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리뷰
결국 그녀는 정체를 들키고 말 것이다. 여성이라는 정체 말이다.
_<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중에서
갑작스럽게 긴 휴직을 시작하게 됐다. 조산기가 있으니 무척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의 경고 때문이었다.
주치의는 정말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조건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라고 했다. 나도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이름도 붙여주고 성별도 알고 함께할 삶을 수도없이 생각해봤던 뱃속 아기에게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내가 몸 생각 안하고 너무 임신 전처럼 일을 막 했나 하는 후회도 들었다.
안정을 권하는 의사의 말에는 굉장히 강렬한 수식어가 두 개나 들어가 있었다. 무조건, 절대적으로. 나는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선생님, 저는 무리한 것 같지 않은데… 안정을 취하는 게 어떤 건가요? 누워 있으면 되나요?” 의사는 자신도 더 정확히 말해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사람마다 다르다며 얼버무리고는 “눕는 건 도움이 될 거다”라고 애매하게 말했다. 임신 여정에서는 유독 내 몸이 더 낯설게 느껴진다. 몸에 대해 너무 모르고, 정보도 제한적이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단 회사를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그런데 동시에 마음 한 켠에서는 그 생각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쉬어도.. 괜찮은 걸까?
쉰다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좀 막연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나약한 생각을 하는 걸까. 예전 사람들은 어떻게든 버텨서 막달까지 회사를 다녔을 텐데. 게다가 지난 해 10월부터 맡고 있던 매니징 업무는 꽤 재미가 있었고 잘하고 싶었다. 이제 좀 익숙해졌는데 그걸 놓아야 한다니, 아쉽기도 하고 막연히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무엇보다 평생을 스스로 사회인으로서 인지하고 트레이닝해왔는데, 갑자기 가정에 속한 여자로, 엄마로, 사회인의 차원과 다른 어떤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두려웠다. 책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의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여성이라는 정체를 들키고 만 것 같았다. 일하는 자아로서는 잘 몰랐던 내 신체의 정체 말이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언제나 여성이었지만, 경제활동을 하는 사회인으로서는 차별을 경험하는 순간이 아니라면 결코 여성이었던 적이 없으며, 임신으로 내 신체의 여성성이 극대화되어 경제활동하는 자아의 이성을 압도하기 시작하자 당황하고 만 것이 아닌가.
어머니가 되면 모든 것이 충돌한다. 서로 분리돼야 할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갑자기 한데 섞인다. 출근할 때 버려두고 온 사적인 자이 곁에 임신한 배까지 두고 나오기가 불가능한 것이다. 보수를 받고 일한는 직장에 가정의 흔적을 가지고 가야만 한다.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 이상의 그 무엇을.
<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차려줬어요?>는 주류 경제학에서 상정하고 있는 인간상인 ‘경제적 인간’을 비판하는 책이다. 제목만 봤을 때는 조금 뻔한 이야기들이 나올 거라 생각했다. 임금 불평등이나 돌봄 노동을 둘러싼 불평등이 언급되겠지. 애덤 스미스도 엄마가 차려주는 밥을 먹으며 최고의 학자가 됐으면서도, 엄마의 그 노동에 관한 시장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겠지. 책은 여성의 권리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겠지. 이 또한 물론 중요한 이야기이지만, 새롭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고 독서 중간에도 조금 지루한 때가 있었다.
그런데 끝까지 다 읽고 보니 이 책은 더 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성 차별을 지적하고 개선하는 문제 이상이었다. 인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그게 페미니즘이 하는 일이었다.
경제학은 돈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애초부터 경제학은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살피는 학문이었다.
책에 따르면 주류 경제학에서 상정하는 경제적 인간은 합리적 이익을 추구하는 인간이다. 학교에서 익히 듣고 배워 알고 있는 그 인간상이다. 뭔가 멋있는 말이다. 그런데 저자가 지적하는 그 인간은 그렇게 멋지고 우아한 인간이 아니다. 그는 “아동기도 사회적 맥락도 없는 존재다. 그는 땅에서 버섯이 자라나듯 생겨났다.” 또 “육체가 없”으며 “모유가 나오는 가슴도, 호르몬도 없다.” “아기가 그의 어깨에 토한 적도 없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너무 좀비같다.
