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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ee 리뷰

일생에 한번은 꼭 어린이였잖아, 우리

<어린이라는 세계>를 읽고

by hee

세상 모든 어른들을 붙잡고

제발 이건 꼭 한 번 읽어봐달라고

권하고 싶은 책


옆 반 수영이보다 시험 성적이 좋지 않다고 담임 선생에게 따귀를 맞았다. 내 나이 열한 살 때였다. 성적은 전교 몇 등, 손가락 하나로 셀 수 있는 상위권이었다. 선생은 우리 할아버지와 동갑이었고, 지금 기억으로는 250페이지 단행본 같은 크기와 두께의 손을 가졌다.


이게 어린이 시절에 대한 나의 가장 강렬한 기억이라니 참 애석할 따름이다. 그 직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아마도 울었고, 친한 친구들이 위로해줬다. 엄마, 아빠는 어땠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나는데, 엄마가 언젠가 "그때 선생님한테 뭐라고 할까 하다가 할아버지 때문에 하지 않았는데 후회가 된다"고 했던 말은 기억에 남는다. 이제는 할아버지도 돌아가셨고, 담임이었던 그 노인도 시간을 이기진 못 했다.


그다음으로 강렬한 어린이 시절의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그러니까... 열세 살 때다. 그 꼬마가, 세상의 부조리를 그때 알아버렸고, 나는 어른을 믿지 않는 청소년으로 자랐다. 무슨 백일장에 나갔다. 국가 기관이 주최하는 곳이었는데, 상을 받았다. 그런데 상을 받은 글은 내 글이 아니었다. 내 글을 담임이 고쳐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확히 어떤 부분을 얼마나 고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쓰지 않은 문장들이 많이 있다고 느꼈다.


어른들은 기뻐했다. 시상식에 나가 사진을 찍으라고 했다. 정확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엄마한테 "이거 내가 쓴 거 아니야"라고 했는데 엄마는 "그래도 니가 쓴거야"라고 일축했다. 동의할 수 없었지만 뭔가 파도에 휩쓸리듯이 어, 어, 하며 상도 받고 축하도 받고 했다.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기쁘지 않았고 자랑스럽지도 않았다. 좀 부끄러웠던 것 같다. 그 이후 스물 몇 살까지나는 칭찬을 받아도 기쁘거나 자랑스럽지 않았다. 난 부족한데 왜 칭찬을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만일 그때 어떤 어른이 내게 "많이 아팠겠다, 부당한 일을 당했구나." "어른이 어린이를 성적으로 평가하고 때리는 건 잘못된 일이야. 그 선생님이 잘못했네" "선생님이 어느 부분을 어떻게 고치셨는지 같이 볼까?" "왜 그렇게 하셨고 어떻게 그렇게 된 건지 선생님하고 같이 이야기해볼까?" 같은 말을 해줬다면 어땠을까? 그때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면, 나는 다르게 자랐을까?


책 <어린이라는 세계>의 저자 김소영은 스스로도 품게 되었던 이와 비슷한 가정에 대해 이렇게 결론짓는다.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에게 그런 말을 해준다. 그러면 요란한 시간 여행 없이도 이 말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p.251


그렇다. 중요한 건 내 과거의 상처에 보상을 받는 게 아니라 나의 후세대에게 나는 어떤 어른이어야 할까 하는 문제다. 그래, 한동안 어린 시절의 상처가 마음속에 뾰족이 남아서 내 삶의 어느 시점에 구김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내가 듣지 못 했던 말의 가치를 아는 어른이 됐다. 그 말을 해주지 못 했던, 그런 말을 할 수 없었던 그 시대 어른이라는 세계를 이해하고, 다만 후세대가 누려야 할 존중이 무엇인지 성찰하려고 노력하는 어른이 됐다. 그렇기 때문에 이젠 과거를 불평하거나 그때 그 어른들을 미워하기보다 김소영 작가와 비슷한 생각을 한다. 그렇게 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짐을 결국 어린이가 떠안을 것이다. 나는 조그마한 좋은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어린이에게 주고 싶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자라면서 모양이 잘못 잡힌 부분을 고칠 것이다." p.256


책 <어린이라는 세계>


어린이 책 편집자, 어린이 독서교실 선생님으로 약 20년 간 일해온 저자가 쓴 이 책은 곳곳에서 어린이와 우리의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어린이를 단지 귀여운 존재가 아니라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바라본다. 그 소중한 구성원이 우리 사회에서 갖고 있는 약자로서의 지위를 성찰하게 하고, 그들을 그저 덜 자라고 미성숙한 존재로 무심히 대해오던 스스로를 뼈 아프게 반성하게 한다.


