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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ee 리뷰

욕, 알고 하자

넷플릭스 <욕의 품격> 리뷰

by hee

니콜라스 케이지가 카메라를 노려보며 비장하게 서 있다. 카메라는 서서히 그를 클로즈업한다.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간 그의 얼굴은 금방이라도 뭔가를 터뜨릴 것 같다. 비로소 카메라가 클로즈업을 멈추자, 그는 말한다.


ㅆㅂ 뭘 꼬나봐? (F**k are you looking at?)


그 뒤로 한 20초 가량 f**k이 난무하는 욕을 쏟아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코미디 시리즈 <욕의 품격> 첫 장면이다.

스크린샷 2021-01-22 오후 4.01.14.png 넷플릭스 오리지널 코미디 시리즈 <욕의 품격> 1화 캡처. 해당 시리즈 전체 진행자로서 1화부터 신나게 욕을 하는 니콜라스케이지의 모습.

이 시리즈는 영어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욕 6가지의 기원과 현실에서의 사용례를 코믹하면서도 지적으로 다루고 있다. 6가지 욕은 f**k, sh*t, b*tch, d**k, pu**y, d*mn이다.


니콜라스 케이지가 진행하고, 메리엄 웹스터에서 20년 넘게 사전 편찬 일을 해온 코리 스탬퍼, 욕에 관한 책을 쓴 인지과학자 벤 버겐, 영문학 박사 멜리사 모어*, 그밖에 더레이 데이비스, 세라 실버먼 등의 코미디언이 등장한다.

*벤 버겐의 저서는 <what the f : what swearinng reveals our language, our brain, and ourselves>로 국내 번역되지 않았고, 멜리사 모어의 저서는 <holy shit : a brief history of swearing>로, <Holy Shit : 욕설, 악담 상소리가 만들어낸 세계>로 2018년 번역 출간됨.


1화는 f**k을 다룬다. 영어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욕이자 가장 많이 검열되는 욕이라고도 한다. 이 단어의 기원에 대한 언어학자들의 중론은 ‘가격하다’ ‘치다’의 뜻을 가진 중세 네덜란드어라는 것이다. 약 13세기까지도 이 단어는 성적인 의미와 관계가 없었다고 한다.


이런 나름의 지적 탐험과 더불어, 동화작가 로알드 달이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이 f**k이라거나, 이 욕을 가장 많이 쓴 배우가 누구인지를 밝히거나, 욕을 둘러싼 코미디언들의 경험을 코믹하게 녹여내는 등 재미 요소가 많다. 참고로 이 욕을 가장 많이 쓴 배우는 ‘조나 힐’로, <더 울프오브 월스트리트>에서만 107번, 출연한 영화를 통틀어서는 총 376번 사용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재밌었던 건, 미국이든 한국이든 욕설을 사용하는 데서 비슷한 포인트들이 있다는 점이었다.


1. 다양하게 변용된다.

F**ker, f**khead, 기타 등등.. 우리말로는 뭔가 ‘썅’이나 ‘씹’ 같은 게 붙어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욕이 아닐지.


2. 여성을 비하하는 단어가 사용된다.

한국의 욕도 '-년'이 '-놈'보다 강하며,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에서 출발해 남녀 모두에게 모욕을 주는 단어다. 영어에서 b*tch나 pu**y 또한 여성을 비하하는 의미에서 출발해 남녀 모두에게 모욕을 준다. 특히 p**sy의 경우 원래 고양이를 뜻하는 단어였는데, 그게 여성으로 옮겨갔다. 그 과정은 시리즈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시대가 지나며 재정의된다.

한국에서 2011년에 ‘잡년 행진’이 등장했고, 2018년에 ‘썅년의 미학’이라는 콘텐츠가 주목을 받았다. 여성을 향하던 욕설을 여성이 그에 반기를 드는 의미로 스스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기존의 의미에 새로운 정의가 입혀지는 움직임이다. 한국어는 잡년이나 썅년과 더불어 '-년'이라는 접미사(?)도 여성들이 서로를 부를 때, 동지애 비슷한 마음을 담아 사용하는 것 같다. <욕의 품격>에 따르면 b*tch도 마찬가지다.


d*mn도 시대 변화에 따라 재정의됐다. 이 단어는 신이 세상의 중심이던 중세시대에는 굉장히 모욕적인 말이었으나, 현대에는 굉장히 소프트한 욕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d*mn은 저주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신과 신이 내리는 저주가 더 이상 인간에게 큰 두려움을 주지 않게 되면서 그 의미가 변했다고. 한국에서는 이렇게 세계관이 변함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 욕이 있는지 궁금하다.


인터넷을 좀 찾아보니 한국은 과거에 형벌에 관련한 욕이 많았다고 한다. 육시랄, 오사랄 같은 단어들. 이런 말은 요즘에는 상스럽게 느껴지거나 공식적인 미디어에서 노출을 꺼리거나 하는 단어가 아닌데 과거엔 d*mn처럼 좀 더 상스러운 말이었을까? 심각한 전염병에서 유래한 '염병'도 지금은 상스럽게 느껴지지 않는데 치료가 어려웠던 과거엔 정말 불쾌하고 혐오스러운 단어였을지도 모른다.

