금전적 자원을 관리하면서 머릿속에만 있던 아이디어를 현실화하는 일이다. 그래서 속상한 일도 많고 정답이 없을 때도 많지만 종국에는 함께 해낸다는 점, 함께 성장한다는 점에서 멋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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