아이를 갖게 되면서 아이와 어른의 관계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를 여러 번 나눴다. 어린 시절 우리에게 상처가 됐던 어른들의 말과 행동을 짚어보고, 우리는 아이에게 어떤 어른이 되어야 할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화가 귀결되는 곳은 항상,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이의 개별적인 특성을 이해하고, 어른에게 하지 않을 말과 행동은 아이에게도 하지 않으며, 가르쳐야 할 것은 분명하게 가르친다는 것. 이렇게 하려면 우리부터 먼저 스스로의 말과 행동, 가치관을 수시로 돌아보고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


또 오은영 소아청소년정신과 전문의가 주도하는 <금쪽같은 내 새끼>라는 프로그램에서도, 케이스는 굉장히 여러 가지이지만 메시지는 딱 하나로 귀결된다. 어린이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존중하라는 것. 즉 그들의 말을 듣고 공감하고 이해해주라는 것이다. 한 가지가 더 있다면, 어린이들은 부모를 그 누구보다도 사랑한다는 것.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존재들이 바로 어린이다. 이걸 잊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이 책을 읽고 다시금 다짐하게 된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하지 않을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너무너무 귀여워도 계속 바라보거나 어르는 말투를 쓰거나 하지 않는다. p.193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p.227


이 책은 오랜 친구에게서 임신 축하 선물로 받았다. 황정은 작가의 소설 <연년세세>와 함께였다. 예전에는 아기나 어린이들에 대해 생각할 때 내 가족을 중심으로만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점점 더 '후세대'라는 관점에서 넓게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과 함께였다. 읽어보고 싶었던 책이어서 반갑기도 했지만, 읽고나서는 또 두 권 다 책이 너무 좋아서 또 고마웠다. 새로운 세대와 기존 세대와의 관계에 대해, 내 과거와 미래의 경계에서 균형감을 가질 수 있게 한 책들이었다.


어린이 문제는 한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p.202


저자가 책에서 소개한 일화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을 적어둔다. 언젠가 신발끈 묶는 걸 어려워 하는 아이에게 "어른이 되면 쉬워질 거야"라고 말했다가, 생각지 못 했던 어린이의 답변에 얼굴이 붉어졌다는 일화다. 어린이의 대답은 이랬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묶을 수 있어요. 어른들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참 당연한 일이고, 우리도 어린이 적에는 그랬을 일이다. 하지만 개구리는 올챙이적 생각을 금방 잊는다. 나 또한 조카가 뭔가가 안 풀려 고심하고 있을 때 기다려주기보다 너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하지만 그 마음을 꾸역꾸역 참는다. 어린이도 할 수 있고 어린이 스스로 해야 하니까. 그게 그 어린이의 인생이니까. 내년 봄에 만나게 될 내 아이에게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넷플릭스 <앱스트랙트> 시리즈 시즌2에 소개된 장난감 디자이너 캐스먼은 어린 시절 세면대 높이 때문에 화가 났다고 했다. 자신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고 느꼈고, 이런 디자인을 하다니 어른들은 바보라고 생각했단다. "어른들은 낮은 세면대를 쓸 수 있지만 아이들은 쓸 수 없으니까." 그러면서 우리를 둘러싼 건축 구조가 권력과 서열에 따라 만들어졌음을 지적했다.


건축뿐만이 아닐 거다. 모든 시스템이 그러하다. 어른의 속도, 어른의 크기에 맞춰 아이들이 적응해야 하도록 만들어졌다. 그 안에서 이제는 세상의 크기와 속도가 너무나 익숙해져 너무 바빠진 어른들은, 아이들을 기다려주기보다 재촉하려 하는 충동에 휩싸인다.


하지만 어른은 낮은 세면대를 쓸 수 있지만 아이들은 그럴 수 없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20


세상 모든 어른들에게 꼭 한번 읽어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책이다.




밑줄 친 문장들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p.18


버스를 타고 내릴 때, 문을 열고 닫을 때, 붐비는 길을 걸을 때나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머뭇거릴 때 어린이에게 빨리 하라고 눈치를 주는 어른들을 종종 본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간단한 일이라 어린이가 시간을 지체하면 일부러 꾸물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렸을 때 기다려주는 어른을 많이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지금 어린이를 기다려주면, 어린이들은 나중에 다른 어른이 될 것이다. 세상의 어떤 부분은 시간의 흐름만으로 변화하지 않는다. 나는 어린이에게 느긋한 어른이 되는 것이 넓게 보아 세상을 좋게 변화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p.20


우주가 무수히 많은 곳에서 무수히 많은 방식으로 아름다운 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가. 그러면서도 우주는 활기차고 사무적이다. _메리 올리버, 완벽한 날들


사람들이 각자 자기 방식으로 살아가는 우주는 활기차다. 서로 달라서 생기는 들쭉날쭉함이야말로 사무적으로 보일 만큼 안정적인 질서다. 그런 우주 속에서 살아간다는 게 나는 안심이 된다. 우주가 우리 모두를 품을 수 있을 만큼 넓다는 사실도. p.92