*참고 : 1) 네티즌들이 궁금해하는 어원 몇 가지 2) 네이버 지식백과 '육시랄, 오사랄'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부분이 있다. 특정한 욕은 그 욕을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으로 나뉜다는 점이다. 여러 가지 욕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을 비하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러다 보니 이 차별과 혐오가 현재 진행형인 경우에는 일상적으로도 미묘한 갈등을 촉발시킨다.


<욕의 품격>에서 그렸던 욕 중 이 경우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것은 b*itch다. 이 단어는 여성들 스스로 '걸크러쉬'를 나타내고, 여성을 얌전한 이미지에 가두려는 문화적 배경에 저항할 때 사용하면서 재정의되고 있다. 그래서 여성들이 사용하거나 여성끼리 애정을 담아 사용하는 경우에는 긍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욕의 품격>에 따르면 게이 커뮤니티에서도 그렇다고. 하지만 이 단어를 이성애자 남성이 여성에게 사용할 경우에는 여전히 모욕감을 불러일으키는 단어다.


이는 흑인 비하에 사용되는 nword와 닮았다. 넷플릭스의 다른 시리즈 <친애하는 백인 여러분>에 이 단어를 쓸 수 있는 사람과 그럴 수 없는 사람 간에 발생하는 갈등의 실체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참고로 이 시리즈는 대학 내 인종, 소수자 차별을 둘러싼 미묘하고 다양한 갈등을 담아낸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다.


장면은 이렇다. 한 파티에서 대학생들 사이에 시비가 붙는다. 학생들이 다같이 모여 힙합 음악에 맞춰 춤을 추던 중, 한 백인 학생이 랩 가사를 따라 nword를 입에 담는다.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흑인 학생 레지 그린이 이를 듣고 그 말은 부적절하다며 항의한다. 하지만 백인 학생은 노래 가사를 따라 불렀을 뿐이라고 변명한다.


이 시비가 몸싸움으로 번지게 되는데, 누군가의 신고로 교내 경찰까지 출동한다. 출동한 경찰은 몸싸움 당사자 중 흑인인 레지에게만 신분증을 요구하고, 레지는 이에 항의한다. 그러자 모든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에게 총구를 겨눈다. 이 사건으로 레지를 비롯한 학생들이 충격에 빠진다.


이 장면은 굉장히 상징적이다. 차별이 사라졌다고 착각하거나 자신의 중립성에 대해 과신하는 이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눈에 항상 잘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차별은 곳곳에 아주 뿌리깊게 녹아 있다. 차별을 당하던 당사자들은 그 미묘한 감각을 아주 온 몸으로 잘 알고 있다.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차별을 당하던 자가 아니던 이가 이 민감한 단어를 사용한다면, 그순간 그 단어 뒤에 녹아 있는 오래된 차별의 역사까지 현재로 호출하는 격이 된다. 단순히 노래 가사를 따라 불렀다 하더라도, 역사적으로 차별의 대상이 되어온 사람들에게는 민감한 단어일 수밖에 없다.


b*tch도 이와 마찬가지인 것이다. 너네들은 쓰는데 왜 나는 안 돼? 라는 이상한 기계적 중립은 불가능하다. 그 말을 쓰는 주체가 중요한 말이기에 쓸 수 있는 이와 그럴 수 없는 이가 나뉜다. 차별의 당사자들은 여전히 그런 단어 하나부터도 싸워서 쟁취해야 하는 입장에 있다.


nword와 b*tch의 사용 주체에 관한 논란이 비슷하다는 점을 깨닫고, 차별의 양상은 그것이 어떤 차별이든 참 많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극복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미묘하고 세밀한 갈등까지도 닮았다. 그리고 그 모든 건 우리의 언어 속에 아주 단단히 뿌리 깊게 자리한다.


<욕의 품격>은 각 회차가 약 20분 가량인 짧은 기획물이어서 금방 볼 수 있다. 나는 시리즈를 보고 그만... 진지한 생각을 하게 됐고 진지한 글을 쓰게 됐지만, 콘텐츠는 가볍고 재밌게 즐길 수 있다. 해외 코미디언들은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한테는 니콜라스 케이지가 좀 킬링 포인트였다. 의도적인 코미디 물에서 배우의 능청스러운 연기를 보는 것만도 즐거웠다. 국내 욕의 기원과 변천을 다룬 콘텐츠도 나오면 좋겠다.




*브런치 넷플릭스 스토리텔러로 선정되어 넷플릭스 멤버십과 소정의 상품을 지원 받았으며, 넷플릭스 콘텐츠를 직접 감상 후 느낀 점을 발행한 글입니다.


(그런데 아직 핀번호도 상품도 안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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