저자에 따르면 이런 경제적 인간에 관한 가정은 심지어 케인즈조차도 “범죄자 기질과 정신병이 조금 있어서, 우리가 몸서리치며 정신과 전문의에게 넘기게 되는 종류의 사람”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케인즈의 궁극적 목표는 경제적 번영이라기 보다는, 경제적 번영을 통해 이 정신병적인 경제적 인간의 실체를 알아차리고 종국엔 모두가 예술에 심취하며 ‘들에 핀 백합’을 감상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다고.
사회적 맥락이나 육체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이 가정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였을 때 더 쉽게 이해가 된다. 즉, 선진국이 후진국에 환경오염 시설을 옮기는 것, 후진국의 여성이 선진국 남성 대상 성매매를 통해 돈을 버는 것도 합리적 이익을 추구한 결과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경제학자는 마치 흑인과 섞이지 않고자 하는 것이 개인의 합리적 선호인 것처럼 “일부 사람들이 흑인과 섞이는 것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인종차별이 생긴다”고 주장하기도 했단다. 그러니까, 합리적 선택, 이익 추구의 과정과 결과에는 내가 흑인인지 백인인지 아시아인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적은 단순히 주류 경제학에서 여성이 배제되어 있으며 여성의 권리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성별을 둘러싼 차별을 넘어, 인간이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상황과 맥락, 신체적 조건들이 전부 경제적 인간상에 빠져 있기 때문에 경제가 병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예를 들어 만약에 경제적 인간이 사랑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돌봄과 양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게 당연한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차별과 혐오 때문에 벌어지는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게 지상 최대의 과제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정도로 관점을 바꿔보자는 것이다. 경제적 인간이 임산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어떻겠는가?
그럼에도 이 인간은 ‘인간’이라는 이름 하에 모든 성별과 인종, 맥락을 아우르는 것처럼 시치미를 뗀다. 특히 이 인간의 성별 은폐에 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아이를 출산하는 것은 인간의 경험이 아니다. 그것은 ‘여성'의 경험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세상을 보도록 교육받는다. 여성의 경험은 보편적인 것과 항상 별도로 취급된다.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출산에 관한 책을 읽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대신 셰익스피어를 읽는다. 혹은 땅에서 버섯처럼 솟아난 사람들이 태어나자마자 서로 간에 사회 계약을 체결하는 것에 관해 쓴 철학자의 책을 읽는다.
그런데 30여 년 전 행동경제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인간이 전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란 사실을 밝히며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다. 주류에서도 경제적 인간에 구멍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셈인데, 이는 여전히 하나의 지류로 여겨질 뿐 전반적인 관점 변화를 이끌어내지는 못 했다. 그 이유 또한 책에서 밝히고 있다.
휴직 결정에 관해 내가 불안감을 느꼈던 이유는 아마 이런 게 아닐까.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살아가는 ‘인적자본’으로서 착실하게 나의 미래에 투자해왔던 나,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이성과 합리성에서는 고려되지 않는 갑작스러운 신체의 변화를 이유로 내 미래에 투자하기를 멈추고자 하려는 것이었다. 또 나의 노동과 임금을 교환하며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해오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시장에서 경제활동인구로서의 존재감이 지워지는 것을 목전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현대 사회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경제적 인간상에서 멀어진다는 데 불안감을 가졌던 게 아닐까. 아기를 뱃속에 품은지 24주나 된 나에게조차 임신, 즉 나의 신체적 변화는 사실 은연중에 삶에서 부차적인 이벤트처럼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실제 현장에서는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고도 생각한다. 진료를 받은 당일 오후, 무거운 마음으로 팀장님께 말씀드렸다. 휴직에 확신이 서지 않아 일주일 정도 먼저 쉬어보겠다고 할 셈이었는데, 진단 내용을 듣자마자 팀장님은 “당장 쉬어야 한다”고 하셨다. 출산까지 쭉. 타협의 여지 없이 명쾌한 주문이었다. 인생을 길게 보면 그 정도 쉬는 기간은 정말 아무 것도 아니며, 그 정도 쉬고 돌아와도 크게 변해 있지 않더라, 무엇보다 출산과 육아는 축복이다, 당장 몸부터 챙겨야 한다, 그게 당연한 거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생각보다 더 단호하고 명쾌해서 나까지 덩달아 ‘그래야만 한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물론 나는 이것이 내가 운이 좋은 극소수 계층에 속해 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휴직으로 소득이 줄어도 당장 삶에 어려움이 없었고, 직업 안정성이 심각하게 저해되지 않았으며 조직이 임신과 출산에 관한 경험을 꽤 축적해왔다. 내가 현재 팀에서 근무하는 동안 두 명의 선배가 둘째를 낳았고 두 명의 남성 동료가 아빠가 됐다. 하지만 맘카페나 여러 임신 콘텐츠를 보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정규직도 그런데, 비정규직은 더 했다. 한부모 가정의 사정은 또 다를 것이다.