상대가 어른이라면 하지 않을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어린이가 너무너무 귀여워도 계속 바라보거나 어르는 말투를 쓰거나 하지 않는다. p.193


어린이가 횡단보도를 건널 때 손을 드는 것은 운전자의 눈에 잘 띄기 위해서다. 몸집이 작아서 눈에 띄지 않을까 봐 조금이라도 커 보이려는 것이다. 대중교통의 좌석에 앉을 때 기어서 올라가야 하는 어린이도 있다. 어른이 한 걸음 걸을 때 어린이는 두 걸음을 걸어야 한다. 어린이는 비 오는 날 투명 우산을 써서 시야를 확보한다. 어린이가 작은 몸으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건 이렇게 현실적인 문제다. p.199


어린이 문제는 한때 지나가는 이슈가 아니다. 오히려 누구나 거쳐 가는 시기이기 때문에 모두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는 일이다. p.202


'얌전한 어린이'를 선별해서 손님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것 자체가 혐오이고 차별이라는 데에 어떤 논의가 더 필요한 걸까? 돈을 내고 사용하는 공간에서조차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것이 차별이 아니면 무엇이 차별인가. '세련된 노인'이나 '깨끗한 남성', 목소리가 작은 여성'만 손님으로 받는다고 하면 당장 문제라고 할 것을, 왜 어린이는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차별하는 걸까? 중요한 차이가 있긴 있다. 그들에게는 싫은 내색을 할 수 없고, 어린이 그리고 어린이와 함께 있는 엄마에게는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약자 혐오다. p.211


어린이를 거부하는 업주에게 껄끄러운 상황을 감수할 용기가 없는 것처럼, 어린이를 참지 못하는 내게는 관용이 없었다. 나는 착하고 귀엽고 예절바른 어린이만 좋아했던 것이다. p.212


아이를 낳으면 안 된다는 말은, 애초 의도와는 다르겠지만 그 끝이 결국 아이를 향한다. 아이는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미래에만 해당되는 말이라면 괜찮을까? 미래의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부정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 말은 결국 어린이와 양육자를 고립시킨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 만든다. 아이를 낳지 않은 사람은 책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이 이야기가 약자를 배제하자는 결론으로 향하는 것이.

사회가, 국가가 부당한 말을 할 때 우리는 반대말을 찾으면 안 된다. 옳은 말을 찾아야 한다. 우리가 사회에 할 수 있는 말, 해야 하는 말은 여성을 도구로 보지 말라는 것이고, 아이를 낳고 키우기 좋은 세상을 만들라는 것이다. 우리 각자의 성별이나 자녀가 있고 없고가 기준이 될 수 없다. 우리가 어린이를 위해서 목소리를 내는 것은 어린이 스스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에게 안전한 세상은 결국 모두에게 안전한 세상이다. p.219


어린이를 사랑한다고 해서 꼭 어린이를 존중한다고 할 수는 없다. 어른이 어린이를 존중하지 않으면서 자기중심적으로 사랑을 표현할 때, 오히려 사랑은 칼이 되어 어린이를 해치고 방패가 되어 어른을 합리화한다. 좋아해서 그러는 걸 가지고 내가 너무 야박하게 말하는 것 같다면, '좋아해서 괴롭힌다'는 변명이 얼마나 많은 폐단을 불러왔는지 생각해보면 좋겠다. p.227


어린이는 나라의 앞날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을 위해서 살아 있다. 나라의 앞날은 둘째 치고 나라의 오늘부터 어른들이 잘 짊어집시다. p. 247


만일 그때 누군가 내게 "글쓰기도 수용처럼 연습이 필요한 거야"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돼. 글은 자기만을 위해서 쓸 수도 있어. 그러면 내 생각을 내가 읽을 수 있거든" "너무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써도 돼. 오늘 쓰고 내일 읽어도 돼" 같은 말을 해줬다면 어땠을까? 글쓰기뿐 아니라 삶의 다른 영역에도 작게나마 영향이 있지는 않았을까?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 이상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어린이에게 그런 말을 해준다. 그러면 요란한 시간 여행 없이도 이 말이 힘을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좋은 점이 또 있다. 그 말을 드디어 나 자신도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럴 때면 내 삶도 새로워지는 것 같다. p.251


나는 이제 어린이에게 하는 말을 나에게도 해 준다. 반대로 어린이에게 하지 않을 말은 스스로에게도 하지 않는다. 이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래야 나의 말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길 것 같아서다. (중략) 어린이 덕분에 나는 나를 조금 더 잘 돌보게 됐다. p.253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오가다 보면 이 나라를 외면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내가 버리는 짐을 결국 어린이가 떠안을 것이다. 나는 조그마한 좋은 것이라도 꼼꼼하게 챙겨서 어린이에게 주고 싶다. 거기까지가 내 일이다. 그러면 어린이가 자라면서 모양이 잘못 잡힌 부분을 고칠 것이다. p.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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