만약 ‘경제적 인간’에게 포궁이 있었다면 우리의 시장과 경제가 달라졌을까? 애덤 스미스가 어머니가 차려준 저녁밥을 경제학에 고려했다면 어땠을까? 뭐 어찌됐든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중요한 건 그런 가정보다 현재에 맞는 의미를 재발견하고 동시대인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결정을 해나가는 것뿐이 아닌가 한다.
현재를 사는 더 많은 사람들이 경제활동에서 사람의 맥락과 상황을 예상치 못한 사고가 아닌 당연하고 중요한 요소로 고려한다면, 일터의 모습도, 일을 둘러싼 사회 제도도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든 그보다 더 작은 조직이든 개인의 행동을 규제하고 사고방식을 유도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사람들이 더 노력해야겠지만. 그래도 개인으로서는, 내가 임신, 출산 경험이 있는 조직 내 선배들에게 도움과 보호를 받았듯, 나도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쉬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말해줄 수 있고, 또 내가 속한 조직과 사회 전반이 당장 인정하지는 않더라도 나만큼은 확신을 갖고 그 환경 또한 당연해지도록 도울 수 있으면 좋겠다.
하여튼 나는 신체 조건상 꼭 쉬어야만 하는 일이 벌어졌음에도 일터를 떠난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낀 성실한 근로 노예였다. 하지만 경험과 확신이 있는 주변인의 도움, 좋은 환경이 주는 혜택으로 인해 긴 휴직을 시작할 수 있었다. 참 감사한 일이다. 오직 내 몸을 위하고 돌보는 시간을 살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주어졌다. 만약 그러지 못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혹시라도 봄이가 잘못되면 그 죄책감은 엄청났을 텐데, 나는 뭘 감당하려고 했던 걸까. 또 한편, 이 순간에도 임산부에게 혹은 다른 사회적 약자에게 패배감이나 모욕감을 주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하면서도 책임에서 순조롭게 벗어나고 있는지를 알고 있을까?
그러니까 만약에 나한테 “그럴 거면 일을 그만 둬라”라고 하거나 “나 때는 다 참아가면서 했어”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나와 봄이의 미래까지 사회적으로 죽여버리려 하면서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을 것인데, 내가 혹시 그 때문에 일을 계속 붙들고 있었어야 했다면, 그리고 그게 결국 봄이에게 좋지 못한 영향을 줬다면 나는 평생 그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사실은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걸 생각하면 참 마음이 무겁다.
휴직을 한 지 약 10일이 됐다. 10일치 만큼 내 몸에 몰입할 수 있었다. 신체활동은 거의 하지 못 한다. 40, 50분씩 공원을 걷는 걸 좋아하는데.. 요샌 집앞 마트만 갔다와도 무리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기가 밑으로 내려가는 것 같은 묵직함 때문에 불안하기도 하다.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자궁경부 길이가 더 짧아졌다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다. 그래서 많은 임산부들이 먹고 화장실 갈 때 빼고 누워 있는 ‘눕눕’ 생활을 한다는데, 누워만 있으면 극단적으로는 혈전이 생겨 죽을 수도 있다..(실제 사례가 있음)
의사들은 보통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일상생활을 할 것을 권고한다. 그 ‘무리하지 않는 선’이란 여전히 안개속에 있지만, 이는 정말 사람마다 달라서 자기 자신이 찾아갈 수밖에 없는 영역 같다. 회사에 가고 돈을 벌고 저축하고 소비를 하는 것만큼 내 몸에 관심을 갖는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시간이 우리에겐 너무 없다. 경제적 인간은 신체가 없기 때문에 그에게 그걸 생각하는 시간은 낭비하는 시간이니까. 움직여보고, 내 신체를 느껴보고, 내 몸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시간을 갖는다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의 이 한 문장이 참 고마워서 적어둔다.
인간으로서 산다는 것은 성별, 신체, 사회적 위치, 배경, 경험,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